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내가 TV를 산 이유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 MBC

관련사진보기


"잉~ 엄마, 손석희 앵커가 <시선집중> 그만뒀어...."
"너 손석희가 그만둔 거 되게 슬픈가 보다. 그 소리를 벌써 몇 번이나 하는 거야?"

2013년의 어느 날 10년이 넘게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며 들었던 라디오 방송에서 손석희 앵커가 마지막 방송을 의미하는 말을 했다. '퍼거슨 타임'을 언급하며 자신에게는 40분 정도의 추가 시간이 있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라디오 방송을 그만두는 것이 서운했다. 10년이 넘게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누리던 그의 목소리와 방송을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되어서였다. 그러다가 그가 JTBC 보도본부 사장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얼마 후에는 그가 직접 뉴스를 진행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 무렵 우리 집 TV에는 공중파만 나왔다. 굳이 다양한 채널의 방송을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유선 방송은 신청하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운 좋게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유선 방송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면 JTBC 뉴스를 볼 수 있겠구나 기대했는데, 이번에는 연로하신 우리 집 TV가 문제였다. 1992년에 태어나신 우리 집 TV로는 유선 방송의 신호를 잡을 수 없기에 종편이나 케이블 채널의 방송을 보고 싶으면 새 TV를 구입해야 한다고 했다.

고장 나기 전에는, 그 물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결코 다른 것을 사지 않는다는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있기에 조금 고민이 되었다. 사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주변에 조언을 구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너 같은 사람만 세상에 살면 TV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다 굶어 죽는다고. 그래서 고장 나지도 않은 TV를 미안한 마음을 담아 보내고 새 TV를 장만했다. 그리고 JTBC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뉴스를 보고 싶어서 TV까지 새로 산 사람이다.

손석희 앵커가 따뜻한 사람이라고요?

1980년대에 MBC 뉴스데스크를 진행하던 손석희 앵커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 없다. 내가 인지하는 그의 모습은 <시선집중>에서 들은 것이 전부다. 아침 6시부터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7시가 넘으면 출근을 했기 때문에, 내가 들었던 손석희 앵커의 방송은 <시선집중> 1, 2부 뿐이었다. 그 시간은 주로 사회 현안과 시사 문제를 다루어서 정치인 인터뷰가 많았고, 손석희 앵커는 집요하게 조목조목 대단하신 정치인들과 논리 싸움을 벌였다. 그래서 나는 손석희 앵커에 대해 냉철하고 논리적인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직장 동료와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손석희 앵커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출근 준비를 하며 방송을 매일 듣는다고 말했더니, 동료는 출근하면서 차 안에서 라디오로 듣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동료가 했던 평가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평가한 손석희 앵커는 아주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방송을 10년 넘게 들었지만 그런 평가는 의외였다. 무슨 말이냐며 이야기를 더 이어가 보았더니 서로 들었던 방송 시간대가 달랐다.

동료가 출근길 차 안 라디오를 켜서 듣는 것은 7시~8시에 방송되는 3, 4부였다. 이 시간에는 중요한 정치 현안보다 일상생활 속 따스한 이야기를 담은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이 시간에는 인터뷰를 하더라도 나 같은 평범한 일반인이 대상인 적이 많았고, 인터뷰를 진행하는 손 앵커는 그들이 잘 말할 수 있도록 매우 공손하고 따뜻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고 했다.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JTBC 뉴스9 티저 광고의 문구는 "힘없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힘있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뉴스"였다. 나는 냉철하다고 했고 동료는 따뜻하다고 했던 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왜 나왔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문구였다고 생각한다. 그가 진행하는 뉴스는 나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덕분에 역사에 기록될 '최순실의 태블릿 PC' 보도 순간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이어진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도 한 순간 한 순간 꼼꼼히 지켜보았다. 미래의 역사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연구하게 될 중요한 역사적 사실(史實)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적반하장

2014년 4월 25일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생방송으로 뉴스를 진행하고 있는 손석희 앵커.
 2014년 4월 25일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생방송으로 뉴스를 진행하고 있는 손석희 앵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국회 탄핵 가결 후 외국으로 여행을 갔다. 그런데 1월에 해외에서 인터넷으로 국내 뉴스를 보다보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최순실의 태블릿 PC가 조작된 것이라느니, 손석희 사장이 뭔가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렀느니 하는 신빙성 없는 이야기가 SNS를 통해 떠돌고, 이에 동조하는 기사마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며칠 전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사임하고 대선 출마를 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손석희 앵커가 자사 회장의 대선 출마를 위한 정치적 의도로 뉴스를 전한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지난 3월 20일 앵커 브리핑에서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손석희 앵커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를 더 이상 JTBC 뉴스에서 볼 수 없게 될까봐 걱정도 되었다.

그래서 작은 목소리로나마 말하고 싶다. 손석희 앵커를 격려해 주고 응원해 주자고. 최근의 상황을 보며 서양화가 나혜석이 연상되어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화가 나혜석과 손석희 앵커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그런데 나혜석을 떠올리며 걱정이 된 건 그의 안타까운 마지막 모습 때문이다. 천재 화가이자 문학가인 나혜석은 여성 해방론자였고 남성 중심의 사회에 도전할 만큼 당당했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 간 나혜석을 이해하지 못한 당시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고, 사람들의 비난에 상처받은 나혜석은 결국은 무너지고 말았다.

언론 경력이 한 두 해도 아닌데 손석희 앵커가 이 정도 공격에 흔들릴 리가 없다. 네가 괜히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걱정도 팔자다, 라는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원색적인 비난으로 도배된 손석희 앵커 관련 글들이 더 쉽게 보인다. 전후 사정을 제대로 모른다면 손석희 앵커가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고 믿게 될 것 같다. 그럴 정도로 악의적인 비난과 음해는 차고 넘친다. 아무리 멘탈이 강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량으로 쏟아지는 비난 글들을 매일 볼 수밖에 없다면 상처받지 않을까? 그래서 그를 응원하고 격려해 주자는 것이다.

네가 그 사람 보자고 TV를 샀을 만큼 팬이라서 손석희 앵커가 나쁜 사람인데도 편드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거 같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를 편들어 주고 싶은 걸까? 우리나라에 시사 프로그램도 많고 아나운서와 앵커도 수십 명이 넘는다. 더 젊고 잘생긴 아나운서도 많은데 왜 환갑도 넘은 할아버지(?)의 방송을 15년도 넘게 듣고 보는 것일까? 그가 들려주는 뉴스를 신뢰할 수 있어서이다.

15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게다가 앵커는 하루에도 엄청난 양의 말을 쏟아낸다.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몇 마디 하지 않고 신비로운 존재로 버티기는 애초에 불가능한 직업이다. 나와 그를 신뢰하는 이들은 긴 기간 동안 그가 들려준 뉴스와 뉴스 분석, 우리 사회와 정치에 대한 합리적 문제 제기, 비판을 들으면서 서서히 그에 대한 신뢰를 쌓아갔다.

첫눈에 반한 강렬한 첫사랑처럼 손석희 앵커의 외모 등에 반해서 그를 신뢰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는 어떤 형태의 권력을 가진 이에게도 집요하게 질문했고, 정권이 덮고 싶어 하는 세월호 문제도 끈질기게 주목했다.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가 한 말의 분량 정도면 언론인 손석희를 검증하고 신뢰할 수 있다고 결론내리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사필귀정이 되기를...

역사가 좋아서 전공했고 역사 덕분에 밥 먹고 사는 나지만, 가끔은 이걸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옳은가 싶을 때가 있다. 명백한 악행을 저지른 이가 역사의 승리자가 되기도 하고, 선한 의도로 타인을 위해 최선을 다한 이가 시대 흐름을 잘못 파악해서 안타까운 패배자가 되기도 한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역사를 보아도 기득권에 저항한 이들은 대부분 무사하지 못했다.

최순실 게이트가 세상에 드러난 이후, 나중에 죽으면 환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두세 번 정도는. 장희빈 이야기가 드라마와 영화로 여러 번 제작되었듯이 최순실 게이트도 앞으로 수백 편의 드라마, 영화, 소설, 웹툰, 뮤지컬, 연극 등의 소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법정, 추리, 액션, 코미디, 에로 등 어떤 장르로도 가능할 것이다. 그 문화 상품 속에 내가 살아간 시대가 어떻게 그려질지 정말 궁금하다.

그 문화 상품에 필수로 등장할 주요 인물에는 손석희 앵커가 있을 것이고, 그 시대의 국민 배우 정도 되는 이가 사명감을 가지고 연기할 것이다. 그 국민 배우가 연기할 손석희 앵커의 마지막 모습이 반대 세력의 적반하장 공세로 무너지고 쓸쓸히 퇴장하는 뒷모습이 아니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손석희 앵커가 공정하고 능력 있는 후배와 언론사를 여럿 키워놓고 박수를 받으며 명예롭게 은퇴하는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좀 더 적극적으로 손석희 앵커를 응원해 주자. 그가 상처받지 않도록, 받은 상처도 치유될 수 있도록 지지해 주자. 이것은 어느 한 개인에 대한 팬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손석희 앵커 정도의 비중을 가진 언론인도 적반하장에 무너져 버린다면 우리나라는 언론의 자유, 세상을 위한 용기 있는 고발, 기득권층이 아닌 흙수저에게도 공정한 나라를 꿈도 꿀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진실을 알린 이가 기득권층의 역습으로 무너져버리는 안타까운 모습을 이제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태그:#손석희, #JTBC 뉴스, #시선집중, #홍석현, #최순실
댓글3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