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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과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8월 11일 낮 청와대에서 열린 새누리당의 지도부 초청 오찬에서 악수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8월 11일 낮 청와대에서 열린 새누리당의 지도부 초청 오찬에서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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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새누리당 대표실 앞에는 여당 원외당협위원장 5명이 '이정현 대표 사퇴'를 요구하는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김재수 농림장관 해임안 처리에 항의하는 이 대표의 단식은 1주일 만에 중단됐지만, 이들은 22일 현재 열흘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20대 총선 패배 이후에도 어지간하면 30%대를 유지하던 새누리당의 지지율은 최순실 게이트가 정국을 강타하자 11월 들어서 20% 벽이 무너지더니 급기야 15%까지 떨어졌다(한국갤럽 주간 정례조사, 전국 성인남녀 1천7명 대상, 15~17일,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국정파탄의 몸통으로 지목받는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도 3주 연속 5%에 머물고 있다. 극적인 사태 반전이 없는 한 이대로 가면 여당은 대통령과 함께 침몰해 재기의 기회를 영영 잃게 될 지도 모른다(여당 소속 경기지사와 서울지역 의원 1명은 보다못해 22일 탈당했다).

이정현 의원의 지역구인 전남 순천에서는 지난 19일 4000여 명의 시민이 모여 촛불을 들었다. 그날 현장에서 '박근혜 퇴진'만큼 많이 나온 구호가 '이정현도 퇴진하라'였다. 이 대표를 두 번이나 국회의원에 당선시킨 지역이지만, 이 분노의 민심을 다독이지 못하면 정치인 이정현의 미래도 기약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대통령을 버릴 수 없다"고 말한다. 21일 당내 비주류(비박)가 제출한 대통령 징계안도 그의 최종결재가 없으면 통과될 수가 없다. 당내에서는 "이정현 같은 간신 때문에 당도 대통령도 다 망했다"는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이정현 대표는 무엇으로 버티는가?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대목이다.

당대표가 되기 전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해준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 당시 인터뷰에는 쓰지 않았지만, 최근의 상황에 더 어울릴 내용이라서 소개하면 이렇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비례대표 마지막 순번(22번)으로 국회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의원회관에 혼자 앉아있는 그에게 전화가 왔다. 12년 만에 국회에 돌아온 박지원 의원(현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이었다.

이 대표와 술에 약간 취한 박 의원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

박지원 : 내가 이정현 의원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려고 전화했다.
이정현 : 아이고, 무슨 말씀입니까? 저야 장관님을 잘 알지만 저를 아시나요? 뭐가 고맙다는 것인지?
박지원 : 많은 사람들이 우리 전라도 사람을 배신자라고 하는데, 그리 욕먹는 전두환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 고흥 출신 장세동이고, 김영삼 비서실장 하면 김덕룡이 떠오르고, 김대중 대통령을 지키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나, 박지원이오. 그런데, 요새 TV에 보니 박근혜 의원 지키는 사람이 하나 있길래 누구냐고 주변에 물어보니 전남 곡성 출신 이정현이라고 하더라. 우리 전라도 사람들이 배신자니, 의리 없네 라는 말을 듣지만 이렇게 의리 지키는 사람들은 다 전라도 사람들 아니냐? 그래서 이 의원도 '열심히 하라'고 전화 한 통 한 거요.

지금도 이 대표는 박 위원장을 '장관님'이라고 부른다. 지난 11일 박 위원장이 국회에서 공개한 문자 메시지에서 두 사람 사이에 "장관님 사랑합니다 충성", "나에게 충성 말고 대통령을 잘 모시라"는 식의 적나라한 대화가 오간 것도 둘의 인연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주목할 것은, 이 대표가 인터뷰에서 이 같은 일화를 소개한 맥락이다. 당시 이 대표는 대화 내용을 또렷이 기억하는 이유에 대해 "그때 박 장관이 해준 말이 나의 평소 생각과도 맞닿았다"고 설명했다.

그의 지론은 22일 기자간담회에서도 재확인된다.

"새누리당에서 뽑은 대통령이 박근혜라는 걸 모르는 유권자는 없었을 것이다. 상대방이 힘 없어졌다고 하루아침에 표변해서 등짝 걷어차고 내쫓는 비정한 정치, 배신의 정치, 얄팍한 계산의 정치는 하기 싫다. 그게 잘못됐다고 제게 손가락질하고 비웃고 비난한다고 하면 감내하겠다."

'대통령 지지율 5%'의 시국에서 이 대표의 버티기는 당도 죽이고 자신의 정치생명도 죽이는 최악의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나라 현대사를 보면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도 없다.

최소한의 '의리' 지켜보려는 속내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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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위원장이 언급한 장세동은 전두환 정권 7년 동안 청와대 경호실장과 안전기획부장(국가정보원장의 전신)을 맡은 전두환의 핵심 측근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진짜 인생은 전씨가 권력을 내려놓은 후 시작됐다.

장씨는 1987년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야당 통일민주당 창당을 방해한 사실이 1993년 뒤늦게 드러나며 1년 6개월간 복역했다. 직선제 개헌에 앞장선 야당을 파괴해 전두환의 국정운영을 도우려고 했다는 게 정설이지만, 그는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 그는 1996년에도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돼 이듬해 12월까지 그가 '어른'이라고 부르는 전두환과 함께 수감 생활을 한다.

1988년 5공청문회 자리에서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 법이다. 내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는 한이 있어도 각하가 구속되는 것은 막겠다"고 한 얘기, 1997년 사면 직후 전두환의 집을 방문해 "신고합니다. 각하, 휴가 잘 다녀왔습니다"고 거수경례를 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일세를 풍미했던 '전두환의 사람들'은 1988년 5공청산 정국을 분기점으로 둘로 나뉘었다. 미우나 고우나 전두환에게 충성을 다한 장세동·안현태 그룹과 전두환과의 정치적 단절로 보수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려고 했던 노태우·김윤환 그룹이 있었다.

전자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그들이 모시는 '어른'에 대한 역사적 평가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가 군사쿠데타로 다시 뒤집혀지는 '역사의 반동'이 없는 한 그들에게 내려진 '반역자'의 낙인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뒤늦게나마 전두환을 부정했던 후자들이 인정을 받았는가? 전두환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노태우는 수천억 원대의 비자금을 숨기고 있다가 감옥에 갔다(전두환의 장세동처럼 그에게도 정권 내내 청와대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맡길 정도로 믿었던 심복 이현우가 있었다. 그러나 이씨는 검찰에 스스로 출두해 비자금 존재를 털어놓음으로써 노태우의 무덤을 파게 된다). 유신시절부터 김영삼정부까지 권력의 생리를 잘 이용해 5번이나 국회의원을 한 김윤환씨도 말년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정치인들은 항상 줄타기를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어차피 이래저래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최소한의 일관성이라도 지키는 게 훗날의 재평가를 기대해볼 구석이 있다고 하겠다. 대의명분보다는 '의리'를 더욱 중요한 가치로 숭상하는 일부의 '열광'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대표는 '대통령에 대한 신의'와 보수여당의 운명을 맞바꾸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같다. 돌이켜보니 2004년 박 대통령이 이 대표를 부대변인으로 발탁한 것도, 12년 뒤 그가 박 대통령을 호위하는 새누리당 대표에 당선된 것도 우리 정치사를 가르는 기막힌 운명이었다. 많은 이들은 '결말이 뻔히 보이는 드라마'라고 말하지만, 적어도 이 대표는 거기에 동의할 것같지 않다.


태그:#이정현, #장세동, #최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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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비선실세' 최순실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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