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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이 시국인지라 '검사'라는 직업이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그동안 나에게 '검사'라는 이미지는 청와대 입맛에 맞게 공권력을 임의로 주무르며 무소불위의 칼을 휘두르는 칼잡이였다. 강한 자 앞에 한없이 약하고, 약한 자 앞에 무한정 강하기만 한 비굴한 권력의 대명사라고 보았다.

부정과 부패, 비리, 조작 사건은 그들의 밥줄이라고 생각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주요 공안 사건 등에서 검찰이 취해 왔던 모습 때문에 혹은, 영화 등에서 비친 일반적 모습은 그랬다. 오죽 했으면 김대중 전 대통령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 "이 나라 최대 암적 존재는 검찰이다"라고 했을까.

개인적으로는 이주노동자 프락치 사건 때 외국에는 '수사 기법 중에 플리바기닝(유죄협상제도)이 있다'며 출입국을 옹호하던 법무부 고위간부 때문에 검사에 실망한 바가 크다. 그런 이유로 검사에 대한 신뢰는 영화가 보여주는, 딱 그 정도까지였다. 그런 모든 것들이 편견이요, 지나친 일반화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기록 너머에 사람이 있다> 안종오 지음, 다산지식하우스 출판
 <기록 너머에 사람이 있다> 안종오 지음, 다산지식하우스 출판
ⓒ 다산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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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너머에 사람이 있다>는 그런 편견을 깨고, 선입견을 버리게 할 수 있을 만큼 말랑말랑하다. 16년차 부장검사가 쓴 법과 정의, 그 경계의 기록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인생의 도가니 속에서 밝히는 검사의 고백이다. 저자 안종오 검사는 법무연수원에서 신임검사들을 가르치는 부장검사다.

산전수전 다 겪고 대한민국 신임검사들을 가르치는 위치 정도 됐으면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닐 텐데 마음은 상당히 여리다. 피의자에게 속을 가능성이 반반일 때,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아야 하는 최악의 사태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다며 피의자를 석방하는 마음씨 착한 검사다.

이 책은 특검이 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최순실, 박근혜 게이트를 수사하던 시기에 출판되었다. 지금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피의자로 부른 검찰에게 국민은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검사가 쓴 말랑말랑한 글에 숨겨진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할 수도 있지만, 선의를 믿기로 하고 읽으면 큰 감동을 받을 수 있다.

마음을 열고 읽으면 '이렇게 말랑말랑한 검사도 있나' 싶을 정도로 유머가 넘친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공감할 수 있는 책이라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게다가 곳곳에 뭔가를 생각하게 하는 깊이가 있다. 한 마디로 마음 한 편에 새겨두고 싶은 글귀들이 깨알처럼 가득 차 있다.

검사라고 다들 강심장만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마음 여리고 물러터진 검사도 있다. 저자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오죽했으면 '공황장애'를 겪기까지 했을까. 그는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떠돌던 마음 여린 소년의 화풀이 범행에 석방건의서를 작정하고, 소년 사범 관리에 전문성을 가진 법사랑 위원의 도움을 받도록 조치한다. 반전이 필요한 아이에겐 온화한 선생님처럼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검사가 필요하다.

"구속된 경험이 '낙인'이 아닌, 인생에 반전을 가져다준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23p.

신임검사를 가르치며 '사건 한 건 한 건을 소홀히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그리고 봉사하면서 보람을 찾겠노라고' 다짐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모습에는 숙연해진다. 스승된 자로서 사건 자체에 매몰되기보다는 사건에 녹아 있는 인생을 봐야 한다는 기특한 생각을 가진 신임검사들에게 고마워하는 모습에선 초심을 잃지 않으려는 공직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 공직자는 사람을 죽이는 칼잡이가 아니다. 국민이 내려준 잘 드는 식칼로 열심히 사건이라는 식재료를 다듬어 맛있는 음식을 차려내는 보검을 든 식객 고수다. 그래서 모든 검사가 정권의 하수인은 아니며, 초강도의 업무에도 국민의 봉사자로 살기를 다짐하는 전문인임을 말해준다.

"자정 넘어까지 일해도 끝없이 밀려드는 업무에 서류가 그냥 서류로 보일 뿐,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의 인생을 보지 못하는 때가 많아졌다. 신임 검사들의 말이 또다시 나를 가르친다. "기록 너머에 사람이 있음을 잊지 말자."" - 35p.

잘 가르치는 사람은 잘 배우는 사람이다. '눈앞의 인생에 귀를 기울이며 삶을 배워나가겠다'고 다짐하는 검사는 좋은 선생님이다. 법무연수원 부장검사인 오 검사는 잘 배우는 사람이다.

"검사실뿐만 아니라 법정에서도 삶을 배운다. 하루 종일 법정에서 수사검사가 기소해놓은 수만은 사건들을 보고 있노라면 기계가 된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건 하나에 적어도 하나 이상의 인생이 달렸다는 것이다." - 47

책을 읽다가 아주 낯익은 장면을 만났다. 어라! '2016헌나1', 대통령 탄핵심판 인용 결정문이 낭독되던 순간인가? 최순실 국정 농단으로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인용을 결정하던 날,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그런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던 선고 요지 때문에 심장이 쫄깃쫄깃했다.

그런데 천하에 검사도 그럴 때가 있구나 싶어 살짝 미소 짓지 않을 수 없다. 검사 입에서 '들을수록 헷갈리고 머리만 아프다'고 나왔다고, '판결문도 이해 못하나' 하지 마시라. 그것은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자가 할 수 있는 엄살일 것이다.

"재판장이 판결문을 읽기 시작한다. 10분 넘게 판결을 고지한다. 여기까지 들어서는 유죄 같은데 또 저기까지 들으니 무죄 같기도 하고, 아무튼 들으면 들을수록 헷갈리고 머리만 아프다. 그냥 예측하지 말자고 생각하고 끝부분에 뭐라고 하는지만 듣자고 생각했다. 내게는 마지막 문장만 기억에 남는다. "이런 점을 종합하면 피고인에게 유죄가 인정된다 할 것입니다….""

천하에 검사도 다소곳하게 사정할 때가 있다

당뇨병에 걸린 환갑 넘은 딸이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다며 찾아온 아흔 살 노인을 위해 펜을 든 검사의 모습, 쉽게 상상이 안 간다. '검사' 명함 하나로 못할 게 없을 것 같은데, 민원인이 되어 편지를 쓰는 모습은 참 말랑말랑하고 감상적이다. 우린 이런 검사도 필요하다.

"법조 생활 10년이 되어 갑니다. 세상 사는 법리로 풀리지 않는 것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의가 법에 의해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님도 느낍니다. 제가 느끼는 안타까움을 사장님께서도 어느 정도 공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 267p.

전화할 때마다 집에 안 가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형에게 동생은 염장을 지른다. "검사라는 직업이 하나도 안 부럽다"고. 그런데 그 모습이 참 인간적이다. 어째 검사가 다 안쓰럽기까지 하니 말이다.

"형! 잘 지내지? 어디여?"
"응, 아직 사무실이야."
"엥? 뭐여. 전화할 때마다 사무실에 있네. 왜 집에 안 가?"
"그러니까 말이다. 할 일이 좀 많네."
"죽도록 공부하더니만 이게 뭐여, 집에도 못 가고. 검사라는 직업이 하나도 안 부럽구만."
"......."


검사라는 이름으로 무게 잡기보다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까지 드러내놓고 말하는 저자는 '행복은 벼락치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을 행복하게 살려고 하고, 내가 먼저 행복하려고 한다.

오늘을 성실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안 검사는 '사건 하나에 적어도 하나의 인생이 걸려 있다'는 말을 명심하며 이미 끝난 사건도 한 번 더 훑어본다. 다시 말하지만, 서민의 삶과 애환, 고통에 귀 기울이는 검사, 우린 이런 검사가 필요하다.


기록 너머에 사람이 있다 - 16년차 부장검사가 쓴 법과 정의, 그 경계의 기록

안종오 지음, 다산지식하우스(다산북스)(2017)


태그:#검사, #안종오, #법무연수원, #부장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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