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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 틱장애 완화에 좋다고 하여 아이와 자주 자전거를 타러 다녔다
 운동이 틱장애 완화에 좋다고 하여 아이와 자주 자전거를 타러 다녔다
ⓒ 하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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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첫째 아이는 서울에서의 초등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왜소하고 약한 탓에 2년 내 짓궂은 아이들의 먹잇감이 되었지요. 담임선생님에게 문의했지만, 매번 흐지부지되고,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오히려 피해자인 우리 아이가 반성문을 쓰는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극도의 스트레스 끝에 결국 2학년 가을에 음성 틱증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간헐적인 고음을 내길래 '그냥 장난으로 내는 소리인가?'하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겨울방학 어느 날 갑자기 흥분된 표정으로 쉬지 않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더군요. 돌고래 소리 같기도 하고, 강아지 소리 같기도 한 고성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계속 질러대는 통에 온 가족이 고생했지요. 그러다 며칠 후 증세가 완화되었습니다.

3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어 새 담임선생님에게 아이의 상태를 알려드리고 저는 저대로 치료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저희 아이 때문에 수업을 진행할 수가 없다고... 결국 학교를 쉬게 되었습니다.

서울대학교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볼까 해서 알아보았는데 예약이 꽉 차 있어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지인의 소개로 일단 아동 심리센터에 데려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집 근처에 텃밭을 분양받아서 아이와 함께 가꾸기도 하고 자전거, 배드민턴 등 운동도 하고 산에도 다니고...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조금씩 상태가 호전되어 몇 달 후부터는 학교에 조금씩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아이는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암진단을 받다

그러다 보니 저에게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학교를 쉬게 된 후로 아이를 24시간 돌봐야 했는데 일단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스트레스였습니다. 자는 시간 외에는 계속해서 질러대는 고성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으니 늘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흥분된 표정으로 이상한 소리를 질러대는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던 극장도 갈 수 없고, 외식은 꿈도 못 꾸고 심지어 미장원에도 갈 수 없어 집에서 머리를 잘라 주었습니다.

유일하게 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은 아이가 잠들었을 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쉽게 잠들지도 못했습니다. 동생은 9시면 잠이 드는데 이 아이는 그 후로도 한두 시간을 더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습니다. 아이가 잠들 때까지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괜찮아. 잘 될 거야. 우리 같이 힘내자" 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쉽니다.

그러면 아이가 대번에 눈치를 채고 스스로 소리를 참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신경을 쓰면 소리가 더 심해지지요. 겨우겨우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이렇게 평화로운데... 내가 끔찍한 악몽을 꾸었던 건 아닐까?' 하고 부질없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지만, 사실은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운 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잘 될 거야. 지나갈 거야'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려고 애를 쓰다가도 아이가 지르는 소리를 계속 듣고 있으면 울컥울컥 통제하기 힘든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나한테 이러나', '다른 애들은 다 잘 지내는데 대체 너만 왜 이러니' 하며 아이를 원망하기도 하고, '그 잘난 일 하느라 아이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애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구나' 하고 펑펑 울며 자책도 했습니다. 아이를 괴롭혔다는 친구 녀석들과 그 상황을 방치한 선생님에 대한 분노,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 이 아이가 과연 앞으로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하루하루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버티는 날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버려졌다는 생각까지 들면서 심신이 급격히 황폐해져 갔습니다. 이 생활을 6개월 정도 하고 난 후 결국 8월에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들을 계기로 저희 가족은 경기도 가평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시골학교와의 첫 만남

작년 운동회에서 아이가 친구들과 우산만들기 체험을 하고 있다. 옆에 있는 친구도 서울에서 전학왔다.
 작년 운동회에서 아이가 친구들과 우산만들기 체험을 하고 있다. 옆에 있는 친구도 서울에서 전학왔다.
ⓒ 하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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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할 동네를 정하고 나서 마을 어귀에 있는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전교생 60여 명의 아담하고 이쁜 시골학교.

마침 개학을 앞두고 선생님들이 학교에 나와 계셨습니다. 교무실에 옹기종기 모여 도시락을 드시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정겹더군요.

교과과정, 학교생활, 통학버스 등에 관해 상담을 받는데 내심 놀랐습니다. 저는 '아이가 마음 편하게 다닐 수 있는 소박한 분위기이면 만족이다'라는 생각 정도만 갖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분위기에 더해서 말이 시골학교지 예전에 다니던 학교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의 교육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인 1악기, 도예, 뮤지컬, 거의 무료수준의 방과 후 수업, 집 앞까지 오가는 통학버스 등...

선생님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나오는 데 온 가족이 기분이 좋아 계속 웃었습니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학교가 마음에 든다고 합니다. 동생도 같이 다닐 수 있는 병설유치원이 있으니 더 좋을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도시에서 힘들었던 아이들도 잘 지내게 돼요"

개학 첫날 아이를 등교시키러 갔습니다. 4학년은 저희 아이까지 모두 14명. 담임선생님을 만나 뵙고 아이의 상태를 말씀드렸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학교가 편한 분위기라 도시에서 힘들었던 아이들도 잘 지내게 돼요. 작년에 전교회장 된 아이도 도시에서는 말도 잘 안 했다던데 여기 와서 성격이 바뀌고 밝아졌어요."

따뜻한 담임선생님의 말씀. 그 순간 제가 느꼈던 안도감과 위로감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OO초등학교에는 도시에서 전학 온 아이들이 참 많습니다.

담임선생님은 한 학기 내내 아이에게 신경을 써주셨고 때때로 전화로 상황체크를 해주셨습니다. 오가며 학교 주변을 지날 때 운동장을 흘깃 보면 친구들과 뛰어놀고 있는 아이가 보였습니다. 새로운 모습이었습니다.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 담임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처음에 왔을 때는 의자에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했었는데 지금은 수업시간에 집중도가 굉장히 높아졌어요. 최근 한 달간은 거의 소리도 안 냈고요. 교과성취수준이 굉장히 향상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머 감각이 좋아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아요."

들으면서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날이 오다니...

아이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매사에 예민해서 폭발하던 성격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능글능글 농담도 잘하고 늘 웃고 다닙니다. 학교의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배려심이 생겨 이웃 동생들도 잘 돌봐주지요. 집안 어른들이나 지인들이 가끔씩 보고는 많이들 놀라고 기뻐합니다. "어쩜 저렇게 변했냐. 놀랍다"고 말이죠.

아이가 살아나니 나도 살아났다

교정이 꽃과 나무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있다
 교정이 꽃과 나무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있다
ⓒ 하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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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아프면서 느꼈던 가장 큰 고통은 사회로부터 외면당했다는 소외감이었습니다. 이 상처를 시골의 작은 학교가 보듬고 어루만져서 치유해 주었습니다. 선생님들의 세심한 보살핌 아래 아이들은 밝고 착하고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안심하고 학교에 보내니 제 생활에도 여유가 생겨 건강을 돌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골로 오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 번씩 생각해봅니다. 아마 저희 아이는 여전히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병은 더 위중해졌을 가능성이 높았겠지요. 저는 아이들에게 한 번씩 말합니다.

"나도 너희 학교 다니고 싶다!"

(이전 기사 :  "한번도 안 웃던 아이가 전학 와서 처음 웃었어요")

덧붙이는 글 | 첫째아이 초등 2학년에 음성틱장애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저는 유방암 수술을 받았지요.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경기도 가평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마을에 있는 시골학교로 전학을 했구요. 1년이 조금 지난 지금 아이는 놀랍게 변했고 저도 건강해졌습니다. 이 신기하고 행복한 경험을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어 시골학교 일기를 연재해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태그:#틱장애, #시골학교, #작은 학교, #혁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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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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