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감독을 좋아하세요? 한 편 한 편의 영화로는 알 수 없는 영화감독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오마이스타>는 한 시대를 풍미한 국내외 영화감독들을 집중 조명하고자 합니다. [감독열전]은 시민-상근기자가 함께 쓰는 기획입니다. 관심 있는 여러분의 참여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이무영 감독 영화 현장에서

▲ 이무영 감독 영화 현장에서 ⓒ 이무영


이무영을 처음 보았던 기억은 1990년대 어느 TV 프로그램이다. 개성 넘치는 외모, 능란한 화술, 유창한 영어 실력, 팝송에 대한 깊은 조예는 그를 뇌리에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라디오 DJ, TV 리포터, 팝 칼럼니스트를 넘나들던 이무영이 <본 투 킬> <공동경비구역 JSA> <아나키스트> <삼인조> <소년, 천국에 가다>의 시나리오를 쓴 장본인이란 사실을 안 것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휴머니스트>로 감독이 되었다.

강산이 두어 번 변할 세월이 흘렀으나 이무영 감독은 달라지지 않았다. 몇 권의 책을 냈으며 영화제와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영화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아버지와 마리와 나> <한강블루스>는 개봉하여 관객과 만났다.

이쯤에서 <오마이스타>가 진행하는 '감독열전'에 "왜 이무영 감독을 선택했냐?"고 궁금하실 분이 있지 싶다. 다른 기자들이 소개한 박찬욱, 소피아 코폴라, 고레에다 히로카즈, 우디 앨런에 비한다면 이무영 감독의 상업적, 비평적 성과는 상대적으로 초라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무영 감독을 선택한 이유는 그의 작품들이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국 영화사에서 독특한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제 한 편씩 다루며 돌출을 짚어보고자 한다.

<휴머니스트> 영화의 한 장면

▲ <휴머니스트> 영화의 한 장면 ⓒ 베어엔터테인먼트


이무영과 박찬욱의 시나리오

영화잡지 <키노>는 2002년 12월호에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의 개봉을 앞둔 이무영 감독과 박찬욱, 윤태용 감독이 만난 대담을 실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휴머니스트>(2001)가 자신들 사이에서 많이 오가던 각본이고, 모두 연출을 맡을 뻔했다고 말했다. 모두 탐낼 정도로 <휴머니스트>가 매력적인 시나리오일까? 이미 본 사람은 의아할 것이고, 안 본 사람은 호기심이 동하지 싶다.

전역한 군 장성의 아들 마태오(안재모 분)는 음주단속을 피하려다 경찰을 죽인다. 이를 목격한 다른 경찰이 거액을 요구하자 친구 유글레나(강성진 분)와 아메바(박상면 분)와 공모해 아버지를 납치하는 범죄를 계획한다. 그러나 일이 꼬이면서 엉뚱한 사람을 납치하고 만다.

이무영과 박찬욱이 '박리다매'란 이름으로 시나리오를 쓴 <휴머니스트>는 황당무계한 전개로 일관한다. 똥물을 마시고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 등엔 당시 대한민국을 강타한 엽기코드가 묻어있다. 전라도 사투리를 걸쭉하게 구사하는 수녀와 "짧은 인생을 무의미하게 목욕으로 낭비하는 것은 죄악"이란 대사 등엔 B급 코드가 숨 쉰다. 군대와 경찰의 폭력, 타락한 종교 등 풍자와 박한상 사건에서 가져온 모티브로 점철된 <휴머니스트>를 이무영 감독은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휴머니스트>는 고정 관념을 과감히 깬다. 윤태용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동일화를 계속 거부하는" 전개는 앞서 등장한 <조용한 가족>(1998) <주유소 습격사건>(1999)과 맥을 함께 한다. <휴머니스트>의 탈 장르적 시도는 이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 <지구를 지켜라!>(2003)까지 이어졌다. 이들이 보여주었던 독특한(또는 낯선) 도전은 규격화를 앞세운 지금 한국 영화에선 사라진 유전자다.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영화의 한 장면

▲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영화의 한 장면 ⓒ 에그필름


박찬욱과 다른 길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2002)는 한국 영화의 가장 특이한 제목 군에 속한다. 내용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다. 유명한 개그맨 오두찬(최광일 분)과 그의 철부지 아내 배은희(조은지 분), 개그맨의 아이를 낳은 태권소녀 황금숙(공효진 분)의 삼각관계를 2003년과 2030년을 오가며 보여주는 전개는 황당하기 짝이 없다. 기발한 상상력과 탈 장르적인 화법은 여전했지만, <휴머니스트>보단 대중 친화적이다. 엽기와 잔혹은 낮추고 코미디 수치를 높여 낯설음을 완화했다.

이무영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의문은 변함없다. 유명한 모 개그맨이 아내와 이혼하자 사람들이 여자를 비난하는 풍경을 본 그는 당시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가까이서 지켜본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며 "사람 관계에 대한 외부 평가는 정답보다 오답일 확률이 높다"라고 밝혔다.

전작이 가족을 해체하는 접근이었다면 이번엔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는 전개를 취한다. 이 점은 '박리다매'를 함께한 박찬욱 감독과 이무영 감독의 이후 영화들에 드러난 차이점이기도 하다. 이무영 감독이 희망 어린 시선으로 대안 가족을 모색한다면 박찬욱 감독은 깨어진 가족 관계 속에서 복수와 구원을 엿보았다.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는 두 사람이 나뉘는 분기점처럼 작용한다.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는 당시론 드물게 퀴어 코드를 넣었다. 그것도 상업영화에 말이다.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 <번지 점프를 하다>(2001) <로드 무비>(2002)와 함께 '일찍' 도착한 LGBT 영화로 의미가 각별하다. 성적소수자에 대한 이무영 감독의 관심은 이후 작품에도 꾸준히 나타났다.

<아버지와 마리와 나> 영화의 한 장면

▲ <아버지와 마리와 나> 영화의 한 장면 ⓒ 이이필름


세 번째 작품인 <아버지와 마리와 나>(2008)는 대안 가족에 깊숙이 파고든다. 과거 유명한 록가수였던 태수(김상중 분)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형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다. 책임감 없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 건성(김흥수 분)과 사사건건 부딪치는 태수. 그런 와중에 미혼모 마리(유인영 분)가 아기를 데리고 불쑥 집에 나타난다.

이무영 감독은 이번에도 미혼모, 대마초, 동성애 같은 민감한 소재를 꺼낸다. 전작과 다른 변화도 감지된다. <휴머니스트>의 우울한 색채는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를 거쳐 한층 밝아졌고 <아버지와 마리와 나>는 따뜻함으로 채워졌다. 아들의 입장에서 관찰자, 이젠 아버지로 변화하는 시선도 느껴진다. 신파적 느낌까지 나며 자연스레 대중과 한 걸음 가까워진 화법을 보여준다.

가수 한대수의 삶과 캐릭터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아버지와 마리와 나>. 감독은 당시 여러 매체와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아버지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이야기한다.

"외관상으로 아버지 태수는 대한민국의 낙오자입니다. 소비 지향적으로 변하는 대중음악계에서 볼 때도 그는 뒤떨어져 있죠. 대책 없이 이상향을 꿈꾸는 히피 같은 사람입니다. 이 영화는 사회의 낙오자, 옛날 사람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과연 그것이 나쁘냐는 거죠."

<아버지와 마리와 나>는 세 명으로 형성된 공동체를 뜻한다. 또한, '아버지와 마리화나'를 의미한다. 대마초는 태수에게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는 실패의 낙인이고 갈등의 매개체로 기능한다. 이무영 감독은 불행의 요소를 지닌 '마리화나'를 희망의 언어로 치환하는 마법을 부린다. 한대수의 노래 <행복의 나라로>가 행복하지 않은 유신 시절을 지내지만, 행복한 나라로 가고 싶은 염원을 담았던 것처럼 <아버지와 마리와 나>는 불행과 행복을 모두 안고 내일로 나아가자고 노래한다.

<한강블루스> 영화의 한 장면

▲ <한강블루스> 영화의 한 장면 ⓒ (주)큰손엔터테인먼트


대중의 외면을 받고는 있지만

<한강블루스>(2016)는 이무영 감독의 근작이다. 영화는 사랑했던 여자가 자살하자 죄책감에 시달리며 한강에 뛰어든 신부 명준(기태영 분)을 노숙자들인 알코올 중독자 장효(봉만대 분), 트랜스젠더 추자(김정팔 분), 뱃속의 아이를 품고 수녀가 되려는 마리아(김희정 분)가 구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다. 대안 가족의 서사는 전작들보다 더욱 짙어졌다.

이번에도 자살을 시도하는 신부, 아이를 실수로 죽인 의사, 임신한 10대 가출 소녀, 트랜스젠더 등 민감한 소재들과 정면으로 맞선다. "저는 불편한 진실을 숨기고 아무 생각 없이 잘 사는 게 더 불편한 인간입니다"라며 "내 옆에서 누군가 아프다고 계속 울고 있는데 '괜찮다'고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불편한 삶이죠"라고 이무영 감독은 고백한다.

<한강블루스>는 화면을 '흑백'으로 선택했다. 감독은 예산상의 문제와 예술적인 이미지를 이유로 꼽았다. 색이 사라진 무채색의 세계는 편견 없이 모두를 바라보려는 감독의 시선과 잘 어울린다.

이무영 감독은 2000년대 초반 야심차게 준비한 두 편의 영화가 연달아 실패한 후에 캄보디아로 단기 선교를 갔다가 그곳에서 남을 위해 헌신하는 선교사를 보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의 경험은 그를 성숙하게 하는, 영화에 종교적인 색채를 투영하는 계기로 작용한 느낌이다. <한강블루스>는 감독 이무영과 종교인 이무영이 함께 보내는 위로의 메시지다.

데뷔 이래 불편한 소재를 줄곧 다룬 문제적인 감독 이무영. 분명 주목할 만한 작품을 내놓았건만 그의 상상력은 대중으로부터 철저히 외면 받았다. 일부에서 컬트로 인정받는 정도다. 규격화를 앞세운 한국 영화계는 그를 변방으로 밀어냈다. 대한민국 사회는 돌출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휴머니스트><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아버지와 마리와 나><한강블루스>는 겁 없는 영화광에서 출발하여 어느새 사회를 근심하는 사람으로 변화한 성장의 기록이다. 더불어 고정 관념을 깨려는 분투기다. 이무영은 말한다. "나는 장르보다는 할 이야기가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다" 작가 이무영의 다섯 번째 영화와 만날 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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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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