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악녀>는 참으로 액션 영화다운 액션 영화이다.

영화 <악녀>는 참으로 액션 영화다운 액션 영화이다. ⓒ NEW


액션 영화다운 액션 영화를 본 게 언제인가.

상업영화의 전성시대라고 말들 하지만 상업영화의 선봉처럼 여겨온 정통 장르 영화는 도리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정형화된 장르적 문법으로 러닝타임 전체를 밀어붙이는 영화는 좀처럼 관객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액션과 멜로, 공포와 스릴러, 그밖에 상상할 수 있는 장르 영화 대다수가 위기를 겪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액션 영화가 처한 현실은 다른 장르보다 조금쯤 더 위태로운 듯하다.

이소룡과 성룡, 이연걸의 계보를 잇는 액션 배우는 등장하지 않았다. 아널드 슈워제네거와 실베스터 스탤론의 라이벌 구도도 끝나버린 지 오래다. 스티븐 시걸이나 장 클로드 반담, 커트 러셀과 같은 B급 분위기의 액션 스타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 오늘, 액션은 대형 블록버스터를 떠받치는 한 요소로 편입되어 버린 듯도 하다.

그러나 이같은 추세에 반기를 드는 영화인들이 있다. 몰락한 나라를 되살리려는 후백제, 후고구려인들의 기상이 이러했을까. 지난시대 액션 영화를 보며 자란 액션키드가 곳곳에서 정통 액션 영화를 제작해 관객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 지난 8일 개봉해 <원더우먼>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미이라> <트랜스포머: 최후의 전사> 등 초대형 블록버스터 사이에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는 <악녀>도 그와 같은 영화다.

한국 액션키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맞장뜨다

악녀 주인공 숙희를 연기한 김옥빈. 그녀는 이 영화에서 한국 여배우 가운데 액션신을 비교적 능숙하게 소화하는 것으로 알려진 하지원, 전지현을 능가하는 연기를 선보였다.

▲ 악녀 주인공 숙희를 연기한 김옥빈. 그녀는 이 영화에서 한국 여배우 가운데 액션신을 비교적 능숙하게 소화하는 것으로 알려진 하지원, 전지현을 능가하는 연기를 선보였다. ⓒ NEW


<악녀>의 감독 정병길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액션키드다. 2004년 서울 액션 스쿨 수료작인 <칼날 위에 서다>로 데뷔했고 2008년 서울 액션 스쿨 8기 멤버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우린 액션배우다>를 발표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정통 액션 영화 연출자의 기근 속에서 액션 팬들이 정병길 감독에게 큰 기대를 하는 이유다.

<악녀>는 한국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여성 원톱 액션 영화다. 중국교포 암살단의 여성 킬러가 경찰에 붙잡혀 정보기관 요원으로 다시 양성된다는 설정으로 뤼크 베송의 역작 <니키타>를 그대로 본떴다.

<니키타>는 여성 원톱 액션 영화의 상징적 작품이다. 작품성과 흥행성을 두루 인정받아 할리우드에서 브리짓 폰다 주연의 <니나>로 리메이크됐고 시얼샤 로넌 주연의 <한나>나 스칼릿 조핸슨 주연의 <루시> 같은 영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액션 연출과 분위기, 극적 전개가 높은 수준에서 조화를 이뤘고 이전까지 보인 적 없던 여자배우의 액션도 수준급으로 평가받았다.

<악녀>는 노골적으로 <니키타>의 이야기를 베껴왔으나 승부수는 전혀 다른 쪽에서 던졌다. 액션 영화가 가장 추구해야 할 것, 바로 액션이다. 영화는 1인칭 액션 게임을 연상시키는 파격적 오프닝에서 시작해 수많은 영화가 따라 했으나 근처에도 다가서지 못한 <올드보이>의 복도 신을 성공적으로 변주한다.

공중에서 총을 맞고 떨어지는 1인칭 시점이나 일본도를 휘두르며 바이크를 모는 추격신, 달리는 차 보닛 위에 올라타 핸들을 돌리는 장면은 이제껏 한국영화에서 보았던 어떤 액션과도 견줄 만큼 완성도가 높다. 액션 하나하나가 도전이고 실험이며 그 가운데 몇몇 부분에선 기억해 마땅한 성취를 이룩한 듯 보인다.

순수한 창작보다 창조적 변형

 유사한 설정이 많음에도 신선한 장면이 유독 많게 느껴지는 건 참신한 촬영기법에 빚지고 있는 부분이 크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건물 아래로 몸을 던지는 숙희(김옥빈 분)와 그를 내려 찍는 촬영기사.

유사한 설정이 많음에도 신선한 장면이 유독 많게 느껴지는 건 참신한 촬영기법에 빚지고 있는 부분이 크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건물 아래로 몸을 던지는 숙희(김옥빈 분)와 그를 내려 찍는 촬영기사. ⓒ NEW


물론 모두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존 액션 영화의 문법에 빚지고 있다는 인상이 크다. 1인칭 액션은 <킬 빌>을 비롯해 많은 영화에서 쓰였고 침대 밑에서 가족의 죽음을 목격한 소녀의 설정 역시도 그렇다. 숙희(김옥빈 분)가 훈련기관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장면에서 마주하게 되는 낯선 장면은 <설국열차>의 그것과 몹시 흡사하지 않은가. 러시안룰렛을 하는 소녀라거나 건설현장에서의 총격전,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장총으로 건물 너머를 저격하는 모습에선 다른 액션 영화들의 냄새가 진동한다. 언급하지 않은 다른 장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의 성취는 순수한 창작보다는 창조적 변형에 있다. 유사한 설정임에도 촬영기법과 동선을 달리해서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액션 배우로 분류되지 않았던 김옥빈을 주연으로 삼아 할리우드 액션 배우와도 견줄 수 있는 수준급 액션을 선보인 건 놀라운 성취이기도 하다. 촬영과 연기, 그 모두를 끌어낸 연출의 측면에서 영화는 2017년 한국 액션 영화가 나아갈 수 있는 가장 먼 지점까지 도달한 듯 보인다.

그래서일까. 영화에 쏟아지는 비판 대다수는 액션이 아닌 이야기를 향하고 있다. 반전은 충격적이라기보단 당혹스럽고 인물 사이의 감정선은 뚝뚝 끊긴다. 감춰진 사연은 분위기만 거창하고 사건과 사건 사이엔 개연성이 없다. 초반은 여성판 <올드보이>처럼 보이고 중반까지는 <다이버전트>나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실미도> 등을 떠올리게 하는데 적어도 서사의 측면에서 이들 영화의 성취를 능가할 요소는 찾아볼 수 없다.

거친 남성들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도 그녀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사랑과 아이만 놓아두고 있으니 그 안이함이 개탄스럽다.

오직 액션, 그뿐

 바이크를 타고 질주하며 칼싸움을 벌이는 숙희(김옥빈 분)와 악당들. 한국영화에선 만나기 쉽지 않은 고난이도 촬영이 이뤄졌다.

바이크를 타고 질주하며 칼싸움을 벌이는 숙희(김옥빈 분)와 악당들. 한국영화에선 만나기 쉽지 않은 고난이도 촬영이 이뤄졌다. ⓒ NEW


여섯 살 아이를 지키겠다고 갱단을 상대로 권총을 빼 들고 난사하는 여주인공, 팜 파탈 캐릭터가 만연했던 1980년대 할리우드를 가로지른 존 카사베츠의 <글로리아>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악녀>의 이야기는 37년 늦게 온 구태처럼 느껴지기 쉽다. 글로리아가 아이를 지킨 이유는 모성애나 사랑과 같은 것이 아니라 불의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는데 어째서 <악녀>의 숙희는 사랑과 모성애 때문에 그 모든 위험을 무릅썼는가 하는 것이다.

<악녀>는 그런 영화다. 오직 액션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감안할 수 있다면 이만한 영화는 찾기 어렵다. 액션을 먼저 구상하고 이야기를 나중에 짜 맞춘 것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은 이 영화가 이야기와 액션 가운데 무엇을 우선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사실 우린 액션 하나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수많은 영화를 알고 있다. 이소룡과 성룡, 이연걸의 영화가 그렇고 장 클로드 반담과 스티븐 시걸의 영화가 그랬다. 이야기를 극복한 액션 영화의 전성시대는 완전히 끝난 게 아닐지 모른다.

액션이 장르로 바로 서지 못하고 블록버스터에 달린 부품쯤으로 여겨지는 요즘, 액션 하나만을 가지고 대형 블록버스터와 맞장 뜨는 <악녀>를 응원하고 싶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차려입고 창 밖으로 장총을 겨눈 숙희(김옥빈 분). <니키타> <킬빌> <암살>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차려입고 창 밖으로 장총을 겨눈 숙희(김옥빈 분). <니키타> <킬빌> <암살>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 NEW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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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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