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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구한 말, 역대급으로 무능했던 고종의 아내로서 천하를 호령했던 명성황후 - 이하 민자영 - 도 무당을 총애하다 나라를 그르쳤다. '조선의 국모'로 자타가 공인하던 민자영은 총애하던 무당에게  '진령군(眞靈君)'이라는 군호를 내리기까지 했다(관련기사: 130년 전의 최순실, 여자무당 '진령군').

'진실로 영험하다'는 의미인 진령의 다음에 붙은 '군'의 칭호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의정은 기본으로 역임하고 당파를 이끄는 영수로 활약하면서 군왕의 신임까지 돈독해야 비로소 군호를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광대와 더불어 천민의 신분인 무당이, 그것도 여성으로서 군호를 받은 인물은 진령군이 유일무이할 것이다.
 
걸출한 정치 감각으로 안동김씨 일파의 세도정치를 종식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열두 살 먹은 자신의 둘째 아들을 즉위하게 하니 그가 바로 고종이다. 이하응이 왕비를 고를 때 명문 여흥민씨 가문에서 사고무친으로 쇠락한 집안의 민자영을 간택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안동김씨가 국혼(國婚)을 독점하여 조정을 쥐락펴락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던 이하응은 특히 인척의 발호를 경계하였을 것인 바, 사고무친의 민자영은 안성맞춤이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하응이 후회하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민자영은 이름뿐인 국모에 만족할 여성이 아니었다. 고종이 성년이 된 다음에도 이하응이 전권을 행사하자 민자영은 그것을 빌미로 이하응을 공격했다. '왕이 성년이 되었으니 친정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명분을 앞세우자 그동안 은밀히 규합했던 세력들이 일제히 민자영에게 동조했다. 게다가 이하응이 개혁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당했던 구세력까지 합세하자 민자영을 경계하지 않았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1873년이며 고종은 22세였다.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이하응이 양주로 은거한 다음 1874년에 둘째아들 – 첫째아들은 요절했음 – 을 생산한 민자영은 더 이상 본질을 감추려들지 않았다. 친정 민씨 일파를 끌어들인 민자영은 백성을 다독이고 민생을 챙기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백성을 개돼지로 여기고 수탈의 대상으로 밖에 인식하지 않는 자들에 의한 정치는 안동김씨보다 못했다. 기본적인 행정능력도 갖추지 못한 척족들이 나눠먹기 경쟁을 벌이고 매관매직이 당연하게 성행하는데다, 앞다투어 국고를 탕진하는 바람에 민생이 바닥을 쳤다.

그러던 가운데 1882년(고종 19)에 임오군란이 터졌다. 신식군대인 별기군이 양반들의 자제로 편성되어 우대받는 반면 구식군대에 근무하던 군인들은 1년이나 넘게 급여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이전부터 급여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불만이 높아진 상태에서 1년이 지나도록 급여가 밀렸으니 불만이 극에 달했다. 게다가 1개월 분의 급여로 겨우 지급된 쌀마저도 분량이 절반 밖에 되지 않은데다, 모래가 절반이 넘게 섞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극도로 분노한 군인들이 항의하자 민겸호가 군인들의 대표를 처형하였다. 민겸호의 행위는 터지기 직전까지 부푼 풍선에 바늘을 들이댄 것과 같았다.

무기고를 탈취한 군인들이 별기군을 창설하고 교육하던 일본인 교관을 살해하고 공사관까지 공격하는 한편 대궐에 난입하였다. 민자영을 찾는 군인들이 조정의 고관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지는 가운데 민자영은 기적적으로 빠져나왔다. 민자영은 충청도의 장호원으로 피신했고, 이하응은 다시 집권한 다음 중전의 국상(國喪)을 발표하여 민자영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공표했다. 그러나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호원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민자영에게 찾아온 한 무당이 "반드시 권력을 되찾을 수 있다"며 대궐로 돌아가는 날짜까지 예언했다. 당시 분위기에서는 누구도 믿기 어려웠지만 놀랍게도 무당의 예언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청나라 군대에 의해 이하응이 체포되고 군란이 진압되자 세상은 다시 민자영의 소유로 전락했다.

이를 정확하게 예언한 무당은 진령군이란 군호와 함께 무한한 대가를 받게 되었다. 민자영은 인사권은 물론 주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도 때도 진령군의 조언을 따랐으니 진령군은 '비선실세'를 초월하는 실질적인 지배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온갖 이권에 개입하고 청탁을 받는데다, 매관매직까지 서슴지 않는 진령군은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조정의 고관들도 진령군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뇌물을 바치고 의남매를 맺었으며, 심지어 양자로 입적되어 권력을 농단한 자까지 나타났을 정도였다. 진령군의 거처가 대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석영이 백성의 마음을 치료하고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다. 전 형조 참의(前刑曹參議) 지석영(池錫永)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 중략 -  신이 전국의 억만 백성의 입을 대신하여 자세히 진술하겠습니다. 정사를 전횡하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며 백성을 수탈하여 소요를 초래하고 원병(援兵)을 불러들이게 만들며 난이 일어나자 먼저 도망친 간신(奸臣) 민영준(閔泳駿)과 신령의 힘을 빙자하여 임금을 현혹시키고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眞靈君)에 대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합니다.

아! 저들의 극악한 행위가 아주 큰데도 한 사람은 귀양을 보내고 한 사람은 문책하지 않으며 마치 아끼고 비호하는 것처럼 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어찌 풀리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상방검(尙方劍)으로 두 죄인을 주륙하고 머리를 도성문에 달아매도록 명한다면 민심이 비로소 상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숨어있는 우수한 인재를 모두 뽑아서 각각 합당한 직무를 맡기고 협력하여 충성을 바치게 한다면 빠른 시일 내에 나라가 부유하고 군사가 강해질 것입니다." - 하략 -
<조선왕조실록> 고종 31년(1894) 7월 5일 3번째 기사

나라가 온통 결딴나는데도 진령군을 탄핵하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 간관(諫官) 가운데 하나가 진령군을 처벌할 것을 주청했다가 오히려 중형을 당하는 판이었다. 그렇다면 진령군은 실제로 영험한 신통력을 갖추었을까? 물론 아니다. 장호원에 있던 민자영을 찾아간 진령군이 재기를 확신한 것은 계산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예언(?)대로 민자영이 재기하는 날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하응에 의해 죽음을 당할 민자영이 보복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간단한 계산이지만 어지간히 담대하지 않고서는 입에 담기 어렵다.

환궁하는 날짜까지 맞추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당시 정국이 반전되는 것은 이하응이 눈엣가시 같았던 청나라가 개입한 탓이며, 민자영도 청나라에 도움을 청한 사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자영이 환궁하는 것은 시간이 문제였겠는데, 환궁한 다음 소문에 소문을 더한 결과 날짜까지 맞추는 신통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졌을 개연성이 높다. 또한 그렇게 되어야 민자영이 하늘의 선택을 받은 것 같은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민자영으로서는 굳이 따질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무당을 신봉하여 나라를 그르쳤던 민자영은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된다. 무수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것으로도 모자라 이하응을 제거하기 위할 목적으로 청나라에 개입을 요청한 것이 빌미가 되어 청일전쟁이 발발하였으니 그 죄과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1895년 8월 20일 새벽 일본에 의해 훈련된 부대가 경복궁을 포위하고 저항하던 근위군을 일축한 다음 일본에서 파견한 30여 명의 자객들이 난입하였다. 고종의 침전에 궁녀 차림으로 숨어 있던 민자영은 정체가 발각되자 밖으로 달아나다가 난자 당해 죽었다. 처참하게 난자당한 시신에 입에 담기 어려운 치욕이 가해진 다음 석유를 뿌리고 불 질렀는 바, 진령군의 신통력은 무당집 부엌에 있는 개다리 소반처럼 별무소용이었다. 진령군은 그런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는커녕 영원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고 홀렸을 것이었다.

무당에게 홀린 민자영은 열강이 노리는 격동의 시대에 무당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다가 처참한 죽음을 당했으니 민자영을 죽인 범인은 진령군이라고 해야 타당하다. 민자영은 대가를 받은 것으로 치부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로 인해 무수한 백성이 형언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고 나라가 멸망한데다, 지금까지도 친일파가 떵떵거리게 만든 죄과는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다.


태그:#무당, #사이비종교, #진령군, #명성황후, #이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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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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