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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세 번째 사과가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두 번째 사과까지는 그럭저럭 이해할 만했다. 첫 '95초 사과'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인의 대국민 사과가 '잘할 때까지' 계속 기회를 주는 영화 촬영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실제로 촬영해 방송함으로써 '녹화사과'라는 비난을 받기는 했다.

무엇보다 첫 번째 사과는 함량 미달이었다. '긴급 대국민 사과'라는 이름과 달리, 상황의 중대성에 걸맞은 내용이 전혀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긴급'이 긴급히 마치고 자리는 뜬다는 의미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비록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부분이 고전의 반열에 즉각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는 했으나, 두 번째 사과는 상대적으로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검찰은 어떠한 것에도 구애받지 말고 명명백백하게 진실을 밝히고 이를 토대로 엄정한 사법처리"를 하라는 지시에, 대통령 자신이 "이번 일의 진상과 책임을 규명하는데 있어서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약속, 그리고 "검찰의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각오"까지.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제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제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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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박 대통령의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새롭게 '9분 사과'가 나오기 전까지, 검찰이 대통령을 직접 수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청와대를 압박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새누리당 내에서조차 검찰 수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가던 참이었다.

하지만 검찰 수사와 사법처리에 대한 약속이 대통령 입 밖으로 나온 이상, 더는 말이 필요 없었다. 이제 '진상과 책임을 규명'하기 위해 '검찰의 조사에 성실하게 임하는' 행동만이 남았을 뿐이며, 그 수사 결과에 따라 책임을 지는 또 다른 행동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러나 2차 사과가 나온 뒤 채 보름도 안 된 11월  20일, 대통령은 검찰의 수사를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그가 변호인인 유영하 변호사를 통해 밝힌 내용은 '검찰의 직접조사 협조에 응하지 않고 특검수사에 대비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수사 거절 사유였다. "검찰이 대통령을 공범으로 기재한 부분을 어느 하나도 인정할 수 없"으며, "검찰 주장만의 증거로 인한 독단적인 사실 인정은 매우 부당할 뿐 아니라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킬 생각조차 없던 약속들

만일 검찰이 대통령이 범죄에 연루된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어떨까? 당연히 대통령은 조사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공범 의혹이 없으면 조사를 안 받아도 되고, 공범 의혹이 있으면 조사를 거부하는 게 '법과 원칙'을 중시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준법의식이다. 결국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검찰 조사 약속은 애초부터 거짓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기억하는가?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특검을 해서 모든 진상을 낱낱이 밝혀내고 엄정하게 처벌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야와 민간이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를 포함한 특별법을 만들 것도 제안합니다."

두 번째 담화와 판박이인 이 사과문은 2014년 세월호 참사 뒤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며 국민에게 다짐했던 약속이다. 이제 모두가 알듯, 그는 모든 약속을 뒤집었다. 그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게 아니라,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탄압했으며, 이 불의에 항거하는 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계속해서 외면하고 회피하는 대통령에게 '세월호 특별법 약속을 지키라'는 요구가 쏟아졌을 때, 그는 이렇게 응수했다.

"법안 마련은 국회가 알아서 할 일이다."

임기 내내 이런 식이었다. 한 해 전인 2013년, 국정원 대선 개입이 드러난 후 국정원 개혁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를 목적으로 대통령 직속기관이 벌인 범죄였다. 당연히 당사자로서도, 대통령 직위에 있는 사람으로서도 나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것은 국회가 논의해서 할 일이다."

대통령의 말, 대통령의 사고 능력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3차 대국민담화 하는 모습을 생중계로 여의도 정치권에서 지켜보고 있다.
▲ 박 대통령 "국회 결정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3차 대국민담화 하는 모습을 생중계로 여의도 정치권에서 지켜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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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근혜 대통령을 국회의원 시절부터 지켜보아 왔지만, 그의 말 가운데 기억 나는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퉁퉁 불어터진 국수,' '손톱 및 가시,' '원수이자 암덩어리' 같은 괴이한 비유를 제외하면, 그 가짓수는 훨씬 줄어든다.

후보시절, 정책이나 대안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언제나 '잘 준비해서'나 '원칙대로 잘 해서'였다. 대통령이 된 후에는 '국회가 알아서 할 일' 아니면 '여야가 합의해서 처리할 문제' 이 두 마디로 모든 사태를 평정했다.

도저히 나올 수 없던 세 번째 사과가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거취도 "여야가 합의해서 처리할 문제"라는 것이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는 "사실상의 하야 선언"이라고 말했고, 이정현 당대표는 "대통령이 임기에 대해 완전히 내려놓기로 했다"며 "못 들었나, 그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느냐"고 추임새를 넣었다.

대통령의 말 뜻을 누가 못 알아듣겠는가.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사람이 모호하기 짝이 없는 조건을 내걸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정현은 박 대통령이 검찰 수사 거부 의사를 밝힌 바로 그 날에도 "거부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던 사람이다. 안 그래도 생각이 흐린 대통령이, 이처럼 생각이 뒤죽박죽인 측근에 둘러싸여 있으니 바른 판단이 나올 도리가 없다.

국회에서 합의를 보라고? 국회는 국민들을 대표하고 국민들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뜻은 무엇인가? 물러 나라는 것이다. 그것도 하루 속히. 백 만이 넘는 국민이 청와대 코 앞에서 외치는 데도 알아듣지 못하는 귀가 어떤 말을 듣겠는가?

박근혜는 '나쁜 대통령'이 아니다

도저히 나올 수 없던 '3차 사과'에서, 박대통령은 '국민'이라는 말을 무려 아홉 번이나 반복했다. 그의 머릿속에 든 '국민'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4년 연임제 개헌을 언급했을 때에도 박근혜는 '국민'을 입에 올렸다. "참 나쁜 대통령"을 만난 탓에 "국민이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대통령 눈에는 선거밖에 안보이느냐. 대선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개헌 논의를 하면 블랙홀처럼 모든 문제가 빨려 들어갈 수 있다."

1월에 개헌 논의를 하면 '불행한 국민'을 만드는 '나쁜 대통령'이 되지만, 12월까지는 괜찮다는 말일까? 박근혜는 노무현을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비난했지만, 그 비난을 되돌려주는 것은 옳지 않아 보인다. 대다수 국민들은 그를 더 이상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태그:#박근혜, #개헌, #이정현, #탄핵,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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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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