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

영화 <박열>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 이 작품을 위해 그는 "철저하게 고증하려 노력했다"고 말할 정도로 작품은 극적 효과보단 오히려 담담한 서사구조가 특징이다. ⓒ 메가박스 플러스엠


한창 상영 중인 영화 <박열>은 이준익 감독에겐 꽤 오랜 숙제였다. 이리저리 날뛰는 모습만 보면 1920년대의 세상을 조롱하던 흔한 시정잡배 같지만,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최희서)와 동거 서약을 맺고 함께 아나키즘에 투신했다. 그 본질은 부당한 권력을 끌어내리고 조롱하는 것. 영화에는 일본 관동대지진과 조선인대학살사건을 몸소 겪고 저항한 20대 청년들의 활기와 함께 일본 제국주의의 허상이 잘 담겨있다.

일본 열도를 뒤흔든 이 아나키스트들의 근원은 이준익 감독이 제작한 <아나키스트>(2000)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상해를 무대로 한 아나키스트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성패와 별개로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이준익 감독이 마음에 품었던 한 인물이 바로 박열이었고, 이 인물이 영화로 빛을 보기까지 17년이 걸렸다. 이준익 감독과의 인터뷰의 시작은 그래서 <아나키스트>여야 했다.

박열에서 후미코를 읽다

- 이 유쾌한 아나키스트 박열의 뿌리를 감독님 영화에서 찾자면 <아나키스트>다. 
"<아나키스트> 때 대한민국의 근대성을 영화적으로 풀고 싶었다. 문학, 음악, 미술 등의 분야에서 한국은 근대성이란 개념을 스스로 풍부하게 활용한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내겐 중요했다. 일본을 통해 미술을 답습했고, 음악 역시 일본 엔가의 영향을 받았다. 영화는? 1960년대, 70년대 임권택 감독님 등이 독립군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홍콩영화 활극처럼 오락적 도구로만 쓰였지 일제강점기에 대한 (성찰의) 시선은 없었다. 시대를 보는 눈을 문학 등에서 다루고 재생산 한 적이 없다는 걸 20년 전에 자각하고 박찬욱, 조철현 작가랑 개발한 게 그 영화다.

근데 불행한 게 <아나키스트>의 무대는 상해였고, 이것 역시 활극과 오락 요소에 치중한 점이 있다. 시대를 읽는 힘이 모자랐던 거지. 그 작업을 하다 박열이란 인물, 수많은 이름 없는 존재들을 발견했지만 나 스스로 공부도 실력도 부족했다. 여러 영화를 찍고 일단 <동주>를 조심스럽게 시도했는데 크게 비난받지 않아서 '이젠 때가 됐다. 박열에 도전해보자!' 한 거다. 근데 이 영화는 박열이나 가네코 후미코를 집중 조명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두 인물을 수단으로 그 시대가 갖고 있는 의미를 미력하게나마 담아보자는 거다.

두 시간짜리 영화에 한 시대를 소상하게 담는 건 과욕이다. 하지만 그 통로까지 다가가게 할 수는 있다. 당시 일본이 서양의 제국주의를 흉내 내는 과정에서 관동대학살이 있었고, 그걸 그들이 근대라고 믿던 사법체계가 정당화시켰다. 박열과 후미코의 여정을 통해 그 근대성이 결국 권력의 지속을 위한 작태였음을 보이려 한 거다. 그러면 지난 70년 간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던 우리의 사고 틀도 좀 확장되지 않을까 생각한 거지."

 영화 <박열> 관련 사진.

영화 <박열> 속 불령사 단원들의 모습. 조선인을 조롱하기 위해 만든 이 이름을 박열 등의 단원 등은 오히려 자신의 단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했다. ⓒ 메가박스플러스엠


이준익 감독이 말한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우리 사고의 틀이란 바로 억압과 학대로 인해 키워진 분노의 시선이었다. 통상 일본하면 고개를 드는 적대감. 이준익 감독은 그 지점에서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후 질문에서 보다 상세히 그가 설명했다.

- 전작 <동주>도 그렇고 사실 제목은 '동주'지만 그 안에서 몽규를 읽었고, <박열>에서도 가네코 후미코를 읽었다. 
"바로 그거다! 후미코가 일본여성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일본여성과 한국남성이 동거서약을 하고 그걸 지켜내는 과정에서 한 사람은 죽고, 다른 이는 22년 간 옥살이를 한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분노의 정서를 그간 여러 작품에서 상업적으로 생산했다면 <박열>에선 탈민족을 근간으로 행동했다는 게 다르다. 일본을 민족 저항의 대상으로 보는 걸 넘어서 모든 인간의 삶을 짓누르는 거대 권력의 부도덕성을 소위 아나키즘이라는 이념으로 저항하고, 그 신념을 위해 목숨 걸고 게임한 거지.

이 게임 안엔 화려한 볼거리는 없다. 또 두 사람이 이룬 성과는 일반적 관점에서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둘이 가진 사상과 공적으로 증명한 결과는 어떤 폭탄보다 강하고 확산성이 있었다. 놀라운 건 이게 90년 간 묻혀있다시피 한 이야기였다는 사실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어떤 한 존재가 시대와 불화를 고백했을 때 그 가치관이 내가 현재에서 하는 고백과 닮아 있나, 다른가? 이걸 자각하면 사회관과 세계관이 잡힌다. 젊은 나이에 일관된 선택과 행동을 한 그 젊은이들을 내가 먼저 영화로 보고 싶었다! (웃음) 근데 이걸 대중적으로 요령 피워 메시지를 강조하고 싶지 않았다. 그 시대의 청년과 지금 시대를 사는 나와의 상관성을 찾는 게 중요했지."

- 그 후미코가 영화 속 여성 캐릭터로 소모된 게 아니라 하나의 사람처럼 다가온다.
"그렇지. 사건을 확대하거나 왜곡한 게 없다. 사건으로 발생하는 개인 개인의 사연을 깊이 전달하려 한 거다. 후미코는 이 영화가 시작되기 전 성장기의 사연이 있는데 그건 그의 자서전에 담겨있다. 그 사연이 영화 안에서 계속 누군가에 의해 하나씩 밝혀진다. 그래서 영화적 캐릭터가 아닌 한 인간으로 보였을 것이다. 영화적 기능을 위해 쓴 게 아니니까. 한 인간이 세상과 불화하면서 삶과 죽음을 택하고 행동하기 위해선 세상의 진실이란 게 그 인간 안에 강하게 각인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선택과 행동을 못한다. 후미코의 대사가 있잖나. '산다는 건 그저 움직이는 걸 뜻하지 않는다' 그의 자서전에 그대로 있는 걸 대사로 쓴 거다."

 영화 <박열>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

ⓒ 메가박스 플러스엠


한 차원 높은 혁명

- 권력에 저항하는 그 청년들의 방식이 흥미롭다. 단순히 비장하게 저항하는 게 아니라 권력을 조롱하고 가지고 논다. 
"조롱은 어떤 권력에 대항하는 지혜로운 방식 중 하나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리어왕에 등장하는 광대 있잖나. 왕과 권력자를 한 인간으로 격하시킨 뒤 조롱한다. 박열과 후미코의 세계관 역시 인간이라면 인간 본연의 모습에 충실하라는 거다. 본 모습에 충실한 뒤 권력을 수행하면 그 권력을 미워할 이유가 없지. 조롱할 이유도 없고. 근데 관동대지진 폭동의 원인을 자기들이 아닌 외부로 탓하려 하잖나. 그 습성을 두 사람이 조롱한 거다. 임진왜란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춘추전국시대 전쟁의 기운을 외부로 표출하게 하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각이었지.

보통 역사라는 게 기득권 권력자의 전쟁사와 정치사로 기술한다. 민중사라는 건 그 시대를 같이 겪어내며 그 권력의 부당성을 주장했던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따라간다. 조선 후기도 마찬가지인 게 고종이니 대원군이니 하지만 프랑스혁명 못지않은 동학혁명이 치고 올라왔는데 제대로 못 담아냈다. 프랑스는 어쨌든 왕의 목을 쳤고, 시민정신이 그때 생겼는데 동학혁명은 고종이 일본군 불러서 변화를 외치던 민중들을 총칼로 다 죽였잖나. 민중혁명이 그래서 역사에 덮여 버린 거지. 신유박해 등의 당시 사건을 두고 정사에선 탄압이라고들 하는데 그렇게 말고 민중의 저항으로 보자는 거다."

- 그 관점에서 일제강점기를 바라보자는 것인가.
"그렇지. 여전히 우린 식민지시대에 대한 프레임을 한일관계, 즉 국가적 프레임에 가두고 분노와 증오를 반복한다. 그걸 깰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영화적 소재가 박열과 후미코라고 생각했다. 물론 윤봉길, 이봉창 등 많지만 후미코가 일본인이라는 게 큰 차이다. 일본인임에도 천황제를 부정한 이유가 뭘까. 당시 일본에선 아나키스트 운동이 엄청 치열했다. 정작 지금의 일본은 아베 정권이 굳건하고 50년 가까이 자민당이 집권하고 있지만 말이다. 일본은 지금 자기 프레임에 갇혀 있다. 일본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인 후쿠자와 유키치 얼굴이 만 엔짜리에 있지? 자민당 정권이 그 이념을 잇고 있다는 뜻이다. 그 반대 지점에 있는 인물이 영화에 나온다. 대역 죄인으로 사형 당한다는 대사로 말이다."

 영화 <박열> 관련 사진.

<박열> 속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는 단순히 박열을 돕는 보조적 인물에 그치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일본 사회의 제국주의 권력을 부정한다. ⓒ 메가박스플러스엠


- 하지만 아나키스트는 결국 실패한 혁명이라고들 하잖나. 여기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웃음) 아나키스트 운동은 실패를 전제하고 하는 운동이다. 아나키즘이 권력을 부정하고 저항하지만 권력을 잡는 게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나키즘 안에 테러리즘이 있지? 테러로 권력 잡는 이들이 코뮤니스트다. 노동자 계급을 권력화 한 거지. 근데 그게 이미 20세기에 실패로 끝나지 않았나. 코뮤니스트들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나키스트다. 대한민국은 이걸 자생적으로 경험하지 않아 일본은 무조건 배척의 대상이라는 프레임에 갇힌 거다.

이걸 페미니즘에 빗대면 이해가 쉽다! 페미니즘이 남성 권력에 저항하는 운동인데 동시에 여성이 권력을 잡자는 건가? 아니다. 남성의 부당한 권력을 저항하는 거지 남성 권력을 밀고 여성이 잡자는 게 아니다. 아나키즘이 페미니즘에 스며든 게 아닐까 생각한다. 또 하나! 동물애호가들이 학대 저항 운동하잖나. 인간을 몰아내고 동물이 권력을 잡자는 건가? 아니잖나. (웃음) 결국 아나키즘은 실패한 운동으로 보는 전제 자체가 잘못된 거다.

박열과 후미코는 자신들이 권력을 잡겠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우린 너희들의 부당함을 고발하니 인정하라는 거지. 그들(일본 제국주의)을 이겨서 권력을 잡겠다고 누가 그랬나. 마치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을 모두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들로 보는 것과 같다. 이 이분법에 우리가 갇혀있는 거지. 지난 촛불집회 나온 사람들이 그럼 권력 잡으러 나온 사람들인가!?(웃음)"

- <박열> 리뷰에도 썼지만 이미 우린 현대 권력을 합법적 틀에서 유쾌하게 뒤집는 경험을 했다. <동주>와 <박열>에도 그런 민중에 대한 믿음과 희망의 정서가 깔려 있어 보인다.
"그 희망을 놓지 말자는 뜻으로 영화 대사에 정확히 써 놨다. 박열이 인력거를 끌며 그러잖나. '일본 권력에 반감이 있지만 민중에겐 오히려 친밀감이 들지!'라고. 영화에 등장하는 다수 일본인은 권력자가 아니다. 후세 변호사, 소설가 등이 일본이 양심을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말한다. 교도소에 갇힌 박열을 면회하는 사람이 유명한 소설간데 박열의 영향으로 광산 투쟁을 했다고. 자서전에 다 나온다. 심지어 그 책들은 일본 사람이 쓴 거다.

<박열> 처음에 실제 이야기임을 강조하고 고증을 중시한 이유가 바로 이 영화의 대상이 한국뿐 아니라 일본이기 때문이다. 한국 관객이 박열을 아는 숫자보다 일본 관객이 후미코를 아는 수가 더 많다. 우린 박열을 잘 모르거든. 일본은 적어도 다는 몰라도 한국보단 많이 안다. 인구도 일단 우리보단 많으니까. 근데 이 영화가 날조, 왜곡 논란에 휩싸이면? 심지어 한국 감독이 만든 건데 그런 논란이 생기면 진정성에 상처받잖나. 그래서 모두가 실존인물이라고 자막에 넣은 거다."

열변을 토하던 이준익 감독에게 그 다음 염두에 둔 인물이 있는지 물었다. 알려진 대로 그의 차기작은 힙합 래퍼를 주인공으로 한 <변산>이다. 이 또한 신선한 변화다. "하고 싶은 인물은 많은데 당분간은 역사 인물에선 멀어지려 한다. 좀 쉬고 싶다"고 그가 웃으며 덧붙였다.

 영화 <박열>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

영화 <박열>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 ⓒ 메가박스 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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