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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소설, 만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음식들. 군침이 절로 나오는 이야기 속 음식 레시피와 그에 얽힌 잡담을 전한다. 한 술 뜨는 순간 장면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음식 이야기를 '씨네밥상'을 통해 풀어낼 예정이다. - 기자 말

만화 <빨강머리 앤>의 한 장면.
 만화 <빨강머리 앤>의 한 장면.
ⓒ 후지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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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렸어요!!"

어른들이 별일 아니라고 치부하는 작은 일에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슬픈 기분이 들거나 혹은 환희에 가득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때, 빨강머리 앤만이 나를 이해해 줄 것 같았다. 앤과 다이애나가 마릴라 아주머니가 구워준 쿠키로 피크닉 가방을 들고 들판과 강가로 소풍을 갈 때, 나는 집에 있는 '오예스'와 '마가레트'를 챙겨 동네 공터로 친구와 같이 '상상 피크닉'을 갔고, 앤이 교회 피크닉에서 난생 처음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을 보고는 냉장고 있던 돼지바를 꺼내 종이컵에 포장해 공터에 가 먹었다.

앤이 되려면 다이애나가 있어야 했기에 가장 친한 동네 친구를 다이애나라고 생각했고 그 친구가 만화 속의 다이애나와는 다르게 감상적인 면을 받아주지 않을 때는 혼자 상상 속의 다이애나를 만들었다. "어머 이것 봐,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지 않니? 장미꽃이 아주 아름답구나." 뭐 이런 말들을 허공에 중얼대면서 다닌 것이다. 나 또한 남들이 보면 오글거리는, 마릴라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허영과 감상에 가득찬' 아이였다.

넉 놓고 봤던 그 장면

지금이라면 보고 있기조차 민망한 드라마 퀸, 바로 그것이 빨강머리 앤이 가진 매력이자 어린 시절 나를 비롯해 감상에 쉽게 빠지는 소녀들을 공감케 한 지점이다. 빨강머리 앤은 캐나다의 소설가 루시 M 몽고메리가 1908년 발표한 성장소설이지만 우리에겐 일본 후지 TV의 50부작 애니메이션으로 더 익숙하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림체, 클래식 BGM과 원작 소설의 대화를 상당수 살린 연출, 그리고 남성 나레이션을 삽입한 다큐멘터리적 요소까지 그 모든 것이 평화롭게 딱 떨어지는 만화였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연출로 1979년 후지 TV에서 방영을 시작해 총 50편이 제작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선 1986년부터 상영되어 인기를 끌었다. 맨 처음 앤을 보기 시작한 이래로 TV에 앤이 나오면 그 앞에 앉아 봤던 걸 또 보곤 했다.

사실 애니메이션의 빨강머리 앤은 항상 기쁨에 차 있고, 그에게 일어난 슬프고 비극적인 일도 항상 긍정적으로 마무리되어 시골 생활이 꽤나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보면 생활감이 더 자세하게 드러나서 앤의 고난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애니메이션에선 책에 나오는 온갖 잼과 과일 콤포트, 쿠키, 케이크 등을 정말로 먹음직스럽게 묘사하기 때문에 앤이라면 역시 이 후지TV 버전이 좋다.

"사람들은 저에게 거창한 말을 쓴다고 비웃지만 거창한 생각이 있을 때 거창한 말로 표현하는 게 맞지 않나요?"

작은 것에도 "정말 낭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라고 한다거나, 또 금세 "저는 지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어요"라며 거창하게 말하는 앤에게 마릴라 아주머니는 "너란 아이는 도무지", "난 공상따위는 딱 질색이다", "넌 정말 쉬지도 않고 지껄이는 구나" 등등의 말로 대꾸를 한다.

어린 시절에는 마릴라 아주머니는 딱딱하고 너무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마릴라 아주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감상에 빠진 어린 아이의 말이란 정말 듣고 있기 힘든 것들이 많아서 자칫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질리거나 싫다는 생각이 들기가 쉬운데 마릴라 아주머니는 앤을 아직 어른이 덜 된, 그러니까 아직 인간이 덜 된 아이가 아닌 한 명의 어엿한 인간으로 대접했으니 말이다.

아무리 마릴라 아주머니가 근엄한 표정으로 면박을 줘도 앤은 "염려 마세요~"라거나, "전요, 이럴 때에는 이런 기분이 든단 말이에요" 등등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뻔뻔한 면모를 보이기에 애니메이션은 끝끝내 우울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다시 보면 좀 우스꽝스러운 구석도 있다. 감상에 가득찬 앤의 대사 또한  묘하게 현실과 붙어 있어서 리얼하다. 그러니까 앤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저는 지금 너무 비참해요. 아주머니 저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기독교적인 연민이 있다면 이런 처지에 빠진 저에게 설거지를 하라고 하진 말아주세요."

정말 감상에 빠진 어린 아이가 할 법한 말 아닌가? 앤은 또한 '허영이 많은 아이'로 묘사되는데 그 이유는 '어깨가 봉긋 솟은 블라우스'를 입고 싶어 한다든가, 자신의 빨강머리와 비쩍 마른 몸에 엄청난 콤플렉스가 있고 항상 더 예뻐질 수 있기를 기도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때면 마릴라 아주머니는 "겉모습에 집착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등등의 말로 앤을 진정시킨다. 앤의 가장 친한 친구 다이애나는 앤이 엉뚱하리만큼 감상에 젖은 말을 할 때면 "어머, 앤~" 하며 웃어 넘긴다. 시트콤으로 만들어도 될 만큼 캐릭터의 조합이 좋다. 

지금은 대책없이 위안을 주는 존재

만화 <빨강머리 앤>의 오프닝 장면
 만화 <빨강머리 앤>의 오프닝 장면
ⓒ 후지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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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의 에피소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 대다수가 앤의 실수와 관련된 것이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친구 다이애나를 초대해 잔뜩 기분 좋아진 앤이 딸기 주스라고 생각해 딸기 술을 대접한 것. 둘은 만취해버리고 마릴라 아주머니와 다이애나의 어머니는 화가 잔뜩 난다. 원작에서는 라즈베리가 아닐까 싶은데, 당시 우리나라에는 라즈베리가 생소해 딸기로 해석한 게 아닐까? 또 하나 유명한 에피소드는 마을에 새로 온 앨런 목사 부부를 초대하는 이야기다. 앨런 목사의 부인을 동경하는 앤은 초대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마릴라 아주머니와 함께 이틀에 걸쳐 음식을 준비한다.

"크림을 바른 레몬파이, 버찌파이, 또 과자가 세 종류에 과일파이 파운드 케이크 그리고 플럼 졸임이랑…"
"열두 가지나? 그렇게나 많이?"
"레어케이크만은 내일 아침에 내가 직접 할 거야. 하지만 난 내가 만들 레어케이크 생각만 해도 몸이 으슬으슬 떨려. 어젯밤에 말이야, 커다란 레어케이크를 쓴 모자 귀신한테 밤새 쫓기는 꿈까지 꿨지 뭐니."

초대 전날, 자신의 떨리는 심경을 다이애나한테 이야기하는 앤. 레어케이크 하나만큼은 마릴라 아주머니의 도움 없이 혼자 만들어 대접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망의 날, 들뜬 마음에 새벽 일찍부터 일어난 앤이지만 그만 코감기에 크게 걸리고 말았다.

그래도 부부가 오는 시간에 맞춰 열심히 케이크를 만드는데, 케이크를 맛 본 앨런 부인의 표정이 이상하다. 코감기에 걸려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앤이 피부연고약을 바닐라액이라고 착각하고 케이크에 넣어 버린 것. 그렇게나 열심히 준비하며 앨런 부인의 기쁜 표정을 기대하던 앤은 또다시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진다. 그래도 앨런 부인은 앤의 예쁜 마음을 헤아려주고 잘 돌아가는데, 뒷정리를 하는 앤은 그렇게나 큰 실수를 한 것치고는 밝아 보인다.

"아주머니 내일은 아직 아무 실수도 하지 않은 새 날이라고 생각하면 기쁘지 않아요?"
"너도 참, 너는 내일도 또 실수를 할게다."
"아니 아주머니, 한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에는 틀림없이 한계가 있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놓여요."

역시 뻔뻔하리만큼 긍정적인 앤, 많은 이들이 앤의 대사를 인생의 지침으로 삼는 이유다. 소설은 앤이 자라 교사가 되고 매튜 아저씨가 죽고 혼자 남은 마릴라 아주머니를 돌봐주며 길버트와 결혼해 자식을 낳고 키우는 그의 일생을 담았다. 그래도 우리의 기억 속 앤은 여전히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소녀이며, 문득 책을 열어 잊었던 그를 다시 만났을 때 힘든 인생에 대책없는 위안을 주는 존재다.

"정말로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날이 아니라 진주알들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사소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 것 같아요."

[씨네밥상 레시피] 빨강머리 앤이 실패한 산딸기크림 바닐라 레어케이크

빨강머리 앤의 산딸기크림레어케이크
 빨강머리 앤의 산딸기크림레어케이크
ⓒ 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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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이 바닐라 대신 피부약을 넣은 레어케이크, 애니메이션을 보면 스펀지케이크 층마다 라즈베리잼을 바르고 크림으로 덮어 장식한다. 이 레시피를 그대로 재현할까 했지만 조금 더 맛있게 바꿔보고 싶었다. 앤 셜리는 상상력이 부족한 것을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는가?

국내에서 흔히 먹는 보송보송한 스펀지 케이크는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20세기 초반 캐나다의 시골마을에 사는 앤은 그렇게 보송보송한 스펀지 케이크가 아닌, 버터가 잔뜩 들어간 스펀지 케이크를 구울 것 같아서 버터를 왕창 넣는 빅토리안 스펀지 케이크 레시피를 찾았다.

그.런.데 대실수의 에피소드에 나온 케이크가 아니랄까봐 나에게도 앤 셜리의 고난이 찾아왔다. 쉬운 빅토리안 스펀지 케이크 레시피를 썼는데 맛이 너무 두텁고 섬세하지 못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죽 공정이 간단해서 반죽을 하면서도 이미 맛이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집에 있는 달걀은 다 썼고 비싼 버터 한 덩이도 통째로 들어갔기 때문에 인정하고 싶지 않아 끝까지 구웠다.

그리고 맛을 보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가 이내 힘을 찾고 다시 재료를 사와 처음부터 시작했다. 사실 그렇게 맛없지는 않았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설탕과 달걀을 같이 믹싱해 거품을 올리는 공립법을 썼는데 달걀은 상온에 있던 것을 쓰는 것이 좋고 처음 믹싱하는 1~2분 간은 뜨거운 물 위에 볼을 올려 중탕하면서 믹싱하는 편이 좋다. 만화에서 앤 셜리도 중탕으로 반죽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 또 만화에선 구운 케이크에 라즈베리 잼을 층마다 바르고 크림으로 장식하지만 잼보다는 크림을 좋아해서 마스카포네치즈와 휘핑크림, 산딸기를 섞은 산딸기크림을 발랐다.

요즘은 국내산 생 산딸기를 구할 수 있는 일년 중 얼마 안 되는 계절이라 라즈베리 대신 산딸기를 택했는데, 선명한 분홍색과 맛을 내기에는 라즈베리 쪽이 나은 듯하다. 냉동 라즈베리도 상관 없다. 그렇게 케이크를 다시 만드니 마감 시간을 훌쩍 넘겼다. 아무 실수도 하지 않은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고만 싶다.

* 실패했다고 생각한 빅토리안 스펀지 케이크 버전은 마릴라 아주머니의 "돼지에게나 먹여라"라는 조언에 따라 버릴까 하다 혹시나 하고 산딸기크림을 발라봤는데, 의외로 굉장히 어울리고 맛있었다. 괜히 다시 구운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대요,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에요,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는 걸요."

재료분량 지름 20cm 케이크 1개 분량

재료

스펀지케이크
중력분 150g, 베이킹파우더 1작은술, 달걀 6개, 설탕 165g, 바닐라익스트랙 1작은술, 무염버터(녹인 상태로 준비) 75g,

산딸기마스카포네크림
휘핑크림 280ml, 마스카포네치즈 250g, 설탕 3큰술, 산딸기나 라즈베리 250g

옵션
딸기잼이나 라즈배리잼 혹은 시럽 적당량, 슈거파우더 적당량

1. 오븐은 160도로 예열한다.
2. 원형 케이크 팬의 옆부분에 버터를 녹여 칠하고 바닥에는 유산지를 깔아 준비한다.
3. 중력분과 베이킹파우더를 함께 체에 곱게 친다.
4. 큰 믹싱볼에 달걀과 설탕, 바닐라익스트랙을 넣고 핸드믹서로 거품을 낸다. 15~20분 가량, 색이 연해지고 부피가 3배 정도로 늘고 거품기로 반죽을 들었을 때 반죽이 끊어져서 떨어지는 정도까지 거품을 올려야 한다. 처음 1~2분은 중탕을 하면서 믹싱해야 거품이 잘 올라온다.
5. 4에 3의 가루를 두번으로 나눠 넣어 섞는다. 거품이 꺼지지 않게 주걱으로 살살 접듯이 섞는다. 너무 휘젓지 않도록 주의하며 날가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만 섞는다.
6. 5에 녹인 버터를 넣고 살살 섞은 뒤 원형팬에 부어 오븐에 넣는다. 가진 원형팬의 크기에 따라 두 개의 팬에 나눠 넣어도 되고 한 팬에 구운 뒤 가로로 잘라 써도 된다.
7. 오븐에서 20~25분 가량 굽는다. 젓가락을 찔렀을 때 묻어 나오는 것이 없으면 다 구워진 것이다. 틀에서 빼 식힘망에 올려서 식힌다.
8. 마스카포네치즈에 설탕을 넣고 설탕이 녹을 때까지 잘 섞는다.
9. 휘핑크림을 믹싱볼에 넣고 거품기로 잘 쳐서 생크림을 만든다. 8과 산딸기를 더해 섞어 산딸기마스카포네크림을 만든다.
10. 케이크를 한 팬에 구웠으면 가로로 잘라 두 판을 만든다. 아랫 판의 윗 면에 딸기잼이나 시럽을 고루 바르고 산딸기마스카포네크림을 듬뿍 올린다. 윗 판을 덮고 슈거파우더를 체에 곱게 쳐서 장식한다. 산딸기 등을 더해 장식해도 된다.


태그:#빨강머리앤, #산딸기, #케이크, #딸기케이크, #스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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