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기자의 말] '내 저울의 추'
기자가 이 연재의 기사를 쓰면서 가장 고심한 부분은 '내 저울의 추'에 대한 문제다. 곧 나의 지난 삶과 언저리 일들을 얼마나 정직하게 쓸 수 있을까?하는 물음이다. 정직하지 않는 기록, 진실을 말하지 않는 기록은 별 의미가 없는 기록이다.

10여 년 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만난 재미 사학자 이도영 박사를 만났을 때다. 제주 섬 소년이 민간인 학살 추적자가 된 사연을 물었다.

"해방 후 일련의 양민 학살사건 진상이 한 번도 제대로 규명 되지 않았기 때문에 5·18 광주시민 학살과 같은 비참한 역사가 되풀이 되었습니다. 5·18 민주화 묘역 역사전시관에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도영 박사는 "굽은 손으로 남을 가리킬 수 없다"라는 말씀을 했다.

나는 오늘 이 기사를 쓰면서 문득 고인이 된 그분의 말씀이 되새겨진다. 옷깃을 여미면서 나의 다음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섯메에서 만난 사람

교사 초년시절 오산에서 3년 동안 열심히 근무했고, 좋은 학생들과 훌륭한 여러 선배 선생님을 만났다. 제자들의 이야기는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로 이미 여러 번 소개한 바 있다. 이번 기사에서는 오산학교 교주 남강 이승훈 선생님과 나동성 교장 선생님의 단면을 소개한다.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하여 쓰게 하라."
남강 이승훈 선생
 남강 이승훈 선생
ⓒ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오산중고등학교 각 교실마다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의 사진과 함께 게시된 남강의 유훈(遺訓)이다.

나는 중학교 시절 민족시인 소월 김정식(金廷湜)  읽으면서 오산학교를 알게 되었다.

소월의 요람이었던 오산학교, 그의 스승 안서 김억(金億), 횡보 염상섭(廉想涉)이 교단을 지켰고, 독립운동가 시당 여준(呂準)이 독립사상을 고취시켰고, JMS 고당 조만식(曺晩植) 선생이 교장이었던 평북 정주의 다섯메 동산.

나는 그 오산학교를 꿈의 동산으로 동경했다. 그런 가운데 천만 뜻밖에도 그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꼬박 3년을 봉직한 뒤 떠나게 됐다.

내가 봉직한 오산중학교는 평북 정주 오산학교 졸업생들이 남강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서울에 재건한 오산학교다.

오산학교 창업 교주 남강 이승훈 선생은 1930년에 돌아가셨기에 나는 그 어른 생전에 만나 뵐 수는 없었지만 오산학교에서 봉직하는 동안 졸업생들의 회고담을 통하여 문헌으로 그분을 간접으로 만날 수 있었다.

남강 선생은 입지전적 인물로 당신의 몸과 넋을 오산학교와 이 겨레의 제단에 바친 분이시다. 선생은 구한말 어려운 시기에 가난한 환경 속에서 자랐지만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했다.

소년시절 유기점 사환으로 장사를 배운 후 보부상으로 자립하여 마침내 큰 무역상으로 한때 전국의 경제권을 지배하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나라의 국권을 잃게 되자, 선생은 생업을 접고 고향 정주에서 은거생활 중 마침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연설을 듣게 되었다. 선생은 도산의 말씀에 크게 깨우쳐 구국교육(救國敎育)의 깃발을 치켜들고 오산학교를 인수 설립해 나라를 구하고자 인재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제자의 장래를 열어주다

선생은 신민회 사건을 비롯해서 숱한 옥고에도 굴하지 않고, 일관된 구국의 길을 걸었다. 기미년 3·1 독립만세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분연히 일어났다. 선생은 많은 지식과 경륜을 쌓고도 항상 입버릇처럼 "나는 무식해, 나는 무식해"라고 말씀하면서 당신은 교주이면서도 오산학교 변소나 푸시고 운동장 풀이나 뽑았다.

학교 살림이 궁핍해 보수를 못해 교실에 빗물이 스며들자 당신 집 기왓장을 벗겨다 갈아 끼우고, 교사들이 봉급 지불이 곤란하자 문전옥답을 팔거나 곳간 쌀을 퍼내 충당케 했다. 선생은 오산학교 교장은 당신이 한 번도 맡지 않고 다른 분에게 사양했지만, 학생들의 장래 문제에는 남다른 관심으로 지도하였다.

옛 오산 졸업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생들이 졸업할 무렵에는 당신 사랑으로 초대하여 함께 밤을 지내면서 그들의 장래를 열어주었는데, 선생은 학생들에게 교사, 목사, 의사, 변호사가 되기를 권했다.

교사가 되어 이 땅에 우매한 젊은이를 깨우쳐 장차 조국 독립의 힘을 기르게 하고, 목사가 되어 어리석은 민중의 길잡이가 되게 하고, 의사가 되어 병마에 시달리는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들어주게 하고, 변호사가 되어 억울한 동포 편에서 그들의 대변자가 되도록 독려했다고 한다.

개천절과 '남강탄신일'

오산학교에서는 지금도 10월 3일 개천절을 '남강탄신일'로 기념하는 바, 그 연유는 다음과 같다.

선생의 실제 탄신일은 3월 25일(음력 2월 18일)이다. 일제 때 개천절 기념식은 가져야겠고 그렇다고 버젓이 개천절 기념식을 할 수 없어 선생은 묘안을 냈다.

"학교가 지저분하니 대청소를 합시다."

그날은 수업을 전폐하고 학생들과 학교 주변 청소, 마을의 도로 보수, 대민 봉사로 하루를 보낸 후 교직원을 댁으로 초대했다.

"오늘은 내 생일날이니 우리 집에 오셔서 식사나 합시다."

이러한 행사가 해마다 거듭되어 개천절이 선생의 탄신일이 되었다고 한다.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게 된 것도 선생의 힘이 컸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육당 최남선이 초안한 독립선언서를 보면서 서명 순서로 난항을 거듭할 때였다.

"순서는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아무를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

이 한 마디에 그만 순서 이야기는 쑥 들어갔다고 한다.

오산 출신들은 한결같이 오산정신을 부르짖는다. 오산정신은 곧 남강정신으로 곧 민족애라 하겠다. 그런 영향으로 오산학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시인 김소월·백석, 종교인 함석헌·주기철·한경직, 사학자 김도태, 화가 이중섭, 독립투사 최용건·김홍일 ….

남강 선생은 당신 유해마저 학생들에게 이 민족에게 바쳤다. 그러나 당신의 혼을 두려워했던 일제의 제지로 유해는 비록 땅에 묻혔지만, 당신의 애국 애족의 높으신 정신은 눈 뜬 자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나동성 교장선생님

나동성 전 오산중고등학교장
 나동성 전 오산중고등학교장
ⓒ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오산학교 재직시절 수업시간 중 판서를 한 다음 학생들이 필기하는 동안 잠시 창밖을 내다보면 나동성(羅東星) 교장선생님은 운동화를 신고, 잠바차림에 밀짚모자를 쓰시고 교정의 곳곳을 돌면서 화단을 가꾸고, 정원수에 가위질을 하거나 물이나 거름을 줬다.

하루이틀이 아니고 늘 그랬다. 화장실에 가면 교장선생님은 집게를 들고 다니면서 학생 화장실 변기 막힌 것을 뚫고 있었다.

지난날 남강 이승훈 선생이 늘 학교 운동장의 풀을 뽑고 변소를 펐다는 고사를 당신은 몸소 실천했다.

어느 날 서무실에 들렀을 때, 서무과 직원과 선생님들 간에 보충수업비 남은 돈 문제로 옥신각신한 것을 교장선생님이 지나치다 보고 한 말씀했다.

"우리 교육자가 이런 돈을 꼭 챙겨야겠습니까?"

어느 한 선생도 대꾸를 못하고 자리를 떴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水至淸則無魚)"는 말씀처럼, 선생님은 너무 꼬장꼬장해서 그것이 일부 선생들의 불평이었고, 그래서 적도 많았다.

어느 날 내가 숙직을 하고 새벽에 일어났을 때, 선생님은 벌써 출근했다. 4천여 학생과 교직원 중 제1착이었다. 서무 직원의 말을 빌리면 매일 그렇다고 했다. 선생님의 자택은 서울 시내도 아닌 경기도 광주인데도 말이다.

선생님은 재단에서 마련해 준 승용차도 거절했다. 4천여 명의 학생, 더욱이 중고 교장을 겸임한 대식구의 장이었건만 승용차 구입비와 운영비로 도서 구입을 하겠다고 사양했다. 물산장려 운동을 주도했던 전 교장 조만식 선생의 얼을 몸소 실천했다.

이런 겉모습만으로도 선생님은 훌륭한 교육자였다. 내 가슴이 뭉클하도록 감명을 준 것은 선생님 댁을 몇 차례 방문해서 사생활을 엿본 때문이다.

존경받는 스승과 사랑 받는 제자

첫 번째 방문은 낙산 시민아파트에 사실 때였다. 십여 평 시민아파트에 옹색하게 사신 것을 보고 놀랐다. 그 후 경기도 광주 선린협동촌으로 이사하여 양계하는 곳을 찾았을 때 점심 밥상을 보고 다시 놀랐다.

사모님이 "찬이 없어 어쩌죠"라는 의례 인사와 함께 선생님과 겸상으로 내온 점심 밥상은 보리밥에 김치, 손수 텃밭에다 가꾸셨다는 상추쌈, 그리고 계란부침이 전부였다. 허름한 판잣집 같은데서 수천 수의 양계와 밭농사를 지었는데 내외 분 모습은 여느 촌부나 다름이 없었다.

"나동성 교장선생님 같은 분이 대한민국에 일 할만 계셔도 오늘 우리 교육계의 권위가 이렇게 추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교장 선생님을 곁에서 지켜본 어느 학부모님의 말씀이었다.

"존경받는 스승 되고 사랑 받는 제자 되게 정성 다합시다."

나동성 교장 선생님이 행동지표를 내세운 말씀이다. 오늘 우리 교육계 현안들은 이 말씀대로만 실천한다면 모든 게 다 해결되리라 본다.

1970년대 중동고등학교 교사
 1970년대 중동고등학교 교사
ⓒ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눈앞이 먹먹하다

나는 1975학년도 신학기부터 다섯메 오산학교를 떠나 모교 중동고등학교로 갔다. 모교를 졸업한지 꼭 10년 만이었다. 부임 후 교무실 분위기가 왠지 냉랭하고 서먹서먹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새 얼굴들이 많았다. 우선 재단 이사장부터 바뀌었다.

고1 때 가난한 고학생을 챙겨주시던 아버지 같았던 이종우 담임선생님은 그새 학교를 떠났고, 고2 때 김준모 담임선생님은 중학교로, 고2, 3학년 때 국어를 가르쳐주신 유인석 선생님도 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서예가 하촌 유인식 선생 연하장
 서예가 하촌 유인식 선생 연하장
ⓒ 박도

관련사진보기

내가 가장 존경하고 내 인생관에 영향을 많이 주었던 홍준수 사회선생님은 그새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부임 후 비는 시간에 같은 구내에 있는 중학교 유인식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명문 오산학교에서 왜 이 학교로 왔는가?"

그날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얘기는 내 귀를 의심케 했다. 당시 모교에서는 재정난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10호봉 이상(당시는 현재 호봉체계와 달리 1호봉이 가장 높았음) 고호봉 교사는 10호봉을 상한선으로 봉급을 동결해 지불한다는 것과 재단에서는 나이든 교사를 쫓아내고자 중학교로 야간으로 뱅뱅 돌린다는 등, 새 재단 이사장의 학교운영에 대한 불만은 거의 폭발적이었다.

"선대 교주 백농(白儂)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에 반대 하는 등, 중동 학생들에게 반일사상을 고취했다는 죄목으로 이산 김광섭(金珖燮) 선생이 3년여 동안 옥살이를 하고 나오자, 그 기간도 봉급을 챙겨 주셨다는데, 그 아들은 나라에서 주라는 봉급조차도 깎아준다."

그런 말씀과 함께 선생님은 아이들이 대학을 다니는 한창 학비가 많이 든 때로 그즈음에는 고령으로 다른 학교도 갈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어쩔 수 없이 근무하고 있다는 하소연에 마치 내가 본의 아니게 선생님을 중학교로 밀어낸 것 같아 몹시 괴로웠다. 중학교에 있는 다른 낯익은 선생님들을 뵙자 그분들도 그늘진 얼굴로 매우 불편해 보였다.  

그런저런 사정을 알지 못했던 나는 그저 눈앞이 먹먹했다.

(*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박도 지음 실록소설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이 시중 서점에서 절찬리 판매되고 있습니다(눈빛출판사 / 1만3000원).



태그:#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