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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눈물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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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힌 게 많으면 언제고 한이 서려 터져 나온다.

주말에 방바닥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바느질을 하던 엄마가 갑자기 바늘을 손에서 놓더니 빈 허공을 눈빛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처음 엄마가 고깃집 일 나갔던 거 기억나니?"

누워 있던 내가 기억난다고 말하자, 엄마가 20년도 더 된 옛날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빠가 도박에 빠진 후, 집안 가세가 조금씩 기울어졌다. 경마장에서 우연히 2천만 원까지 돈을 땄던 날이 시작이었다.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돈에 대한 환상과 한방 심리가 아빠를 매일 경마장으로 향하게 했다. 집에 돈을 가져오지 않는 날이 늘어나더니 이내 멀쩡한 직장도 관두고 백수가 되었다.

그 2~3년 사이 우리 집은 재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 입주조차 못해보고 전세를 놨던 주공아파트, 시골에서 할아버지가 아빠 앞으로 줬던 땅, 서울 월세방 보증금까지.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저학생일 때 처음으로 바깥에 나가 돈을 벌게 되었다. 고깃집 서빙이 그 시작이었다. 아빠는 겉만 멀쩡한 양반이었고, 도박에 눈이 돌아가 있었다. 엄마가 고깃집에서 서빙 일을 보고 있으면 종종 가게에 나타나 돈을 받아 갔다. 그 모습이 남일 같지 않았던지 고깃집 여사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은지 엄마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은지 아빠가 글렀구먼. 저거 사람 구실 못하게 생겼다."

당시 엄마가 다니던 고깃집 여사장은 작은 해물탕집 하나와 지하철역 근처 지하에 큰 고깃집까지 가게가 두 곳이었다. 장사가 잘 안 돼서 사채를 끌어다 쓴 것이 원인이 되어 빚쟁이들에게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다. 여사장이 보기에는 자기 신세와 엄마 신세가 다를 것이 없었다. 집안 살림만 하던 사람이 바깥일을 한다는 것이 사연 없이는 드물었던 때였다.

일 년 반쯤 버티던 여사장은 빚 독촉이 심해지자, 어느 날 엄마를 불러 말했다. 은지 아빠는 사람 구실을 못하고, 혼자 애들을 어떻게 키우겠느냐고. 해물탕집 보증금만 마련하면 가게를 엄마에게 줄 터이니 한 번 꾸려 보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가진 돈이 한 푼도 없었다. 하지만 딸린 자식들이 눈에 밟혀 어려운 시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엄마는 시골집의 큰아빠에게 "애들하고 먹고살아야 하는데 애들 아빠는 답이 없다"고 "돈을 빌려주면 그 돈은 내가 꼭 갚겠다"며 사정했다. 큰아빠는 마지못해 돈을 빌려주었고, 엄마는 그 돈으로 하루 2시간 밖에 못 자고 가락시장에서 생선을 떼와 해물탕집을 시작했다. 같은 시기, 여사장은 사채업자들을 피해 야반도주했다.

그때부터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엄마는 하루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었다. 해물탕집을 했다가 다른 가게를 했다 하며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 되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명절이고, 제사면 큰 집에 돈을 부치고 우리들만이라도 시골집에 다녀오게 했다. 힘들게 한 푼, 두 푼 모아 큰아빠의 돈을 갚아 나갔다.

추석 때였다. 오랜만에 시댁을 방문하니 큰아빠는 엄마에게 웃으며 다 됐으니 돈이나 갚으시라고 말했다.

"제수씨, 그냥 돈이나 갚으세요."

큰아빠의 이 한 마디에 엄마는 이 악물고 돈을 벌어 빚을 갚았다. 내가 회사를 다니고 일이 년쯤 지났을 때 드디어 큰 집에서 빌린 돈을 모두 갚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을 끝으로 엄마는 시골집에 가자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아빠가 빌린 돈도 갚으라고 다른 친척들이 성화였지만, 엄마는 본인께서 빌린 돈만 갚고 아빠의 일은 아빠의 것으로 잘랐다.

그날의 기억이 참 서글펐다고 엄마가 말했다. 나는 엄마가 20년이 지나서야 들려준 이야기에 속상했다. 엄마가 이 이야기를 일찍 들려주었다면 나는 절대 큰 집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시골집은 이제 큰아빠가 있는 그 집이 아니라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이 있는 집, 한 곳뿐이다.

자식들은 그 사정을 알 리가 없어서 친가 쪽 사촌들이 처음 시골집에 발길을 끊은 것에 대해 내게 섭섭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아빠에게 맞아본 적도 없고, 아빠의 빚 때문에 고생해본 적이 없다. 엄마가 좀 더 일찍 말씀해 주셨더라면, 나는 절대 큰 집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태그:#엄마, #가정폭력, #도박, #가산탕진, #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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