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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페스티벌 현장1
 비건페스티벌 현장1
ⓒ 서울혁신센터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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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를 와삭 깨물었다. 버섯 향이 입안을 감싼다. 토마토, 당근 피클 등 채소는 신선하고 아삭하다. 식감을 자극한다. 물론 햄버거의 핵심은 패티. 가령 아메리칸 버거의 중요한 조건은 이것이다. 신선한 소고기를 잘 갈고 중불로 잘 구워 육즙 가득한 패티를 만드는가. 소금과 후추가 소고기 본연의 맛을 거드는가. 그러나 내가 먹은 햄버거의 패티 재료는 소고기가 아니다. 부추, 버섯, 들깨, 현미 등으로 만든 모듬버섯패티다. 이 패티는 담백했다. 동물성 패티에 길들여졌지만, 처음 맛본 다른 패티 또한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 말을 고쳐야겠다. 내가 먹은 것은 '햄'버거가 아니라 '베지'버거다. 고기 0%, 밀가루 0%, 트랜스지방 0%의 버거.

베지버거를 먹은 5월 21일, 불광역에는 오전부터 낯선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아, 그날이구나.' 서울혁신파크(아래 혁신파크)에 가장 많은 외국인이 찾아오는 날. 비건 페스티벌이다!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이 복작복작. 남다르고 세련된 패션 센스를 선보이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온다. 모르고 왔다면 '힙스터'들의 모임이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제3회 비건 페스티벌(VEGAN FESTIVAL)'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봄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맞다. 이날 내가 먹은 것은, 일상에서 흔히 접하기 어려운 채식 버거(베지버거)였다.

비건페스티벌 현장사진3_베지버거
 비건페스티벌 현장사진3_베지버거
ⓒ 서울혁신센터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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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지버거는 새로운 트렌드다. 지난해 서울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킨 버거가 '쉑쉑(셰이크쉑) 버거'였다면, 뉴욕에서 가장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는 버거는 순식물성 버거인 '임파서블 버거'였다. 고기 한 점 없음에도 패티 맛은 잘 만든 소고기 패티에 필적한다. 소고기 맛에 까다로운 육식주의자들로부터도 '엄지 척'을 받았다. 밀단백질, 감자단백질, 코코넛기름 등 100% 식물성 원료를 사용해 풍미, 식감, 맛은 소고기 패티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란다. '육즙'도 재현함으로써 이른바 '피 흘리는 채식 버거' 혹은 '음식계의 테슬라(전기자동차 브랜드)'라고 불릴 정도다.

이 버거는 한국계 셰프 데이비드 장(한국이름 장석호)과 푸드 스타트업 '임파서블 푸즈'가 협업해 만들었다. 일반 소고기 햄버거와 맛은 같으면서도 토지는 95%, 물은 74%, 온실가스도 87%나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통계가 있다. 콜레스테롤도 거의 없다. 햄버거는 건강과 환경에 나쁜 음식이라는 개념을 뒤집는 혁신 제품. 이 버거의 약진 등에 힘입어 푸드컨설팅그룹 '민텔'은 2017년 푸드 트렌드로 '비건과 채식주의자의 확대'를 꼽았다.

이것은 중요한 함의가 있다. 햄버거라는 최종 산물의 맛(품질)뿐 아니라 이를 만드는 데 필요한 동물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물이나 토지가 얼마나 소비되는지, 온실가스 등이 얼마나 발생하는지 등을 고려하는 시대가 됐다. 기술혁신뿐 아니라 사회혁신까지 고려한 결과물이다.

비건페스티벌 현장2
 비건페스티벌 현장2
ⓒ 서울혁신센터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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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없어도 맛있다!

서울혁신센터, 비건 페스티벌 코리아, 비건타이거가 함께 연 비건 페스티벌(아래 페스티벌)은 이번이 세 번째다. 지난해 두 차례 열렸으며 다양한 체험을 통한 비건 네트워크 조성을 주도하는 등 국내 비건 문화의 확산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이번 3회째는 '비건 블로썸(Blossom)'이라는 슬로건으로 꽃이 만개하는 봄과 같이 환경과 동물을 존중하는 비건 문화의 확산을 주제로 열렸다. 이에 인디 뮤지션들의 버스킹 공연과 요가 등 다양한 문화 행사와 체험부스, 프리마켓 등이 파크 곳곳에서 시민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행사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이곳을 찾았다. 대전에 사는 4살 최재혁 군의 가족도 행사가 열리기만 기다리면서 페스티벌을 방문했다. 재혁군의 어머니는 "아이가 셀리악(celiac disease, 불용성 단백질을 처리하는 효소가 없어서 생기는 질환)을 앓고 있어서 먹는 것이 한정적"이라며 "1년을 벼르고 벌려서 왔는데 먹을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아서 아이도 즐거워하고 우리도 페스티벌을 즐기고 있다. 페스티벌에 다시 찾고 싶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함께 올라온 앨리스와 카인드그린, 그리고 그들의 반려견 진아
▲ 비건페스티벌 현장5 부산에서 함께 올라온 앨리스와 카인드그린, 그리고 그들의 반려견 진아
ⓒ 서울혁신센터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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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함께 올라온 앨리스와 카인드그린도 1년을 기다려 새벽부터 KTX를 타고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9년 전 유기견에서 입양된 '진아'도 함께였다.

"비건으로 살아온 지 11년째인데 부산에는 채식을 할 만한 곳이 거의 없어서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부산에서는 만날 수 없는 제품이나 음식도 많고 무엇보다 분위기가 참 좋다. 우리 진아도 9년 전 입양돼 채식 사료만 먹는 비건이다(웃음)."

페스티벌은 기다림이자 하나의 해방구다. 또한 많은 비건들이 평소 취향과 다양성에 대한 사회적 존중을 받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채식은 단순히 음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다양한 함의를 품은 삶의 양식이다. 식생활 다양성을 위해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다. 그러나 한국에서 채식주의자로 산다는 건 힘들다. 대부분 식당은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를 별도로 준비해놓지 않는다. 회식하면 으레 '고기'를 떠올린다. 한국 사회가 다양성보다 획일성을 지닌 사회에 가깝다 보니 주변에 '채식한다'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할까 봐 혹은 '유난을 떤다'고 타박을 들을까 봐 그렇다.
   
물론 채식이라고 다 똑같지 않다. 단계가 있다. 자연적으로 땅에 떨어진 열매만 먹는 프루테리언(fruitarian)이 가장 순결한 채식주의라면 동물성 아닌 채소와 과일만 먹는 비건(vegan)은 적극적 채식주의의 일환이다. 유제품과 동물의 알은 먹는 락토-오보 베지테리언(lacto-ovo vegetarian)은 전통적인 채식주의자다. 이상하다 싶겠지만 고기를 먹는 채식주의자도 있는데 섭취하는 고기 종류에 따라 또 단계가 나뉜다. 유제품과 알, 생선(어류)을 먹는 페스코(pesco), 더 나아가 닭고기와 같은 흰 살 고기까지는 먹는 폴로(pollo), 평소에는 채식을 하지만 상황에 따라 간혹 육식을 곁들이는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 등이 있다.
   
페스티벌의 푸드 존은 그야말로 바글바글. 비건을 위한 다양한 먹거리 잔치에 비건인들의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고기는 무조건 옳다"고 말하는 육식주의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말이겠지만 이날 푸드 존에서 가장 흔히 들린 말은 "고기 없어도 맛있네", "고기랑 똑같아"였다.

지난해 손님으로 왔다가 페스티벌에 매료돼 이번에는 판매자로 참여한 '기욤 베이커리'의 기욤은 청담동 등에서 프랑스 정통 빵집을 운영 중인 프랑스인이자 채식주의자다. 10년 전 한국에 온 그는 "올해는 꼭 부스로 참여해 비건인들을 위한 정통 프랑스 빵을 선보이고 싶었다"며 "사람이 무척 많아서 기분이 무척 좋다. 비건이 아니어도 궁금해하고 올 만한 행사인 것 같다"고 평했다.

다양한 비건 먹거리를 맛보기 위해 줄 선 사람들
▲ 비건페스티벌 현장13 다양한 비건 먹거리를 맛보기 위해 줄 선 사람들
ⓒ 서울혁신센터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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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 어떤 삶의 태도

이날 프리마켓으로 운영된 '비건 장터'는 생활용품 분야에서 동물 보호와 윤리적 소비의 가치를 공유했다. 비건은 먹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건 아니다. 채식주의자가 많은 유럽에선 미용실에서도 동물성 첨가제가 없는 염색약과 파마약을 쓴다. 비건은 각종 생활용품에 첨가되는 동물 유래 성분과 실험에 반대한다.

<이기적 섹스>의 저자이자 채식주의자 은하선씨는 '은하선 토이즈'라는 부스로 이날 함께 했다. 페스티벌에 세 번째 참여하고 있는 은씨는 "동물실험을 하지 않고 건강한 원료로 만든 비건 콘돔과 비건 이브젤을 들고 왔는데 콘돔은 직접 몸에 닿기 때문에 화학성분을 최소화한 콘돔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며 "날씨도 좋고 매일 페스티벌을 하면 좋겠다"고 웃었다.

<이기적섹스>의 저자 은하선씨
▲ 비건페스티벌 현장8 <이기적섹스>의 저자 은하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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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은 삼베'의 박자야, 김기선 부부는 삼베 수세미를 비롯해 헴프(마)로 만든 제품을 선보였다. 남편은 목공, 부인은 자수를 놓는 역할을 맡는데, <자연을 담은 소박한 밥상>의 저술에도 참여한 박씨는 "페스티벌에 계속 오고 있는데 페스티벌에 놀러 오는 겸 홍보도 하면서 즐기고 있다"고 전했다.

페스티벌은 단지 사람만을 위한 행사가 아니다. 비인간 동물에 대한 존중이 기저에 있다. "동물이 행복한 세상에서 인간도 행복합니다"라는 슬로건은 비건의 라이프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이날 반려견 아로마인식표, 캘리그라피 엽서 등을 선보인 입주단체 감성붓다의 유한준 대표는 페스티벌마다 함께하고 있다.

"유일하게 참여하는 프리마켓 행사가 비건 페스티벌이다. 다른 프리마켓이 판매에 중점을 둔다면 이곳은 동물을 좋아하고 느낌을 나누고 교감할 수 있어서 힐링을 받는다. 무척 좋다."

<감성붓다>의 유한준씨
▲ 비건페스티벌 현장10 <감성붓다>의 유한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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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차별과 비인간 동물 차별에 반대하는 모임인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도 부스를 차렸다. 이들은 첫 실천 방안으로 '소젖 섭취 끊기'를 제안했다. 인간은 소를 강제로 배란시키고 임신시키며 출산한 소를 송아지와 강제 분리한 뒤 착유기를 이용해 피고름이 나올 정도로 젖을 짜낸다.

또 남성권력은 여성이 임신·출산을 결정할 권리를 빼앗고 싼값에 인구수를 유지하고자 임신 중단은 범죄로, 임신을 중단한 여성은 범죄자로 낙인찍는다. 이처럼 소젖 섭취와 낙태죄는 재생산이 가능한 몸을 착취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비건 페스티벌, 혁신파크에서 쑥쑥 자란다

다시 말하지만, 비건 페스티벌은 단순히 건강을 고려해 채식을 주장하는 행사가 아니다. 비건은 소수자·약자 차별을 반대하는 삶의 태도이자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라이프스타일이다. 이탈리아에서 한국에 온 카르멘과 다비드는 "우리는 비건은 아닌 플렉시테리언"이라고 전제한 뒤 "음식문화에 대한 의식, 푸드 비즈니스, 채식 라이프스타일" 등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요즘 유럽에서는 유기농, 비거니즘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라고 전했다.

이탈리에서 온 카르멘과 다비드
▲ 비건페스티벌 현장12 이탈리에서 온 카르멘과 다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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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거니즘(veganism)이란 최근 프랑스에서 확산되고 있는 라이프스타일로, 동물로부터 나오는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도 소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독일 베를린의 쉬벨바이너 거리는 '비건 거리'로 불릴 정도로 비건인들을 위한 다양한 매장들이 들어서는 등 유럽에는 건강뿐 아니라 동물 윤리, 생태계 보호, 윤리적 소비를 실천하는 젊은 층이 비거니즘을 이끌고 있다.

서울혁신센터와 공동으로 행사를 운영하는 '비건 타이거'는 모피 동물 보호를 위해 비건 형태의 가운과 티셔츠 등 다채로운 의류 제품을 선보였다. 양윤아 대표는 행사 준비부터 진행까지 힘들었지만 사람이 많이 와서 보람 있다고 전했다.

"1회 1500명, 2회 4000명에 이어 오늘 5~6000명이 온 것 같다. 건강, 동물권, 환경, 페미니즘 등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이 비건 페스티벌에 오고 있다. 소수자에 대한 응원·연대의 차원에서도 비건 페스티벌은 의미가 있다. 같이 성장할 수 있는 비건 관련 스타트업도 함께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계속 우리를 찾는다면 (비건 페스티벌이) 아시아의 축제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웃음)"

서울혁신센터와 공동으로 행사를 운영하는 ‘비건 타이거’ 양윤아 님
 서울혁신센터와 공동으로 행사를 운영하는 ‘비건 타이거’ 양윤아 님
ⓒ 서울혁신센터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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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타이거'가 만든 뱃지
 '비건 타이거'가 만든 뱃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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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가 까탈스럽다고? 살면서 선택지가 많고 다양성이 확보돼 있으면, 삶은 더욱 풍성해진다. 과거 채식이 건강 혹은 육식과 생육 환경에 대한 반대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각자의 출발점은 달라도 채식주의자가 한데 모여 교감하고 공통의 취향을 확인하는 비건 페스티벌은 '느낌의 공동체'로서 작동한다. 까탈스러운 취향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치 있고 즐겁게 다른 사람과 나누는 기쁨이 페스티벌에는 분명히 있다. 아직 비건 페스티벌을 만나지 못했다면 다음 페스티벌에 당신의 발걸음을 기대한다.

비건 페스티벌을 보면서 '임파서블 버거'를 떠올렸다. 저곳에서 '피 흘리는 채식버거'를 맛볼 수 있다면 좋겠다. 맛의 혁신이 사회혁신으로까지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날 북적북적 흥겨운 페스티벌 현장, 눈길을 끄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흔적을 끊임없이 청소하고 정리하는 청소노동자들.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비건페스티벌 현장모습
 비건페스티벌 현장모습
ⓒ 서울혁신센터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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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서울혁신파크 공식 서포터즈 '파크캐스터'가 혁신파크 내 다양한 행사를 직접 취재하고 발행한 글입니다. (글 | 서울혁신파크 공식 서포터즈 파크캐스터 2기 김이준수, 사진 | 서울혁신센터 홍보파트 문하나) 이 글은 서울혁신센터 공식 뉴스레터 [채널서울혁신파크]와 공식블로그에 게재되었습니다.



태그:#서울혁신파크, #비건페스티벌, #채식, #다양성, #베지테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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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혁신파크는 도시의 다양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국내 최초의 사회혁신 플랫폼입니다. 은평구 녹번동에 위치한 곳으로 250여 혁신 그룹, 1300여 명의 혁신가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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