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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씨가 귀국한 것으로 알려진 30일 오전 최씨 변론을 맡은 이경재 변호사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정곡빌딩 서관에서 최씨 귀국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씨가 귀국한 것으로 알려진 30일 오전 최씨 변론을 맡은 이경재 변호사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정곡빌딩 서관에서 최씨 귀국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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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공안검사 전력, '정유라 아량' 발언에 비난 쏟아져

1980년대 운동권 잡는 공안검사가 박근혜 대통령 '비선 실세' 변호인으로 거듭 등장해 화제다. 2년 전 정윤회씨에 이어 최순실씨 법률대리인을 맡은 이경재(67) 변호사가 주인공이다.

공안검사 출신인 이경재 변호사가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지난 196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 3선 개헌 반대 데모에 나섰다 경찰관 폭행 혐의로 재판까지 받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이경재 변호사가 1970, 80년대 서울지검과 대검찰청 등을 거치며 공안검사로 활약한 사실은 많이 알려졌지만 학생 시절 행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공안검사 경력이 화제가 된 것도 30년 전 이 변호사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던 대학생이 최근 이 변호사 발언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면서부터다.

이경재 변호사는 지난 31일 오전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딸 유라는 좀 놓아 달라, 보호해 달라'는 최순실씨 당부에 대해 "지금 그 딸이 어느 정도 세월의 풍파를 견뎌낼 만한 나이 같으면 모르겠는데 이거는 아닌 것 같다"면서 "우리 사회가 이해할 만한 그런 아량이 있지 않나 이렇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최씨의 딸 정유라(20·개명 전 정유연)씨 자신도 이화여대 부정 입학, 금융권 특혜 대출 의혹에 연루됐는데도 어머니와 함께 귀국하지 않아 비난 여론이 일자, 이 변호사가 정씨 나이를 들어 사회적 아량을 주문한 것이다.

이에 1980년대 공안검사였던 이 변호사에게 수사를 받았다고 밝힌 A씨는 이날 오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변호사가 수많은 '스무 살' 대학생들을 국가보안법,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으면서 '스무 살 정유라를 위한 아량'을 말할 자격이 있느냐는 취지로 비판했다.

공교롭게 이경재 변호사 자신도 '스무 살' 시절 학생 운동을 벌이다 재판까지 받았다.

박정희 3선개헌반대투쟁 주동자로 재판... 7년 만에 무죄 판결

'3선 개헌 반대 투쟁'은 대통령 연임에 이어 3선 개헌을 추진하던 박정희 정권에 맞선 전국에서 벌어진 학생 운동으로, 서울대 법대생들이 시초였다. 서울대 법대생 500여 명은 1969년 6월 12일 3선 개헌에 반대하는 '헌정 수호 학생 총회'를 연 뒤 다음날부터 밤샘농성에 들어갔고 서울대 문리대와 공대에 이어 고려대, 연세대 등 전국 대학으로 확산됐다. 특히 7월 1일과 2일에는 각각 8천여 명과 6천여 명이 거리로 나가 경찰과 충돌하기도 했다.(참고 자료: <서울대 60년사>, 서울대학교)

당시 서울법대 2학년 재학 중이던 이경재 변호사도 투쟁 대열에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지검은 이듬해인 1970년 6월 3선 개헌 반대 투쟁을 주동했던 서울법대생 5명을 집시법 위반과 공무집행방해, 폭력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했는데 이 가운데 이경재 변호사도 포함돼 있었다.

검찰은 당시 공소장에 이들이 1969년 7월 1일 법대생 300여 명과 함께 3선 개헌 반대 시위를 벌였고 학교 구내로 들어온 동대문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을 집단 폭행했다고 밝혔다. 당시 법대학생회는 1년 전 시위 당시 농성 학생들이 해산하는 조건으로 동대문경찰서장 등이 형사폭행사건을 불문에 부치기로 약속했는데 뒤늦게 기소해 공포 분위기를 만들려 한다고 항의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70년 7월 7일. '개헌반대 데모학생 1년 만에 5명 기소')

하지만 5년 뒤인 1975년 3월 서울지법 항소부는 공소 사실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이 변호사를 비롯한 법대생 3명에게 선고유예판결을 한 원심을 깨고 무죄 판결했다.(<동아일보> 1975년 3월 6일 '서울지법 '3선 개헌 반대 데모' 항소심 세 법대생 무죄 선고') 대법원도 그해 8월 29일 증거가 없다며 검찰 상고를 기각하고 무죄를 확정했다.(<동아일보> 1975년 8월 30일자 '전 서울대생 3명 무죄를 선고, 7년 전 데모 관련')

지난 1970년 3선개헌반대투쟁에 참여한 서울법대생 기소 보도(위)와 1975년 당시 사법연수원생이던 이경재 변호사의 무죄 판결 확정 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아래)
 지난 1970년 3선개헌반대투쟁에 참여한 서울법대생 기소 보도(위)와 1975년 당시 사법연수원생이던 이경재 변호사의 무죄 판결 확정 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아래)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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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공안검사 활약, 이부영 전 의원 구속기소 '악연'도

무죄 판결 당시 이경재 변호사는 사법고시(14회, 1972년)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생(4기) 신분이었다. 유죄 판결이 나왔더라면 검사 경력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변호사는 이런 '오점'을 지우려는 듯 이후 서울지검 등에서 공안검사로 활약했다.

1982년 부산 미국 문화원방화사건 당시 김두수 공안부장검사 지휘 아래 검사로 참여한 기록이 남아있고, 1988년 서울지검 공안부에 있으면서 당시 광주학살진상규명투쟁위원회를 조직해 전두환 구속수사를 요구하던 이부영 서울민주투쟁연합(서민투련) 의장을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인 이부영 의장은 그 뒤 민주당, 열린우리당 등에서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 변호사는 서울지검 형사1부 부장검사 시절이던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이듬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수사를 연거푸 지휘해 이름을 알렸다. 이런 활약 덕에 이 변호사는 1997년 대구지검 차장검사까지 오르며 검사장 승진 대상으로 꼽혔지만, 1999년 김대중 정부 들어 진행된 승진 인사에서 빠지면서 스스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서울고검 검사를 끝으로 법복을 벗은 이 변호사는 1999년 변호사 개업한 뒤 2013년부터 법무법인 동북아 대표변호사를 맡고 있다. 지난 2014년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 당시 최순실씨 전 남편인 정윤회씨 법률대리인을 맡기도 했다.


태그:#최순실게이트, #이경재, #박정희, #공안검사, #정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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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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