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87년 6월을 뜨겁게 달구었던 구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재 개헌 쟁취"였다. 변형된 유신헌법인 5공 헌법을 사수하겠다는 전두환의 4.13호헌조치는, 역설적이게도 직선제 개헌에 대한 광범위한 대중의 합의를 가능케하였고, 이는 6월항쟁 당시 대중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물론 '직선제 개헌 쟁취'란 당시 상황에서 볼 때 이룩해야 할 '최소한의 과제'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2016년 지금, 광장에 나선 우리는 그때와 달리 '호헌'을 외쳐야 한다. 왜 그런가?

광장의 혁명적 성격을 무력화시키는 개헌 놀음

11월 21일 야 3당은 박근혜 탄핵을 당론으로 정했다. 얼핏 생각하면 청와대와 박근혜가 완강히 버티고 있는 만큼, 박근혜를 대통령 자리에서 퇴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법적 절차인 탄핵으로 돌입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처럼 보인다.

다만 제1야당인 민주당 지도부의 경우 비록 탄핵을 당론으로 정하기는 했으나 즉각적인 탄핵 돌입에는 소극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민주당 지도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으나 반드시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기실 탄핵보다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탄핵정국 이후의 정국'이다. 왜냐면 탄핵은 야당 혹은 국회가 대통령을 퇴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최후의 수단이고,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어 헌법재판소로 넘어갈 경우 정국은 다음 수순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정국은 급속도로 '개헌 정국'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미 새누리당 일각에서도 개헌론이 나온 바 있지만, 오늘(11월 22일)자 <조선일보> 사설의 다음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정치권은 이 위기를 대한민국을 새롭게 바꾸는 기회로 삼는 논의도 시작해야 한다. 이토록 큰 희생을 치르고도 헌법 제도상 화근을 고치지 못하고 또 그냥 넘길 수는 없다. 대통령과 측근들의 농간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도록 권력을 분산하고 여야 간 협치의 문을 열어주는 개헌은 의지만 있으면 탄핵 절차 진행 중에라도 추진할 수 있다.

위의 내용 중 마지막 구절은 현재 보수언론 혹은 보수세력마저 탄핵 정국으로의 돌입을 부추기고 있는 저간의 의도를 잘 말해준다. 즉, 이는 탄핵정국을 거쳐 개헌정국으로 넘어가려는 수순인 것이다. 같은 날 <동아일보> 역시 "'탄핵에 이은 개헌'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손학규 민주당 전 대표는 이날 '동아시아미래재단 창립 10주년 기념토론회'에서 "대통령을 탄핵한 뒤 나라를 어떻게 수습할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개헌은 이제 필연이 됐다"고 강조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종인 민주당 전 비대위 대표, 정세균 국회의장, 정의화 전 국회의장 등 개헌파 인사들이 참석했다"라고 보도했다. 그렇다면 왜 지금 보수언론, 보수세력은 개헌을 외치는 것인가?

그 답은 간단하다. 현재의 헌법체제, 즉 대통령 직선제 및 5년 단임제로는 보수세력의 재집권이 현재로선 요원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저들의 정치적 생존과 장기 집권을 위해 개헌 카드를 꺼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이른바 새누리당 비박계, 이명박 정권, 조선일보를 위시한 보수언론, 재벌, 검찰 역시 우리 사회가 오늘과 같은 구렁텅이에 빠지도록 만든 장본인이자 공범이요, 협조자이자 책임자였다는 점이다.

이제 와서 그들이 박근혜와 친박세력을 버린다고 해서 그들의 책임과 역사적 죄악이 씻겨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저들이 여태까지 이 형편없는 정권을 보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을 고통과 절망에 빠트려왔는지를 생각해보라!

공교롭게도 오늘자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의 제목은 "이제 '박근혜'는 과거다"였다. 마치 저들은 87년 6월항쟁 이후 전두환을 버리고(혹은 징치하고) 3당합당을 통해 자신들이 살아났듯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살아남으려는 듯 하다. 그러나 광장의 민심은 그렇지 않다.

지금 광장의 민심은 단순히 '박근혜 퇴진(=하야)'만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혁명'을 원하고 있다. 오죽하면 10대들도 혁명을 운운할 정도겠는가? 실제 광장에서 시민들이 외치는 구호를 보라. 언론에서는 마치 '박근혜 퇴진'만 외쳐진 것처럼 보도하고 있지만, "새누리당 해체"와 "재벌 해체" 역시 만만찮게 외쳐지고 있는 판이다.

게다가 지금 광장에서 '하야가'와 함께 또 하나의 유행가인 '이게 나라냐?'의 가사를 보라. 그 가사 중에는 "새누리당아 조선일보야 너희도 추악한 공범이 아니더냐? 쇼하지 마라! 속지 않는다! 너희들도 해체해주마!"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게 무슨 의미이겠는가? 이른바 한국의 보수 기득권세력 전체가 현 사태의 범죄자들이며, 이들에 대한 청산까지 이룩되어야 한다는 열망이 아니겠는가?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미래세대에게 물려줄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현 사태는 정부수립 후 친일파 척결에 실패한 역사로부터 4월혁명 공간에서의 미흡한 과거 청산 및 인적 청산과 맞닿아 있다.

단적으로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던 박정희가 정부수립 후 제때에 제대로 단죄받았다면, 그리고 4월혁명으로 열린 공간을 5.16쿠데타로 뒤집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한심한 결과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한마디로 지금 보수세력이 제기하고 있는 '개헌'은, 광장의 민심이 지니고 있는 '혁명적 성격'을 무력화시키고 보수세력의 정권 연장기도와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민주당에 맞서 정권을 쥐려는 '자칭 야당' 국민의당이 이른바 제3지대론을 통해 새누리당 비박계를 받아들이는 식으로 편승하려 하고 있다.

위의 오늘자 <조선일보> 사설에서 언급한 "여야 간 협치의 문을 열어주는 개헌"이 바로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새누리당 비박계로 대표되는 보수세력과 국민의당 간의 야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지금 청와대가 마치 '탄핵을 유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보를 취하는 것도 나머지 보수세력과의 일정한 교감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언컨대 몇몇 정객들의 정치놀음인 개헌과 그로 인한 정계개편은 광장의 민심이 원하는 바도 아니요, 지금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도 아니다.

지금은 '지연된 인적청산'의 적기

지금 광장에 나서거나 광장의 민심에 호응하고 있는 우리 시민들과 의회의 양심적 세력은 현 국면에서 의제주도권을 되찾아와야 한다. 더 이상 '청산의 대상'으로 하여금 정치적, 사회적 의제를 주도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제 시민사회와 진보진영이 본격적으로 의제와 담론을 주도해야 한다. 검찰 수사만 지켜볼 일이 아니다.

검찰의 중간수사결과 발표 이후 언론들은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이 되었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실상 검찰의 기소장에는 현 사태의 공범인 재벌들은 '피해자'로 되어 있다.

이는 자본권력이 정치권력보다 우위에 있는 현 한국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지만, 박근혜와 친박계만 버리고 보수 기득권 세력을 지속시키려는 저들의 의도를 계속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시민사회와 국회의 논의 및 승인을 통해 민간 차원의 진상규명위원회를 설치해 진실 규명에 나서야 한다. 이를 통해 사회 전반에 걸친 '박근혜 게이트' 사건의 광범위한 공범 관계를 밝혀내야 한다. 아울러 '부역행위자명단'을 발간해야 한다. 왜 그런가?

위에서 인용한 <조선일보> 사설에도 나오듯 개헌을 주장하는 보수세력들은 현 사태가 마치 '법과 제도'에 의해 야기된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그러나 현 사태는 '잘못된 헌법' 탓이 아니라 박근혜와 새누리당 등 한국의 보수 기득권 세력이 여태까지 법 위에서 자의적으로 통치한 결과이며, 법을 유린한 결과이다.

현행 법대로 따지면 당연히 박근혜는 범죄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책임은 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박근혜라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제도적 개선이 아닌 '인적 청산'이 우선이며, 이를 통한 역사적 교훈을 후세에 남기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아무리 좋은 법과 제도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준수하려는 의사가 없는 세력이 권력을 잡는다면 소용이 없는 법이다. 역사에서 항상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주체의 탄생'과 함께 열렸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해방 이후 70년 동안 지연된인적 청산 작업에 과감하게 착수해야 한다.

한편, 보수언론은 야당책임론을 제기하며 '현실'과 '향후 과제'를 호도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바 있는 11월 22일자 <조선일보> 사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우려되는 것은 야당의 움직임이다. 야당 일각에서는 탄핵 절차가 지지부진해지고 국정혼란이 이어져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판단도 있다고 한다. 이어질 대통령 선거에서 오히려 유리하다는 것이다. 국민이 이런 야당을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총리 추천을 거부해 탄핵안 가결 시 현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든 것도 야당이다. 탄핵 절차마저 지지부진하게 만들면 국민의 염증은 야당으로도 향할 것이다.

위의 내용은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4.13 총선 이전 이른바 '야당심판론'을 제기하며 자신들의 국정운영 실패를 호도하려 했던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다. 물론 위의 사설에서 말하는 '야당'이란 제1야당인 '민주당'을 가리킨다.

그러나 현 사태의 책임 소재는 누구나 인정하듯 집권자인 박근혜와 집권 세력에게 있으며, 지금은 박근혜가 하야하지 않음으로써 여러 정치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일 뿐이다. 결코 야당 탓을 할 문제가 아니다.

또한 야당이 탄핵을 추진할지라도, 탄핵 이후 정국에 대한 면밀한 구상과 의제의 뒷받침 없이 섣불리 추진하는 것은 광장의 민심과 유리된 결과를 빚을 수 있다. 따라서 지금 야당으로서는 광장과 더불어 박근혜의 하야를 압박할 수 있는 다양한 정치적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야3당 공조도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탄핵이 지연될 수록 국정혼란이 장기화될 수 있다고 우려하지만, 지금 우리사회에 '혼란'이란 전혀 없다. 시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이며 평화적이다. 오직 보수 기득권 세력만이 혼란을 겪고 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금 우리는 '미완의' 1960년 4월혁명, 87년 6월항쟁의 연장선상에서 싸우고 있으며, '87년 체제'의 해체와 파탄에 직면한 것이 아니라 '87년 체제의 완성'을 위한 여정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호헌을 외쳐야 한다.

그리고 '철저 청산'과 '철저 단죄'를 외쳐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현재 한국사회가 당면한 시대적 소명이자 과제일 것이다.


태그:#탄핵 정국, #개헌, #조선일보, #국민의당, #인적 청산
댓글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9,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