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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26일), 다시 서울행 KTX에 오른다. 주말 부부도 아니고, 서울에 출장 가는 것도 아니다. 처가가 서울에 있지만, 명절 두 번 포함해서 일 년에 기껏해야 대여섯 번 쯤 밟는 곳이 서울 땅이다. 그런 낯설기만 한 도시에 한 달 동안 벌써 세 번째 상경이다. 누가 서울역 광장에 꿀이라도 발라놨단 말인가?

짐작들 하셨겠지만, 나의 상경 목적은 하나,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압력이나 회유, 겁박, 금품 제공 등의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1차 총궐기가 있었던 10월 29일 청계광장에 모인 2만의 군중 속에 있었고, 지난 11월 12일 광화문의 100만 군중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이를 그래프로 그려보고 통계학적으로 예측해보니, 이번 26일 집회에 내가 참석하면 200만이 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짐을 꾸렸다.

사실 좀 피곤했다. 잿빛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발을 보니 발걸음이 눅눅해졌다. 또한, 이번 주는 아이를 봐야하는 상황이기에 집회 참여를 자발적으로 희망한 7살 둘째 아이가 동행한다. 신발 밑창이 무쇠 통굽으로 바뀐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내가 빠지면 200만 대오가 흐트러질 게 분명하다, 라는 시대적 사명감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벌써부터 집회의 열기가 전해져 온다. 여기서부터 시작이구나! 전국에서 상경한 촛불 동지들을 환영하는 군중들이 서울역으로 마중을 나온 것이다! 시간은 때 이른 오후 3시였지만 우리는 기꺼이 LED 촛불을 밝혔다.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에워싸고 구호를 외치는 분들에게 답례로 촛불을 흔들어주었다.

아! 그런데 무언가 구호의 내용과 피켓의 문구가 이국적이다. 물론 개중에는 서울역의 오랜 벗인 '예수천국 불신지옥' 피켓도 눈에 띄었지만, 대다수의 피켓에는 '하야 반대', '대한민국 수호' 등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제야 그분들이 바로 그 유명한 맞불집회 전용 어르신들이라는 현실 인식을 하게 되었다.

촛불을 더욱 세차게 흔들었다. 인증 촬영이라도 할까 싶었으나, 괜히 엄한 곳에 카메라 배터리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속 썩이던 자식과 말썽꾸러기 손주들에게 비리와 불법으로 얼룩진 헬조선을 수호하여 고스란히 물려주고자 하는 그분들의 마지막 통쾌한 복수극 외에 다른 상상을 할 수가 없다. 성장기 어린이를 유해한 환경에 오래 두는 건 바람직하지 않기에 서둘러 광화문으로 발길을 돌렸다.

"여기 환자있어요" 인파 속에서 본 놀라운 광경

유치원 선생님께 자랑스럽게 광화문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왔다는 둘째 아들 녀석. 몇 시간을 걸어야 하는 힘든 일정이었는데 군소리 없이 잘 따라와 주었다.
▲ 광화문 앞에 피켓을 들고 선 둘째 아이 유치원 선생님께 자랑스럽게 광화문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왔다는 둘째 아들 녀석. 몇 시간을 걸어야 하는 힘든 일정이었는데 군소리 없이 잘 따라와 주었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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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고, 이전에 모인 군중들은 이미 청와대 방향으로 1차 행진을 떠나고 있었다. 광화문 앞에서 시청 광장까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많지 않았고 날씨도 생각 이상으로 쌀쌀했기에 좀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과연 2백만이 모일 것인가? 그때까지는 향후 발생할 고립사태에 대해 예측할 수 없었다.

청와대를 둘러싸는 인간 띠 잇기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아이에게 처음 경험해 보는 인파 속 광장의 분위기를 좀 더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아이와 광화문 광장에서 사진을 찍으며 6시 본 집회를 기다렸다. 저승사자 차림으로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들, 핫팩과 초를 무료로 나눠주는 사람들, 손수 하나씩 포장했음직한 초콜릿을 나눠주는 시민들. 이건 마치 지역별로 진행하는 무슨 축제와 흡사했다.

조금씩 어둠이 깔리고, 청와대를 향했던 행진부대가 되돌아옴과 동시에 이후에 도착한 시민들도 하나씩 무대를 바라보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집회의 열기가 후끈 달아오를 것이었다. 하지만, 유치원생 아이의 체력적 한계를 고려하여 내려가는 기차표를 조금 일찍 예매했다. 안치환씨의 공연을 끝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문제는 시청역 방향으로 사람들이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직 여섯시가 안 된 시각인데,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켜고 있다.
▲ 마침내 촛불을 켜다 아직 여섯시가 안 된 시각인데,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켜고 있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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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시 본 집회가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광화문 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시민들과 시청역 쪽으로 나가려는 시민들이 뒤엉켜 정체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부터 40여 분, 세종대왕 상 앞에서 시청역 3번 출구까지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위에서 사투가 시작되었다. 집회에 참가하려는 자와 집으로 가야하는 자의 숨 막히는 이동전. 7살짜리 꼬마 위로 혹시나 사람들이 밀려 쓰러지지는 않을까 장단지에 최대한 힘을 주고 조금씩 이동했다.

정말 대단한 건 내가 느끼기에도 좀 짜증이 나는 상황인데, 시민들은 침착하게 행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누구 하나 소리 지르거나 신경질 내는 사람이 없었다. 한치 앞 발 디딜 곳 없이 그저 밀려가는 상황이었는데도, 누군가의 "환자가 있어요!" 라는 말 한마디에 모세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비단 나만 확인한 것이 아니었다. 분노는 하였으되 절대 흥분하지 않고 민주적인 집회를 사수해 가겠다는 일반 시민들의 성숙한 의식이 엿보이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인파를 헤치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사실 내가 광화문 광장에 가서 크게 한일은 없다. 인간 띠로 청와대를 압박한 것도 아니고, 밤늦게까지 광장을 지키며 촛불 파도타기에 동참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소 대신 7살짜리 애를 한명 데리고 올라간 거다. 지방에서 광화문 광장에 갔다가 서너 시간 집회에 참여하고 구호 좀 외치다 다시 기차를 타고 내려온, 주최 측에서 보면 단순히 스쳐간 촛불 하나(혹은 반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를 일상으로 돌려보내 달라

6시 이전에 이미 무대 앞쪽에서 세종대왕 상까지는 군중으로 꽉 찼다
▲ 해가 떨어지기 직전의 광화문 광장 6시 이전에 이미 무대 앞쪽에서 세종대왕 상까지는 군중으로 꽉 찼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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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내가 계속 집회에 참가하는 이유는 나의 분노가 삭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내려와야 하는 수천가지 원인은 나를 1차적으로 분노케 해서 광화문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집회에 참가하면서 느끼는 2차적 분노는 나를 지속적으로 집회로 끌어내는 무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2차적 분노의 원인을 살펴보자.

첫째, 박근혜 대통령은 가정의 주말을 유린했다. 주말만 되면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거나 도서관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단란한 가정의 타임 스케줄을 송두리째 뒤엎었다. 아빠와 놀고 싶어 하는 어린 자식들을 떼어 놓고 아비는 서울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아이를 동반하면 이번처럼 서너 시간 밖에 머물지 못한다. 이제 우리 가족은 주말을 앞두고 여행 정보를 검색하는 대신, 광화문 광장의 화장실 위치를 체크하고 있다.

둘째, 박근혜 대통령은 가정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성인 1명 기준으로 서울까지(김천구미역 출발) KTX 왕복 비용은 7만 원이다. 역 주차장에 주차하면 주차비만 7천 원, 밥 사먹고 어쩌고 하다보면 10만 원 가까운 경비가 필요하다. 4인 가족 기준으로 볼 때 최소 25만 원이 든다. 온 가족이 소고기를 배터지게 먹고도 남는 돈이다. 앞으로 우리 가족은 상경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외식을 한 번 줄일 예정이다.

셋째, 마지막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열심히 일하는 가장의 심신을 지치고 병들게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웃다가 슬프다가 화나는 일이 반복되면서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주말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광화문으로 올라가게 만들어 간과 장기에 굉장한 무리가 가고 있다. 지금쯤 우리 가족은 가장의 건강을 위해 보험을 하나 더 설계중일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이유로 나는 늘 분노 상태다. 그러니 이제 나를 일상으로 돌려보내 달라. 그 유일한 길은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하는 것뿐이다. 행여 내가 제풀에 지쳐 포기하거나 쓰러질 것이라는 착각은 금물이다. 지금까지 투자한 시간과 경비와 심신이 아까워서라도 당신이 내려오는 결과를 보고 말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여! 마지막 지혜를 쥐어짜내어 현명한 선택을 하기 바란다. 모든 국민이 기다리고 있다.


태그:#박근혜퇴진, #광화문촛불집회, #민중총궐기, #박근혜대통령,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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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비선실세' 최순실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좋은 기자'가 된다고 믿습니다. 오마이뉴스 정치부에디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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