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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2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대기중이던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 귀국한 반기문 전 총장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2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대기중이던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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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의 외교보좌관 발탁 당시 그는 본부대기 5개월 만에 한승수 외교부 장관이 유엔총회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의장비서실장으로 1년을 일하고 집에 돌아와 쉬고 있던 참이었다."(최광웅 노무현 정부 청와대 인사비서관, <노무현이 선택한 사람들>, 2016년)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 4월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조약 파문으로 외교통상부 차관에서 경질됐다. 1970년 외무부 입부 이후 처음 겪은 '치명적인 위기'였다. 주변에 "자살을 생각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반 전 총장은 같은 해 9월 한승수 유엔 총회의장(당시 외교부 장관)의 비서실장을 맡으면서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이 자리는 일반적으로 '국장급'이 맡는 자리였고, 유엔 시스템을 익히고 각국 외교관들과의 네트워크를 만든 기간이었다는 점에서 차후 유엔 사무총장 경선에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그 당시 그의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했다.

그랬던 그가 2003년 2월 출범한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 외교보좌관으로 발탁됐고, 그로부터 10개월 뒤에는 외교통상부 장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2006년 10월에 한국인으로는 최초, 아시아인으로는 두 번째로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됐다. 그를 당선시킨 1등 공신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는 데는 별다른 이론이 없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 선거전에 뛰어든 반기문의 최대 경쟁자가 '노무현 정부'의 승계자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노무현 정부에 참여한 인사들이 반 전 총장을 '배신자'라고 비판하는 데에는 이런 '정치적 요인'이 가장 크게 작용하겠지만, '인간적인 배신감'이 상당히 깊게 배어 있다.

유인태와 김수동, 이광재, 정찬용 등 '친미보수' 반기문 발탁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조각에 대한 구상을 말씀하셨다. '내각과 청와대가 상호보완될 수 있도록 하겠다.' 외교팀은 윤영관 외교부 장관(교수)이 정해졌다. 당선자께선 외교보좌관은 관료 출신으로 임명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자 시절 정무팀장을 지내며 초기 인사에 관여했던 이광재 전 강원지사가 2009년에 한 회고다. "내각이 진보면 청와대 참모는 보수, 내각이 보수면 청와대 참모는 진보로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는 얘기다.

청와대 내부에서는 유인태 정무수석 내정자(정확히는 유 내정자의 처남인 당시 김수동 외교부 아·중동국장의 추천, 최광웅의 앞의 책), 이광재 팀장, 정찬용 청와대 인사수석 내정자가 반기문을 추천했다. 청와대 밖에서는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한·미 관계를 잘 아는 사람을 추천해 달라"는 노 전 대통령의 요청을 받고 그를 추천했다.

정찬용 전 인사수석은 "노 전 대통령이 미국과 일본에서 상당히 신뢰받고 있는 사람을 원하셔서 반 전 총장을 추천했고, 대통령께서도 긍정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렇게 해서 "천성적으로 미국의 모든 것에 동조적(naturally sympathic to all things American)"(2006년 7월 18일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 대사가 본국에 보낸 '반기문의 유엔 사무총장 당선이 미국에 유리하다'는 비밀 전문)이라는 반 전 총장은 '노무현의 외교보좌관'을 맡았다.

친미파였고, 보수적이었던 그는 '유연'했다. '균형외교' 노선을 내세운 노무현 정부와도 호흡을 잘 맞췄고, 역시 자타가 인정하는 '일벌레'답게 일했다. 외교보좌관을 맡은 10개월 뒤인 2004년 1월 그는 외교통상부 장관이 됐다. 노무현 정부 인사과정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그는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며 "외교보좌관으로서 노 대통령의 생각도 잘 알았고 순종적이어서 장관으로 내보냈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반 전 총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 외교보좌관과 외교부 장관으로 총 3년 8개월간 일했다. 외교·안보 분야의 전직 고위관계자는 "한국 외교관들은 대체적으로 외교적 기술과 실무능력, 업무 헌신성은 대단히 높지만, 큰 그림을 그릴 전략적 마인드는 부족하다"면서 "반 전 총장은 이같은 측면에서 전형적인 한국 외교관이었다"고 평가했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균형외교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필요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2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 후 공항철도를 이용해 서울역 대합실에 도착해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시민들에게 인사하는 반기문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2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 후 공항철도를 이용해 서울역 대합실에 도착해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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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말부터 한국의 유엔 사무총장 입후보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차기가 아시아 순서였기 때문에 당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멀게만 느껴졌다. 그동안 역대 유엔사무총장은 중립성향 국가 출신 인물 중에서 강대국들이 협의해 뽑았기 때문에 비관론이 많았다.

그리고 2004년이 됐다.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으로 노무현 정부의 대외전략을 이끌었던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반 전 총장의 대선 도전이 거론되기 이전인 2014년 5월에 출간한 회고록 <칼날 위의 평화>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반기문 장관이 한국도 차기 유엔 사무총장 후보를 낼 필요가 있다며 외교부가 추천하는 3인의 후보 명단을 순위별로 적어 왔다. 1, 2순위는 직업외교관이 아닌 외교장관 출신자들이었다. 3순위는 반기문 장관 본인이었다."

'순종적인 모범생' 반기문이 '권력 의지'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이 전 장관은 일단 후보 문제는 빼고, '유엔 사무총장 도전 적기'라는 외교부 의견만을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복병이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었다. 주미대사로 내정되면서 일찌감치 유엔 사무총장 출마 의지를 피력한 그는 한국의 '사무총장 후보' 레이스에서 가장 앞서나갔으나, '삼성 엑스 파일 사건'으로 대사로 발령 난 지 7개월 만인 2005년 7월 물러나고 말았다.

그해 가을께는 유엔 사무총장 후보를 정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해졌다. '반기문 카드'로 마음을 굳힌 당시 이종석 NSC 사무차장은 정동영 NSC 상임위원장, 권진호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의 찬성을 얻은 뒤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노 대통령은 이를 수락하면서 이해찬 총리의 의견도 들으라고 요청했고, 이 총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노무현 정부는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반 전 총장을 선택했을까.

"반 장관 정도의 외교적 역량을 지니고 있으면서 미국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인물이 정확히 균형외교의 지점에 서서 북핵 및 전략적 유연성 등 한미 현안에서 미국을 설득한다면 일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유엔사무총장이 되려면 미국과 가까운 만큼 중국, 러시아 등과도 친선을 유지하며 균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했다.…반기문 장관이 유엔 총장 후보가 된다면 반 장관 스스로 균형점을 찾을 테니 우리의 균형 외교는 그만큼 수월해질 것이다." (이종석, <칼날 위의 평화>, 2014년)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균형외교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핵심요인이었다는 것이다.

만약 홍석현 회장이 주미대사에서 낙마하지 않고 출마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종석 전 장관은 "홍 회장이 당선됐을 것으로 본다"면서 "반 전 총장이 당선된 데는 '반기문 개인'의 역량도 있었겠지만, 그 기본 토대는 한국의 국가역량과 노무현 정부의 '균형외교'였다"고 분석했다. 노무현 정부가 미국 일변도도 아니고 중국에도 기울어져 있지 않다는 국제적인 인식이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노무현은 반기문 선거대책본부의 총괄본부장격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반기문 선거대책본부의 총괄본부장격이었다…방한하는 외국 고위인사들도 빼놓지 않고 청와대로 불렀다. 심지어 스리랑카의 위크라마나야카 총리가 방한했을 때는 '스리랑카에서도 후보를 낸다는데 그래도, 기회가 되면 도와달라'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스리랑카의 경우 유엔 군축회담 사무차장을 역임한 자얀티 다나팔라를 일찍부터 후보로 확정하고 득표활동에 들어간 상태였다."(최광웅, <노무현이 선택한 사람들>, 2016년)

2006년 2월 반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출마가 공식 발표된 후 8개월간의 선거운동 기간 노 대통령은 이집트·알제리·아랍에미리트·코스타리카·아제르바이잔 등을 찾아다녔다. 그 이전 한국 대통령들이 한 번도 방문하지 않는 나라들이 대부분이었다.

또 외국 정상들을 만날 때마다 우선적으로 '반기문 지지'를 요청했다. 노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할 급박성이 없는 아프리카 일부 국가 정상들을 일부러 만나면서 반 장관을 배석시켰고, 자신이 직접 만나기 어려운 지도자들에게는 권진호 안보보좌관 등을 특사로 보냈다.

또 아프리카와 유럽에 영향력이 있는 프랑스가 '반기문 지지' 대가로 요구한 '항공연대 기여금' 제도에도 응했다. 2007년부터 우리 국민의 해외 항공료에 포함된 1000원의 '국제빈곤퇴치기여금'이 이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노 대통령은 정부 안팎의 숱한 경질 요구에도 반 장관의 외교부 장관 자리를 지켜줬다. 유엔사무총장 출마 발표 직후인 2006년 4월 동원호 피랍자 석방교섭이 늦어지면서 정부의 소극적인 협상 태도와 함께 반 장관 책임론이 떠올랐을 때도, 그해 7월 북한의 대포동2호 미사일 발사와 이에 따른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가 이어지면서, 한나라당이 반 장관을 포함한 외교·안보라인 전면 교체를 요구했을 때도 이를 거부했다.

이 무렵 청와대 내부에서는 반 장관의 거취와 관련해 10번 정도의 보고서가 올라갔으나, 노 대통령은 움직이지 않았다(박남춘 전 청와대 인사수석 대표집필, <대통령의 인사>, 2013년). 이광재 전 지사에 따르면 당시 노 대통령은 "욕은 내가 먹는다, 남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 유엔사무총장 자리가 매우 중요하다"며 이를 물리쳤다.

"반기문, 전화는 하면서 왜 문상은 안 왔나? 권 여사가 정말 서운해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2일 인천국제공항에서 부인 유순택씨와 함께 공항철도를 타고 서울역까지 이동하고 있다.
▲ 공항철도 탄 반기문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2일 인천국제공항에서 부인 유순택씨와 함께 공항철도를 타고 서울역까지 이동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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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반 전 총장은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추모 영상이나 서면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 장의위원회에 고문으로 이름을 올린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장례식 2개월 뒤인 7월부터 2011년 8월까지 여러 번 한국을 방문했지만, 경남 김해의 묘소는 찾지 않았다.

그러한 행보에 비례해 반 전 총장을 향한 노 전 대통령 쪽의 서운함이 커졌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한 뒤 비서관을 지낸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권양숙 여사가 반 전 총장에 대해 정말 서운해했고, 2011년 가을부터는 주변에 이를 얘기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반 전 총장과 함께 일했던 김진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인간적으로 실망했다"고 말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리고 몇 달 뒤인 12월 1일 반 전 총장이 김해를 방문해 노 전 대통령 묘소에 참배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개인 휴가 중의 비공식일정이므로 언론에 비공개해달라"고 요구했다. 이후 그는 노무현 정부 인사들에게는 확실한 '배신자'로 인식됐다. 노무현 정부에서 수석을 지낸 한 인사는 매몰차게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규정할 정도다.

이와 관련해 반 전 총장 쪽의 오준 전 유엔대사는 "노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5월 27일) UN 대표부에 차려진 빈소에 바로 갔다고 들었다"며 "제가 알기에는 권양숙 여사라든지 (노 전) 대통령의 가족분들에게 매년 1월 1일 전화를 하는 거로 알고 있다"고 해명했다(1월 5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그러나 김경수 의원은 "그가 노 대통령 생존 시에 그리고 돌아가신 후에도 신년과 명절 등에 전화한 것은 것은 맞다"라며 "그런데 왜 전화는 하면서 방문은 안 하고, 노 대통령 서거하신 지 2년 반 만에 묘소를 방문했을 때도 비공개로 해달라고 했을까, 결국 마지못해 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라고 반박했다.

외교관들은 의전과 인맥관리의 달인들이고, 반 전 총장은 그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보인 모습에 '미스터리'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 때문에 '박연차 23만불 수수' 의혹이 보도되자 "이명박 정부에게 약점이 잡힌 상태에서, 이 사건과 관련된 얘기가 아예 나오지 않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니냐"는 추정까지 나왔다.

이런 '배신론'과 아울러 '업무 성과'를 둘러싸고도 비판이 나온다. 유엔 사무총장 10년 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다. 국민이 만들어 준 유엔 사무총장이었지만, 국제적 평가가 대단히 부정적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는 북핵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를 유엔 사무총장으로 만들었지만, '평화 중재'가 기본 임무인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남북관계 개선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대선기획취재팀]
구영식(팀장) 황방열 김시연 이경태(취재) 이종호(데이터 분석) 고정미(아트 디렉터) 기자


태그:#반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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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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