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생극에서 무너미 고개를 넘어

출발지 생극면사무소
 출발지 생극면사무소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 다섯 번째 날, 출발지는 생극면사무소다. 생극에서 목적지 충주 관아까지는 38㎞다. 그 때문에 아침 8시 출발한다. 중간에 숭선참(崇善站), 용안역(用安驛), 대소원(大召院), 달천진(達川津)을 거쳐 충주목(忠州牧) 관아에 도착하게 된다. 9-10시간을 걸어야 하는 먼 길이다. 이번 옛길 걷기에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국내 구간의 거리는 525㎞다.

가장 짧은 구간이 20㎞ 정도고 가장 긴 구간이 40㎞ 정도다. 그러므로 생극-충주 구간은 긴 편이다. 생극은 조선시대 충주목에 속했지만, 현재는 음성군에 속해 있다. 옛길은 옛날 3번 국도를 따라 나 있다. 그러므로 생극면 신양리를 출발, 생리와 오생리를 지나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로 넘어가게 되어 있다.

생극면을 지나는 대원들
 생극면을 지나는 대원들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신양리는 1945년부터 생극면 소재지가 되었다. 그것은 서울에서 충주로 이어지는 3번 국도가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리는 옛날 생동면의 중심 마을로 현재는 1구와 2구로 나눠져 있다. 오생리는 생극면의 가장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길이 도화동과 오룡을 지난다. 도화동은 말 그대로 복숭아꽃이 아름다운 동네고, 오룡은 한자로 보면 다섯 마리 용을 뜻한다.

오룡을 지나면 길은 계속해서 오르막이다. 그리고 고갯마루에 못 고개 표지석이 있다. 못 고개란 못(池)이 있는 고개라는 뜻이다. 여기서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팀은 잠시 휴식을 취한다. 출발한지 1시간 30분 정도 지났기 때문이다. 또 이곳에서부터는 행정구역이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 수월(水越) 마을로 바뀐다.

무너미고개를 넘는 대원들
 무너미고개를 넘는 대원들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수월은 순우리말로 무너미다. 물이 넘어가는 곳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오생리의 못물이 수월로 넘어갔기 때문에 생겨난 지명이다. 그래서 못 고개를 무너미 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수월을 지나면 길은 모남리 모도원(毛陶院)으로 이어진다. 모도원이라는 이름을 통해 옛날 이곳에 여관과 주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옛길 걷기팀은 마을 안길을 지나 남악(南岳)으로 내려간다.

숭선참의 흔적은 모두 물속으로

동락초등학교
 동락초등학교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남악을 지나면 길은 서충주 IC 교차로로 이어진다. 이 교차로는 평택-제천간 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생겨났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대화리에 위치한다. 길은 대화리 화치(花峙) 마을 앞을 지나 동락(同樂)으로 이어진다. 동락에는 동락초등학교가 있고, 이곳에 김재옥 여교사기념관이 있다. 김재옥 선생은 6․25전쟁 때 국군에게 인민군의 주둔사실을 알려 국군 최초의 전승을 도운 사람으로 유명하다.

동락에서 현재 길은  송암리 방향으로 나 있지만 옛길 걷기팀은 문숭리 숭선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그것은 옛길이 숭선참을 지나 용안역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숭선참은 옛날 숭선 마을에 있던 참이다. 통신사들의 옛 기록에 숭선촌 또는 숭선참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숭선촌은 1949년 신덕저수지(일명: 용원저수지)가 생기면서 수몰되었다.

숭선참을 우회하는 대원들
 숭선참을 우회하는 대원들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숭선 마을의 수몰로 인해 이제는 동락에서 용원으로 이어지는 옛길을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저수지 남쪽으로 난 옛날 3번 국도나, 저수지 북쪽으로 난 마을길을 통해 용원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남쪽 길을 택하면 원평리 미륵불을 만날 수 있고, 북쪽 길을 택하면 문숭리 용담사 미륵불을 만날 수 있다. 우리 옛길 걷기팀은 송암리를 지나 원평리로 내려간다.

여기서 원평(院坪)이라는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이 있던 들이라는 뜻이다. 용안에 역이 있었다면 원평에는 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미륵불은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기도처로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길의 오른쪽에 원평리가 있다면, 길의 왼쪽 요도천(堯渡川) 변에는 내포(內浦) 마을이 있다.

요도천
 요도천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요도천은 신니면 수레의산에서 발원해 주덕읍, 대소원면을 지나 충주시 용두동에서 달천에 합류한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25㎞를 흐르며 넓은 들의 젖줄 역할을 한다. 기본적으로 요도천을 따라 옛길이 나 있고,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팀도 큰 틀에서는 그 길을 따라갈 것이다. 길은 원평리에서 신니면 소재지인 용원리로 이어진다.   

용안역은 어디인가?

용안역을 향하는 대원들
 용안역을 향하는 대원들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용원(龍院)의 원래 이름은 용안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용안역이 나오기 때문이다. 충주목 역원(驛院)조에 보면 연원역(連原驛), 가흥역(嘉興驛), 용안역, 단월역(丹月驛)이 나온다.

연원역: 주 북쪽 5리에 있다. 찰방(察訪)이 있다. 본도(本道)에 속하는 역(屬驛)이 14개인데, 단월(丹月)ㆍ인산(仁山)ㆍ감원(坎原)ㆍ신풍(新豐)ㆍ안부(安富)ㆍ가흥(嘉興)ㆍ용안(用安)ㆍ황강(黃江)ㆍ수산(壽山)ㆍ장림(長林)ㆍ영천(靈泉)ㆍ오사(吾賜)ㆍ천남(泉南)ㆍ안음(安陰)이다. 찰방 1인이다.
용안역(用安驛): 주 서쪽 45리에 있다. 예전에는 음성(陰城)에 속했는데, 성종(成宗) 9년에 충주로 이속(移屬)시켰다.

그런데 용안이 용원으로 변한 것은 1900년대로 추정된다. 1760년 <여지도서>에는 용안리(用安里)로 나온다. 이것이 1898년 <충청도읍지>에서는 용안리(龍安里)가 된다. 한자가 바뀐 것이다. 그리고 1910년대 발행된 <조선지지자료. 충북편>에서 용원리(龍院里)가 된다. 용안역은 현재 외용1리 마을회관 자리에 있었다. 현재 도로명 주소로는 덕고개로 7, 7-1, 7-2 지역이다.

용안역 자리에 들어선 외용1리 마을회관
 용안역 자리에 들어선 외용1리 마을회관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용안역은 용원 옛길과 덕고개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것이다. 그리고 용원 옛길 건너편 덕고개로 9, 11 지역에는 마방(馬房), 대장간, 솜틀집이 있었다고 한다. 덕고개로 맞은편 용원1길을 따라서는 국밥집, 양조장 등이 들어서 있었다. 이들 점방이 용안역의 의식(衣食)은 물론이고, 생활용품, 마구와 농기구 등을 공급했을 것이다. 우리 옛길 걷기팀은 덕고개로를 따라가며 용안역을 살펴본다.

그리고 이곳 용원리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시간은 오전 11시 45분으로 좀 이른 편이다. 그렇지만 아침식사를 일찍 했고 또 앞으로 시골 마을을 지나야 해 40명 정도가 단체로 식사할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점심은 된장찌개, 김치, 나물반찬에 생선과 돈까스가 곁들여졌다. 일본 사람들을 위한 배려다. 다들 음식이 맛있다고 한다. 요즘말로 가성비가 높은 편이다.

덕신초등학교 학생들의 환영

장록리 대통령상 수상기념탑
 장록리 대통령상 수상기념탑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점심을 먹고 우리는 참샘길을 따라 요도천을 건넌다. 참샘골은 수청(水淸)골의 순우리말 이름이다. 수청골에는 사육신 중 한 사람인 박팽년을 기리는 사우(祠宇)가 있다. 사우는 사당의 다른 표현이다. 이곳을 잠시 살펴본 걷기팀 일행은 주덕읍 당우리(堂隅里)로 들어선다. 당우리의 옛이름은 당모루로, 서낭당 모롱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당우리 다음은 장록리다. 이들 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 마을로 뒤쪽에 야트막한 산이 앞쪽에 요도천이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장록리 마을 입구에는 대통령상 수상기념탑이 서 있다. 1999년 쌀 다수확 최우수단지로 선정됨을 기념해서 세운 탑이다. 단보 당 수확량이 670㎏이나 되었다고 한다.

덕신초등학교 학생들의 환영
 덕신초등학교 학생들의 환영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장록리를 벗어나면 525번 지방도와 만난다. 여기서 일행은 주덕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장록리 다음 마을은 제내리(堤內里)다. 순우리말로는 방죽안이 된다. 이곳에 덕신초등학교가 있다. 우리는 덕신초등학교 앞을 지나 화곡리로 갈 예정이다. 그런데 학교 앞 길가에 덕신초등학교 학생들이 나와 통신사 옛길 걷기팀 일행을 환영한다.

학교 건물에는 '꿈꾸는 아이들 덕신초등학교'라는 글자판이 붙어 있다. 학교 앞에는 교장선생님과 총동문회장, 주덕읍장, 주민자치위원 등이 학생들과 함께 나와 있다. 학생들의 환영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다. 회원들 모두가 흐뭇해한다. 면단위 학교들은 요즘 입학생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데, 2017년 덕신초등학교 1학년 입학생은 13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고무적인 일이다.  

달천 건너기

대소원면사무소를 나서는 대원들
 대소원면사무소를 나서는 대원들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화곡리를 지나면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회원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며 우비를 착용한다. 비의 양이 많지 않아 걷기에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화곡리 구야 마을에 이르니, 이명박 대통령이 이곳에서 2011년 5월 26일 모내기를 했다는 표석이 보인다. 이래저래 한국 사람들은 대통령을 좋아하는 것 같다.

화곡리를 지나면 길은 대소원면 삼주리(三洲里)로 이어진다. 삼주리를 지난 일행은 다시 요도천을 건너 대소원면소재지로 들어간다. 대소원은 용원을 떠나 충주로 가던 과객들이 쉬어가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충주로 가는 길은 요도천을 따라 가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중간에 두어군데 길이 끊어져 있어, 옛길걷기팀은 편의상 3번 국도를 따라간다. 3번 국도는 차량통행이 너무 많아 조심해야 한다.

달천강을 건너는 대원들
 달천강을 건너는 대원들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일행은 한국교통대학교 앞을 지나 달천강에 이른다. 달천강은 속리산에서 발원해 남한강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길이가 116㎞나 된다. 달천진에서의 강폭이 200m가 넘는다. 그것은 충주 조정지댐으로 수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3차 통신사 부사였던 강홍중(姜弘重)은 1624년 8월 25일 달천을 건너며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비. 이른 아침에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나 중도에 이르니, 비가 억수로 퍼부어 냇물이 크게 불었다. 달천(達川)을 건너 충주(忠州)에 들어가니, 목사(牧使)를 대리하고 있는 사람이 나오고, 도사(都事) 고인계(高仁繼)가 연향(宴享)을 베풀기 위하여 왔다. (<동사록(東槎錄)>)

충주시내로 들어가기

충주시내를 걷는 대원들
 충주시내를 걷는 대원들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옛날 같으면 배로 건넜을 그 달천을 우리는 다리를 통해 건넌다. 달천교의 길이는 276m나 된다. 달천교를 건너면 목사 선정비가 몇 기 세워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를 충주 시내권으로 보면 된다. 길은 시내를 향해 쭉 뻗어 있다. 중간에 기차 철로가 지나가기 때문에 과선교(跨線橋, Overbridge)를 넘어야 한다.

과선교를 지나면 시내 쪽으로 1㎞ 정도 사과나무 가로수길이 조성되어 있다. 그것은 충주가 사과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아직 사과꽃이 피질 않았다. KBS 충주방송국부터는 차량뿐 아니라 사람들의 통행도 많다. 우리는 인도를 따라 동쪽으로 계속해 걸어간다. 길은 대수정(大手町) 다리를 지나 제1로터리로 이어진다. 대수정이라는 단어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 충주 시내를 4개의 정으로 나누며 생긴 이름이다.

충주관아 청령헌 앞에서의 기념촬영
 충주관아 청령헌 앞에서의 기념촬영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제1로터리는 과거 충주읍성의 서북쪽 끝 모서리였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중앙로가 읍성의 북쪽 부분이었다. 그러나 1907년경 도로를 낸다는 명분으로 읍성이 훼철(毀撤)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 길을 따라 읍성 북문지(敬天門)에 이른 다음, 관아4길을 통해 충주관아로 들어선다.

관아 입구에는 충청감영문(忠淸監營門)인 중원루(中原樓)가 있다. 충청감영문은 1997년 충북 정도(定道) 100주년을 기념해 2층 누각으로 세워졌다. 중원루 앞에는 충주시 관계자가 나와 조선통신사 걷기팀을 기다리고 있다. 걷기를 마무리한 회원들은 그들과 함께 관아로 들어가 청령헌(淸寧軒)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청령헌은 충주목 관아 동헌에 해당한다. 걷기 5일차 행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태그:#생극, #충주, #무너미 고개, #용안역, #달천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