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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기사를 통해서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힐 계획이다. [편집자말]
곽은수, 혜법 스님
 곽은수, 혜법 스님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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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 있어 보이는 단단한 체구에 굳은살 박힌 주먹. 무술을 수련한 스님이신가? 눈에서 빛이 쏟아지는 것을 보니 그럴 것도 같았다.

무척 날카로운 인상이라 웃지 않으면 말 붙이기조차 쉽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자주 웃었다. 5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하리만치 해맑은 웃음이라 미소만으로도 주변을 온통 환하게 했다. 그 미소 덕분에 비밀스럽기까지 한 그의 인생을 귓속에 담을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곽은수, 법명은 혜법(慧法)이다.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영산암(靈山菴)이라는 절의 주지 스님이다. 지옥의 수용소로 알려진 선감학원 출신으로는 드물게 성직자인 승려가 된 인물이다.

그를 만난 것은 지난 15일 오전. 봄 햇살이 산과 들을 파고들어 가만히 있어도 마음이 달뜨는 그런 날이었다. 친절하게도 그는 안동 버스 터미널까지 마중 나와 주었다.

'끔찍한 기억이라 말하기 쉽지 않을 텐데!'라는 마음에 쉽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눈치를 챘는지,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선감학원에 잡혀가기 전)어렸을 때 기억도 어렴풋이 납니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수원시청 공무원에게 납치돼 죽음의 수용소로

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일제 강점기때 소년들이 배를 타고 선감학원으로 드러오는 모습.
 경기창작센터에 전시된 사진, 일제 강점기때 소년들이 배를 타고 선감학원으로 드러오는 모습.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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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도 있고 형제(형 둘, 누나 하나, 동생 둘)도 있었으니, 소년 곽은수는 선감학원에 갈 이유가 전혀 없는 아이였다. 선감학원 수용 대상자는 부모 형제 없이 거리를 떠도는 부랑아였다. 그런 그가 어째서 선감학원에서 8년여씩이나 지옥 같은 생활을 했던 것일까?

8살 무렵이니 분명 학교에 가야 할 나이였지만 그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이유는 잘 모른다. '호적에 여자로 올라 있어 입학하지 못한 것 같다'고 그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짓느라 바빴고 형과 누나는 학교에 다녔다. 쌍둥이 동생은 갓난아이였다. 또래 친구는 원래 없었다. 해서, 그는 늘 심심했다.

어느 날, 마을에 또래 아이들 몇몇이 나타났다. 그는 그 아이들과 함께 해지는 줄 모르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놀았다. 칼싸움도 하고 숨바꼭질도 했다. 한참 놀다 보니 낯선 곳이었다. 큰 성이 보였고 자전거포도 있었다. 어디선가 파란색 자동차가 나타났다.

그 차를 보자마자 함께 놀던 동무들은 눈치를 채고는 모두 달아나 버렸다. 하지만 시골뜨기 소년 곽은수는 동무들이 왜 달아나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파란 차에서 방망이를 든 사람들이 내렸다. 다짜고짜 그를 잡아끌어 차에 태우려 했다. 겁이 난 그는 집에 간다고 울부짖으며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다. 그 순간 방망이가 그의 머리에 묵직하게 떨어졌다. 소년은 그 자리에서 똥과 오줌을 지렸다. 그리고 말을 잃었다. 그가 끌려간 곳은 수원시청이었다.

"그때 아마 아이들을 잡으러 다녔나 봐요. 그 애들(동무들)은 눈치를 채고 도망친 거죠. 똥오줌을 싼 채로 끌려다녔는데, 자기네들끼리 막 웃고 떠드는데, 난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머리를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정신도 없고. 그 이전에는 그렇게 세게 맞아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시청에서 집이 어디냐고 묻는데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주소도 몰랐고요. 그래서 그냥 어눌한 말투로 '저~기, 저~기'라고 한 것 같아요. 그랬더니 '저기가 어디냐'며 자기들끼리 또 웃고. 이름을 묻는데 대답을 못 해서 또 몇 대를 맞았어요. 그러니 주눅이 들어서 더 말을 못하죠. 누군가 그냥 '한용수'라고 하자고 해서 제 이름이 한동안 '한용수'였어요."

머리 박박 밀고, 담요 씌운 다음 짓밟고

매질과 얼차려의 후유증
 매질과 얼차려의 후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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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곽은수는 이렇게 공무원에게 납치돼 사방이 바다로 막힌 선감학원으로 끌려갔다. 가자마자 머리를 박박 밀린 다음 막사를 배정받았다. 군대 내무반처럼 침상이 양쪽에 놓여 있는 방이었다. 신고식은 혹독했다.

"원 없이 맞았어요. 담요 씌워놓은 다음 짓밟고 발로 가슴팍 걷어차고 따귀 후려치고, 생지옥이 따로 없었죠. 신고식 다음 날에는 점호에 늦었다고 또 맞았고요."

이렇게 시작된 매질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매질을 당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의 입에서 '아이고!'라는 탄식이 흘러나왔고, 그때마다 표정이 굳어졌다.

"집합이 제일 무서웠어요. 종을 세 번 치는데, 그날은 무조건 맞는 날이에요. 선착순 해서 3등 안에 못 들면 '매타작'였으니까요. 4등은 한 대, 5등은 두 대... 곡괭이 자루로 열 대 넘게 맞는 경우도 허다하지요. 또 사장(막사의 장)이 선생한테 불려가서 맞고 오면, 그날은 정말 사장한테 죽도록 맞는 날이고요. 선생이 원생들 간 폭력을 부추긴 거죠. 선생한테 맞는 것보다 같은 원생인 사장, 방장한테 맞는 게 더 무서웠어요."

심지어 그는 곽은수로 이름이 바뀌는 날도 심한 매질을 당했다. 이름을 찾은 게 아니라 바뀌었다고 한 이유는, 곽은수라는 이름도 본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기억하는 그의 이름은 '은주'다. 성은 박인지, 곽인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박은주가 아니면 곽은주이다. 그런데, 어째서 곽은수로 사는 것일까.

"선감학원에 들어가고 한 2년 뒤 11월 25일 날, 이름 같은 것을 다시 조사했어요. 생일도, 그냥 그날로 정했고요. 진짜 이름이 뭐냐고 묻는데, 그때까지도 전 말을 못했어요. 그랬더니 말 안 한다고 따귀를 후려치는데 얼마나 세게 쳤는지 그대로 몸이 날아가서 엎어졌어요. 등허리를 발로 짓밟고, 아이고! 그 작은 몸뚱이 어디 밟을 데가 있다고. 이렇게 막 다그치니까 제 입에서 '은주'라는 말이 튀어나왔어요. 선생이 '은수?'라고 다그쳐서 아니라고 하면 또 맞을까 봐 고개를 끄덕끄덕 한 거죠."

매질과 함께 엄청난 얼차려도 가해졌는데, 군대보다 더 혹독한 수준이었다. 그의 주먹에 박힌 굳은살, 알고 보니 무술수련을 한 흔적이 아니라 혹독한 얼차려의 후유증이었다.

"'골바(원산폭격)'라고 하면 머리를 땅에 박아야 돼요. '돌아' 하면 머리 박은 채로 뱅뱅 돌아야 하는데,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흘러도 멈추지를 않아요. 주먹 쥐고 엎드려 뻗쳐서 굴 껍데기 위를 기어 다니기도 했는데, 한번 시작하면 굴 껍데기에 피가 흥건해집니다. 이 굳은살이 다 그때 박인 거예요."

"지옥에서 만난 사람들, 지금도 만나기 싫어"

곽은수, 혜법 스님
 곽은수, 혜법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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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폭행은?'이라고 묻자 그는 잠시 주저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곱상하게 생긴 애들은 다 당했다고 보면 돼요. 선배들한테요. 저도 피할 수는 없었고요. 이거 어디 가서 말도 못할 일이에요. 걸음을 못 걸을 정도로, 대변을 못 볼 정도로 심하게 당한 아이도 있어요. 밤만 되면 지옥이었죠. 장00, 물새 이놈들이 아주 유명했는데, 밤만 되면 애들을 창고로 불러내서! 그 사람들(가해자) 아마 나이 아무리 많이 먹어도 이거 말 못할 거예요. 더 고통스러운 것은 '놀림'이에요. 당하고 나면 '00 띠겼다(뜯겼다)'고 막 놀려요. 그러니, 선감학원 자체가 지옥인 거죠."

선감학원 출신들은 이런 이유 등으로 지금도 서로 만나는 것을 꺼린다. 지옥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폭력은 선후배 간에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또래 동기들 간에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싸우다 걸리면 이긴 놈이나 진 놈이나 죽도록 맞는데, 그래도 싸움이 자주 일어났어요. 서로 위에 서려고 하는 거죠. 강할수록 고통을 덜 받으니까요. 정말 무식하게 싸웠어요. 짱돌로 무조건 찍고 봐요. 한 번 이겼다고 이긴 것도 아니에요. 기회 보다가 갑자기 또 찍거든요. 잠들면 눈깔 뽑는다고 위협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진짜 잠을 못 자는 녀석도 있었어요. 결국 누군가 빌어야 하는데, 절대 안 빌어요. 빌면, 나갈 때까지 꼬붕(부하)이니까요. 어이구! 지금 생각해 봐도 인간 세상이라고 볼 수가 없어요."

그의 말대로 선감학원은 인간 세상이라고 볼 수 없었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동물들의 세계였다. 약한 자는 고통 속에 살다가 어느 날 어디론가 사라졌다. 고통에 못 이겨 도망치다 죽은 아이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빌빌거리는 애들은 살 수가 없어요. 아파서 의무실 갔다가 안 돌아오면 죽었다고 봐야 해요. 머리가 느린 고문관이라고 하는 애들도 마찬가지고요. 허구한 날 두들겨 맞다가 의무실 간 다음에 안 돌아오면 그것도 사실 죽은 거고요. 때려 죽여도 그만이에요. 도망쳤다고 하면 되니까요. 실제로 마루 밑에서 아주 작은 해골이 나온 적도 있어요. 누군가 몰래 묻었겠지요. 도망치다 파도에 떠밀려 죽은 아이도 많고요. 도망치다가 붙잡히지 않았다면, 성공했거나 죽었거나 둘 중 하나인데,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별로 듣지 못했어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었던 거예요."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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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선감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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