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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불안>(알랭 드 보통, 이레, 2005)을 읽고 저자가 우리나라에서 강연을 했다는 가상 상황을 설정해 작성한 서평입니다. -기자 말

'알랭 드 보통과 함께하는 청춘, 불안을 말하다!'. 2017년 정유년 새해를 맞아 청춘콘서트가 열렸다. 청년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 불안하고 힘들어서 알랭 드 보통을 초대해 어리광 좀 부렸다. 다행히 알랭 드 보통도 우리나라를 좋아하는지라 한달음에 달려왔다.

청춘콘서트는 참가자들의 질문과 알랭 드 보통의 답변으로 이뤄졌다. 말이 청년이지 나이대는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했다. 자기가 청춘이라고 생각하며 불안을 느끼는 모든 사람이 함께 했다. 평소 작가의 팬인 나와 친구도 참여했다.

<불안>,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불안>, 알랭 드 보통, 은행나무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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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근본 이유는 사랑

우리는 불안하다. 나와 내 친구도 불안하다. 여기 청춘콘서트에 모인 사람들 모두 불안해서 여길 찾아왔다. 근데 왜 우리는 불안할까? 첫 번째 질문자가 손을 들었다. "저는 이번에 막 수능을 마친 학생입니다. 저는 사람이 불안을 느끼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달려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그런 이유로 열심히 공부해서 수능을 봤고요. 그런데 왜 우리는 높은 지위를 원하는 걸까요?"

우리가 불안을 느끼는 이유로 높은 지위를 향한 마음을 들 수 있어요. 왜 우리는 높은 지위를 구하려 할까요? 돈, 명성, 영향력에 대한 갈망을 꼽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바로 '사랑'에 대한 갈망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먹을 것과 잘 곳이 확보된 뒤에도 사회적 위계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은 그곳에서 물질이나 권력보다는 사랑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돈, 명성, 영향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 더 중시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15쪽)

사랑을 받기 위해 우리는 높은 지위를 원한다. 높은 지위를 갈망하기에 불안하다. 여기서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나 가족 간의 사랑을 넘어 일종의 존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심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랑이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높은 지위를 얻으면 타인에게 사랑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그게 나 자체가 아닌 내 지위를 사랑하는 것이라도 타인에게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다음 질문자가 손을 들었다. 그는 대기업에 다니는 먹고살 만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가끔 '지금 우리는 옛날만큼 굶지는 않는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평등주의의 가치 아래 살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옛날보다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었죠. 하지만 역설적으로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어요. 우리는 어떤 것이 충분하다고 판단할 때, 그 적절한 수준은 독립적으로 결정되지 않아요. 그것은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해 결정돼요. 우리는 빌 게이츠가 나보다 부유한 것을 부러워하기보다 동창회에서 만난 나보다 조금 더 잘사는 친구를 질투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해요.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죠. (57, 59쪽)

평등주의는 우리에게 '평등, 기대, 선망'에 관한 불안을 안겨줬다. 평등주의로 인해 사회에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지위는 없어졌다. 조선 시대에는 노비가 양반을 질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날 때부터 다른 사람이니까. 지금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 똑같이 태어나는 만큼 우리 주변 모두 질투할 만한 사람들이 된다. 같다고 여겨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질투할 사람도 늘어난다.

우리는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도 있어요. 반면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을 받으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비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죠. (82쪽)

평등주의는 우리에게 더 큰 기대를 하게 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지위로 올라갈 수 있다. 그걸 막는 계층구조는 없다. 우리도 빼어난 아이디어만 있으면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처럼 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런데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기대가 클수록 절망감이 큰 법이다.

평등주의와 함께 긍정적인 가치지만 이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능력주의(성과주의)입니다. 능력주의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은 이제 '불운하다'라고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실패자'라고 묘사됩니다.(114쪽)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열정적이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즉 높은 지위의 사람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죠. 이 말은 곧 낮은 지위의 사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집니다. (119쪽)

철학이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위로한다

함께 온 친구가 번쩍 손을 들었다. "지금까지 너무 우울한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이제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죠?"

소크라테스의 일화를 이야기해 보죠. 옛날에 소크라테스가 장터에서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본 행인이 물었습니다. "그렇게 욕을 듣고도 괜찮습니까?" 소크라테스가 대답했습니다. "안 괜찮으면? 당나귀가 나를 걷어찼다고 내가 화를 내야 옳겠소?" … 이 철학자들은 남들이 우리를 보는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모욕은 근거가 있든 없든 우리에게 수치를 준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156쪽)

우리는 남들의 말에 신경 쓴다. 친구의 평가에 움츠러들고 모르는 사람이 툭 던진 말에 쉽게 상처 입는다. "언제 취업할래?", "언제 결혼할래?", "연봉이 너무 적은데?". 철학자들은 남들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지 않았다. 남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에 따라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기 위해 고민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질책은 그것이 과녁에 적중하는 만큼만 피해를 줄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질책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만만하게 그런 질책을 경멸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 (168쪽)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다. 내가 모욕받을 사람인지 아닌지도 내가 가장 잘 안다. 나의 가치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좌우되지 않는다. 꽃을 칭찬한다고 꽃이 더 이쁘게 피고 욕한다고 주눅 드는가? 꽃은 그냥 꽃일 뿐이다. 내가 칭찬을 받으면 더 나아지고 욕을 먹으면 더 나빠지나? 남이 뭐라고 하든 나는 나다.

나이아가라 폭포와 같은 광대한 풍경 역시 불안을 다독여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런 풍경은 무한한 공간의 대표자로, 거기에 비추어보면 우리의 허약하고 수명도 짧은 몸은 나방이나 거미와 마찬가지로 보잘것없어 보이기 때문이죠. (320쪽)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인류라는 존재는 코스모스라는 찬란한 아침 하늘에 떠다니는 한 점 티끌에 불과하다'고 했다.(<코스모스>, 37쪽) 우주와 같은 거대한 공간 앞에서 인간의 고민은 한없이 작아진다. 나와 내 친구의 연봉 차이와 같은 문제는 우주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게 느껴진다.

알랭 드 보통과 함께한 청춘콘서트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2017년도 2016년과 다름없이 우리는 불안할 것이다. 새해가 시작했다. 알랭 드 보통을 만나 조금은 위로받아보는 건 어떨까?


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은행나무(2011)


태그:#불안, #알랭드보통, #알랭 드 보통, #정영목,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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