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복지제도의 몰인간성을 그린 영화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복지제도의 몰인간성을 그린 영화다. ⓒ 영화사 진진


인간은 선량한가. 따뜻한가. 학창시절 암기했던 '성선설'을 묻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웃이 고통에 직면했을 때 그를 도울 수 있을까.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내 것이라고 여길 공감 능력이 있을까. 몇 가지 질문의 답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난삽하지만 분명 답이 나오는 질문도 있다. 이웃이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우리의 선함은 점점 약화됐다. 미디어에서 관습적으로 나오는 서술어는 분명 '각박하다'였다. 해당 진술의 엄밀성을 떠나, 많은 이들이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졌다고 볼 수 있다. 각박함이 만연하니 미디어가 계속 떠든다.

왜일까. 혹자들은 뭉뚱그려 사회가 고도화됐기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어떤 고도화이기에.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제도를 고발한다. 우리가 선량하지 못한 것도 어쩌면 제도 때문일지 모른다. 특히 인간답게 살기 위한 복지제도가 그 첨병인 것은 아이러니하다.

제도가 선량한 이웃들을 사라지게 했나?

40년간 목수로 지내온 다니엘은 심장병에 걸렸다. 담당의는 그에게 업무를 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영국이 복지정책이라고 내세운' 질병 급여를 받지 못한다. 복지국에서 그를 노동 가능한 상태로 본 것이다. 다니엘은 이에 불복하고 항소를 준비한다. 하지만 복잡한 행정절차 때문에 번번이 실패한다. 전화 상담사 연결에만 2시간이 걸린다. 당국은 '연필 시대' 사람인 그에게 인터넷을 강요한다. 항소를 준비하며 궁여지책 구직급여를 신청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력서 작성 특강과 구직 증명시간 제출이었다. 일반인이라면 포기했을 법할 지난한 행정절차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주변엔 '선량한' 이웃이 있었기 때문이다. 옆집에 사는 청년인 차이 나는 다니엘의 항고서를 작성해준다. 관공서의 직원인 앤은 컴퓨터 앞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다니엘을 돕는다. 그를 평소에 알든 알지 않았든 그의 이웃은 그를 도왔다. 항고서 신고 절차를 도왔고, 그의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돈이 없어 뉴캐슬에 쫓기듯 이주 온 미혼모 가족을 정성껏 보살피는 다니엘, 그 자신처럼 말이다. 말 그대로 인간다웠다.

그러나 제도는 인간을 용납하지 않았다. 앤은 다니엘을 도왔다는 이유로 상사에게 "안 좋은 선례를 남기면 안 된다"며 혼났다. 관공서 소속 의사는 심장이 안 좋은 다니엘에게 관련된 질환에 관해 묻지 않고 그저 "팔을 올려보라" "어깨를 돌려봐라"식의 매뉴얼대로 절차를 진행했다. 그러고는 심장 질환은 문제없다는 소견을 냈다. 전화 상담사는 인터넷을 하지 못하는 다니엘에게 온라인 항고서를 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당국의 매뉴얼은 가난한 사람에게 수치심만 안겨주는, 비인간적인 결과만 낳았다.

제도는 합리화의 산물이다. 일정 수준의 규격화를 통해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그런데 이러한 효율성은 막스베버가 지적한 대로 인간성이 탈각된 '영혼 없는 전문가'를 탄생시켰다. 인간답게 살자는 복지제도는 있으나 그 안에 '삶'을 사는 인간이 없는 모순인 셈이다.

비인간성은 제도뿐만 아니다. 합리성, 효율성 따위가 삶을 지배하는 순간 인간은 온데간데없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좀 더 빠르게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 그 와중에 불필요한 부분은 자연스럽게 소거되는데, 애석하게도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보여준 면모일 것이다. 돈을 버는 자연스러운 행위도 과도한 경쟁 때문에 비인간적이어야만 달성할 수 있다. 사례를 따지기에도 셀 수 없지만 어쨌든 우리는 '각박'해졌다.

 다니엘은 심장병을 앓았지만 복지혜택에 반려당했다.

다니엘은 심장병을 앓았지만 복지혜택에 반려당했다. ⓒ 영화사 진진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는 비인간성뿐만 아니라 복지제도에도 있다. 단순히 '실업급여' '질병급여'의 유무를 떠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어떤 복지' 여야하는 것 말이다.

2년 전이었다. 가난이 지긋지긋했다. 이 정도 가난이라면 우리 가족은 분명 뭐가 됐든 복지 대상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우리 집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다. 나는 엄마를 다그쳤다. 엄마는 내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시에 나는 그 얘기가 뭔지 몰랐다.

몇 번의 다그침이 지나서야 나는 내 발로 우장산동 동사무소를 찾아갔다. 참을 수 있는 번호표를 받고 얼마간의 기다림을 지나 나는 우리 가족이 받을 수 있는 복지혜택에 관해 물었다. 그런데 정답은 자판기처럼 나오지 않았다. 나는 부양의무제에 대해 공부를 해야 했고, 외국에 나간 누나가 돌아오지 않을 거란 것을 증명해야 했다. 산발적으로 이런저런 제도가 많았는데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공무원은 나에게 내가 받을 수 있는 복지 혜택을 알아온 뒤 본인에게 요구하라고 말했다. 나는 씩씩댔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지나고 나서야 재산을 산정하는 몇 가지 이상한 기준 때문에 우리 집은 어떠한 혜택도 받을 수 없었다. 나는 당장 굶어 죽을 것만 같았는데 말이다.

아, 하나 더. 나는 동사무소에 갔을 때 참 쪽팔렸다. 영국과 같이 문전박대는 아니었지만 이미 동사무소 직원과 나의 관계는 뭔가 부탁하고 들어주는 상하 관계가 된 것이다.

좋은 복지란 뭘까. 정치권에서 오가는 복지 논의를 보면 한심할 때가 많다. 그들은 얼마의 돈을 더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집중한다. 그러나 좋은 복지는 얼마의 돈이 아닌, 내가 그 돈을 받기 위해 노력을 들이지 않아야 한다. 약간의 복지혜택을 얻기 위해 행정절차에 들이는 비용이 복지 혜택을 넘어서는 바보 같은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내 재산을 검증하고 셀 수 없는 서류를 떼야 하고 계속 가난을 증명하는 과정 말이다.

더 중요한 지점은 이러한 행정절차가 인간의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면 안 된다. 본인이 복지 혜택을 신청하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수혜자와 지급자로 나누어진다. 우리는 동일한 권리를 가진 인간이지만 1류 인간과 2류 인간 따위에 구분이 지워지는 셈이다. 해당 과정이 더 길어지고 기회비용이 커지면 인간다움은 더더욱 사라진다. 나는 그 기회비용만큼의 재화를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수치심을 느끼는 생명체다. 관공서에서 모진 수모를 당한 다니엘은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라고 소리친다.

국가는 국민의 최소한 인간다움을 보장하기 위해 복지제도를 설계했다. 잊어서는 안 된다.

 다니엘은 벽에 I,Daniel Blake를 그렸다. 그는 "나는 요구합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라고 소리쳤다.

다니엘은 벽에 I,Daniel Blake를 그렸다. 그는 "나는 요구합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라고 소리쳤다. ⓒ 영화사 진진


내 주변 '몰인간성'에 손가락질하자

올해 80살인 노장 켄 로치 감독의 메시지는 언제나 분명하다. 마치 좋은 기사처럼, 하나의 '야마(주제)'를 향해 달려간다. 파편적인 메시지가 뒤섞여 다양한 해석을 기다리는 소위 '힙'한 영화들과는 다르다. 언제나 그는 하층민과 노동자를 대변했고 그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소리쳤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다니엘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다니엘은 제도가 짓누르는 비인간적인 태도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뜻이 관철될 때까지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제도를 뚫고 나오는 초인도 아니다. 다니엘은 "나는 요구합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라고 강변한다.

결국 그는 자신을 거부한 복지 당국 건물 벽에 이 영화의 제목인 'I, Daniel Blake'를 적는다. 합리성을 운운하는 행정 절차 앞에서 고작 서류로 존재하는 '것'이 사실은 홀로 존립하는 'I'라는 존재이고 그 이름은 고유명사인 '다니엘 블레이크'라고 말이다. 우리는 과거에도 인간이었고, 지금에도 인간이어야 한다는 점. 그렇기에 권리를 가져야 하고 투쟁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것, 켄로치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는 법'이다.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논문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진지하게 영화는 사회운동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복제된 예술인 영화에는 아우라가 없기에 인민들은 작품과 거리를 둔 채 팔짱을 끼고 손가락질을 하며 영화 비평을 할 것이고, 영화 비평은 나아가 사회 비평이 될 거라고 말이다. 나는 팔짱을 끼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봤다. 내가 겪는 몰인간성과 복지제도의 문제가 보였다. 이제 팔짱을 풀고 사회를 향해 손가락질할 시간만이 남았다.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웃을지도 모르겠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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