영화 <나는 부정한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 포스터 ⓒ 티캐스트


영화 <나는 부정한다>는 올해 4월에 개봉한 비교적 최근작이다. 나름 호화 캐스팅(레이첼 와이즈, 탐 윌킨슨)을 걸고 나온 메이저급 할리우드 영화지만, 많은 이들이 개봉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갔을 정도로 흥행에는 저조했다. 그럼에도 영화의 주제가 함유하는 무게와 그것을 완벽히 인지한 듯 보이는 배우들의 호연은 이 영화가 큰 화제가 되지 못하고 묻혔다는 것을 안타깝게 한다.

완벽한 주제, 묻히기엔 아까운 영화

영화는 홀로코스트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독학으로 역사학자(self-trained historian)가 된 영국인 데이비드 어빙이 그를 비난하는 미국 에모리대학교의 데보라 립스타트 교수를 '명예훼손(libel)'으로 고소했던 실제의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법정 드라마다. 어빙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만행을 증명하는 직접적인(예를 들어 캠프 내부에서 촬영된) 물증이 미미하므로 홀로코스트는 허상이라고 주장한다. 저명한 역자학자이며 유태인인 데보라 립스타트는 그녀의 저서 (Denying the Holocaust)와 특강에서 어빙을 비판하고, 이를 이유로 어빙은 립스타트 책의 출판사인 펭귄 북스와 립스타트를 고소하기에 이른다.

처음부터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시작된 재판이기에 립스타트에게 유리해 보이지만 어빙이 재판을 영국에서 진행할 것을 요구하면서 승패의 판도가 불투명해진다. 영국은 미국과 다른 법 시스템을 갖고 있기에, 미국 법에서 적용되는 '무죄 추정의 원칙(presumption of innocence)'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재판이 이루어질 영국 법정에서는 고소를 당한 립스타트에게 무죄 추정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아 이 황당한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그녀가 자신의 무죄, 즉 그녀의 주장이 모두 사실임을 증명해야 한다.

영화는 어빙의 역사서가 거짓이라는 것과 홀로코스트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립스타트가 고군분투하는 과정 그리고 그녀의 눈물겨우면서도 '당연한' 승리를 기록한다. 영화가 시사 하는 역사적인 당위성을 떠나 <나는 부정한다>는 인간적으로 공감할 만한 분노와 억울함이 뿜어져 나오는 다이내믹한 영화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영화의 대부분이 법정 신으로 이루어져 있고,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고증을 다루고 있기에 영화에 등장하는 용어와 역사적 배경의 이해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작품 자체를 따라가고 즐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나는 부정한다>에서 사용되는 용어와 개념을 영화의 설정과 관련하여 설명해 보고자 한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 속 데이비드 어빙 교수 ⓒ 티캐스트


1. Anti-Semitism : 반 유대인주의. 'Semite'라는 단어는 본래 아랍인과 유태인을 포함하는 말이었는데 1800년대 후반 독일에서 유태인을 혐오하는 합성어로 'anti-semite'가 널리 쓰이기 시작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한다. 특히 19세기 후반부터 유태인을 혐오하는 주된 요인이 종교적인 이유가 아닌 인종적인 이유가 되면서 비슷한 시기에 태동했던 우생학에 힘입어 더 빠른 속도로 확산한다.

<나는 부정한다>에서 립스타트의 싸움은 단순히 유명인들의 관문과도 같은 '스토커 핸들링'이 아닌 역사를 부정하는 모든 사람들과 유태인 차별에 대항한 투쟁이었다. 이 때문에 어마어마한 재판 비용을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성공한 유태인들의 기부금으로 충당했는데, 기부금은 재판 후에도 남았을 정도다.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는 어빙의 뒤에는 수많은 '반 유대인주의자들'이 있었다. 립스타트는 히틀러 나치의 스와티카 완장을 차고 법정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그들 앞을 나치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의 호위를 받으며 당당하게 걸어간다. 

2. Apologist : 논란이 될 만한 이슈나 관점을 옹호하는 사람을 아폴로지스트라고 부른다. <나는 부정한다>의 데이비드 어빙은 본인을 '히틀러 아폴로지스트'라고 자기규정(self-appoint)하고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 명령을 전면 부정했다. 그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면 히틀러는 나치가 유태인을 학살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피해자 수가 현저히 적다는 것이다. 그는 아우슈비츠의 가스방(gas chamber)의 존재까지도 부정한 바 있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의 한 장면 ⓒ 티캐스트


3. T.S. Elliot, Anti-Semitism and Literary Form : <나는 부정한다>에서 립스타트의 변호를 맡은 안토니 줄리어스는 프린세스 다이애나의 이혼 재판을 맡았던 것으로 유명해진 '문제적' 변호사이자, 엘리엇의 반유대적 시선을 주장한 책 <티 에스 엘리엇, 반 유대인주의와 문학의 형태>의 저자다. 이 책에서 그는 유태인이 모욕적으로 묘사된 시의 구절과 단어들을 분석한다(예, "Gerontion"). 그의 저서는 문학계에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그 이후로 수많은 문학자들이 이 시집에 실린 그의 시를 분석했지만 엘리엇이 진정으로 반유대주의를 찬양했는지 아니면 반유대주의를 주제로 시를 쓴 것뿐인지 밝혀내지 못했다.

4. Presumption of Innocence : 무죄 추정의 원칙. 라틴어의 원형대로 쓰이기도 하는데, ei incumbit probatio qui dicit, non qui negat, 그대로 해석하면 "증거의 의무는 부정하는 자가 아닌 선언하는 자가 진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상대방의 유죄를 주장하는 사람이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영국에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반대로 고소를 당한 사람이 스스로 무죄를 증명하기 전까지 '유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부정한다>에서 립스타트가 어빙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하고 어빙은 이러한 점을 이용해 일부러 영국에서 재판을 하게끔 신청한 것이다.

5. Mazel-tov : 마젤 토프, 유대어로 "축하한다" 혹은 "행운을 빈다"라는 의미이다. Mazel, 마젤은 유대 신화에서 '영혼의 뿌리'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한다. 수많은 영화에서 유대식 결혼식이나 성인식(bar mizbah) 등에서 사람들이 '마젤 토프' 를 외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나는 부정한다>에서는 립스타트가 재판에서 이기고 자신을 도와준 변호사들과 축배를 드는 장면에서 외친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고대해 온, 뭉클한 순간일 것이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 ⓒ 티캐스트


누구나 아는 뻔한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을 '부정자(Denier)'라고 부른다. 이러한 용어까지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인간들이 꽤 많은 듯하다. <나는 부정한다> 속의 디나이어, 어빙은 많은 면에서 기시감을 준다. 일본 정부가 한국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반응하는 작태나 박근혜 관련 청문회에서 목도했던 안하무인의 사람들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모든 나치 희생자들과 생존자들을 망상가(illusionist)로 만들었던 어빙과 고통스럽게 일치한다.

<나는 부정한다>는 건조한 영화다. 희생자들을 부각시켜 신파를 유도하지도 않고 립스타트의 정신적 고통에 감성적으로 접근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의 어떤 시점에서는 오열하지 않기가 힘들다. 법정 뒤에서 본인들의 존재를 전면 부정 당하는 나치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의 얼굴에 비친 절망과 한(恨)이 우리가 기억하는 그 분들의 얼굴과 너무나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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