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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김명식 지음)는 '사회적 고통을 기억하는 공간'을 탐방한다. 그럼으로써 기억의 공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아픔을 기억하는 건축과 도시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이 책이 더욱 와 닿는 것은 독자를 사회적 고통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더욱 생생하게 이해하고 절실하게 고민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취지에 대해 이렇게 밝힌다.

"'아픔의 비'를 맞는 이에게 우산을 씌워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그 비를 맞기 위해서, 우는 이를 달래기보다는 옆에서 함께 울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고통에 참여하기 위해서 기획되었습니다."(10쪽)

이 책은 이런 취지에 따라, 남영동 대공분실, 평화의 소녀상,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소문 순교성지, 세월호 추모공간 등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고문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악의 공간, 남영동 대공분실

검은 벽돌로 둘러싸여 있어서 겉모습부터 무거운 인상을 주는 남영동 대공분실. 이 건물은 인권 유린의 고통스러운 흔적이 남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현재는 '경찰청 인권보호센터'가 되어 지난 역사에 대한 반성의 공간이자 인권의 중요성을 전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현재는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 남영동 대공분실 현재는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 뜨인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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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인 저자는 이 건물이 얼마나 '치밀하게 설계된 악의 공간'인지 밝혀낸다. 이는 이 책의 눈에 띄는 장점이다. 저자는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가 공간의 기능만이 아니라 심리적 영향까지 치밀하게 계산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특수한 목적에 맞게 건축가가 최대한 외부와 단절되게 공간을 계획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이 건물은 외부에서 눈에 잘 띄지 않게 계획되어 있고, 행정 업무와 취조 업무를 분리하여 일반 행정직원과 피해자가 서로 마주치지 못하도록 동선을 분리하여 설계 되었으며, 5층의 고문 공간이 노출되지 않도록 특수하게 디자인된 창문이 전체 건물의 외관, 특히 전면 파사드의 비례를 해치지 않게 디자인되어 있습니다."(48쪽)

기능성, 동선, 전면의 비례까지도 잘 계산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보통 고문실은 외부에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지하에 있기 마련인데, 남영동 대공분실은 5층에 고문실이 있다. 왜 5층에 두었을까? 게다가 1층부터 5층 고문실까지는 나선형 원형 계단으로 올라간다. 이건 또 뭘까? 다시 저자의 말을 들어 보자.

피해자는 이곳으로 끌려 올라가게 된다.
▲ 나선형 계단 피해자는 이곳으로 끌려 올라가게 된다.
ⓒ 뜨인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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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가려진 피해자는 자신이 끌려온 방향이나 끌려 올라간 층수를 기억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1층에서부터 쉬지 않고 올라가는 나선형 계단에는 대략 3미터 간격으로 있어야 할 계단참이 없으므로, 자신이 몇 층에 도달했는지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어둡고 습한 원통형 계단실에 들어선 피해자는 육감적으로 일반적이지 않은 공간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입니다. 그리고 1층에서 5층 천장까지 뚫려 있는 공간에서 발소리와 수사관의 윽박지르는 음성이 서로 뒤섞여 울려대는 소리는 끌려 올라가는 이에게 극심한 심리적 공포를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건축적으로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이런 공간은 건축가의 특별한 의도 없이는 만들어지기 어렵습니다."(50쪽)

그러니까 이 건물의 독특한 구조는 끌려가는 이의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해 계산된 것이었다. 고문실로 가는 과정도 이토록 소름이 끼치는데, 정작 고문실은 어떠했겠는가!

고문실에는 비명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방음 시설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흡음재 대신 목재 타공판을 사용했다. 이 또한 공포 효과의 극대화를 위한 것인데, 구체적인 이유는 책에서 확인해 보기 바란다. 이곳에서 고문을 받았던 김근태 전 국회의원은 그 효과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건축가는 고문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고문실 천장에 달리는 전구의 형태, 색깔, 밝기까지도 지정했다. 이 공간을 들여다볼수록 고문의 고통이 느껴질 듯해서 두려울 뿐만 아니라, 건축가의 악한 의도가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섬뜩하다. 다시는 나오지 말아야 할 악의 건물이며, 반복되지 않아야 할 역사를 기억하는 공간이다.

함께 비를 맞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이 책은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도 안내한다. '일본군 위안부'를 기억하는 건물인데, 우리 역사의 비극이 어떻게 공간으로 형태화되었는지 살펴본다. 여기서도 역시 건축가의 탁월한 설명이 빛을 발한다.

이 공간은 힘든 과정을 거쳐 일반 주택을 리모델링해서 만들었다. 그럼에도 사회적 고통에 참여하자는 취지가 잘 살아 있다. 도입부부터 예사롭지 않다.

쇄석길
▲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 쇄석길
ⓒ 뜨인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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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나서면 '쇄석길'(역사 속으로)입니다. 건물 외벽과 뒷집과의 경사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6미터 정도의 옹벽 사이 공간은 왼쪽 옹벽에 그려져 있는 검은 형태의 소녀들과 오른편 건물 외벽에 걸려 있는 서글픈 할머니들의 얼굴, 바닥에 깔린 쇄석(부서진 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군홧발 소리와 쇄석 위를 걸을 때 나는 자갈 소리, 좌우의 소녀와 할머니 모습은 소녀가 불확실한 미래로 끌려가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줍니다."(116~117쪽)

이렇게 방문자는 알 수 없는 장소로 다가가는 듯한 불안감을 느끼며 좁은 공간으로 들어가게 된다. 쇄석길은 마치 일제시대 소녀가 끌려 들어갔을 법한 어두운 지하로 연결된다. 지하 전시관으로 들어가면, 위안소 한 칸 방으로 비유되는 공간이 나온다.

전장으로 끌려 간 과정과 그 이후의 삶을 절묘하게 보여주는 동선 처리와 공간 구성이다. 다음은 2층까지 계단을 오르며 보고 듣는 '호소의 벽'으로 이어진다.

호소의 벽
▲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 호소의 벽
ⓒ 뜨인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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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은 울퉁불퉁한 벽면에 드리워진 불규칙한 그림자로 인해 마치 상처와 흉터로 가득한 피부처럼 보입니다. 이 위에 소녀들이 할머니가 되어 전하는 일본의 만행과 그에 대한 분노 그리고 희망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글귀는 벽돌 위에 아픈 상흔처럼 새겨져 있고, 할머니들의 사진과 함께 서글픈 목소리가 계단실 공간을 울립니다. (…) 이곳의 건축적 형태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현실의 세계, '위안부' 할머니라는 한 개인의 비극과 고통을 훨씬 더 가깝고 정확하게 느낄 수 있게 합니다."(121~124쪽)

2층으로 올라서면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주한 일본대사관 맞은편에 세워진 것과 동일한 평화의 소녀상도 만날 수 있다. 그 외 1층과 2층을 가로지르는 기부자의 벽이 있고 미완성의 추모관이 있다. 1층으로 내려가면 상설전시관이 나온다. 일반 주택을 리모델링한 알찬 공간 활용이 돋보인다.

여성 피해자의 삶을 주제로 삼은 건축은 드물고 귀하다. 그래서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더욱 소중하고 의미 있는 기억의 공간이다. 그렇지만 이 미완성의 박물관에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이 도시 중심부에 세워졌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기념관이 도시 중심부가 아닌, 찾기 힘든 일반 주거지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픈 과거의 역사가 아직 우리 사회 한가운데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결국 우리의 남루한 역사의식을 역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128쪽)

아픔과 슬픔을 기억하는 도시를 위해

김명식 지음
▲ 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 김명식 지음
ⓒ 뜨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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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이 책은 고통스러웠던 역사의 현장, 아픈 기억의 풍경으로 대변되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세월호 추모관 등을 안내한다. 저자가 특별히 기억의 공간을 주목하는 이유는 이렇다.

"공간은 지속적인 기억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공간 한가운데 생생히 붙잡아 둔 기억은 바로 그 공간에 의해 그곳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사라지지 않습니다."(35쪽)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도시는 슬픔과 고통은 지워버리고 가벼운 즐거움과 의미 없는 장식으로 넘쳐나고 있지 않나 돌아보게 된다. 슬픔을 외면한다면, 같은 고통과 슬픔이 반복해서 찾아오기 마련이다.

도시에 고통과 슬픔을 마주하고 기억하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고통 속에서 파편화된 개인을 공동체로 감싸 안는 치유의 공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함께 비를 맞고 함께 울며 다른 사람을 품는 우리의 마음이 넉넉해지기를.


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 -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세월호 추모관까지

김명식 지음, 뜨인돌(2017)


태그:#공간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 #김명식, #사회적 고통, #기억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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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2002년, 오마이뉴스 2.22상 수상 2003~2004년, 클럽기자 활동 2008~2016년 3월, 출판 편집자. 2017년 5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자유기고가. tmfprlansghk@hanmail.net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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