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지바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노벨문학상 수상 거부는 냉전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는 구소련에서 발표가 불가능하자 자신의 역작을 이탈리아에서 출판한다. 다음해인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이 결정되자 러시아가 국외추방 등 압박을 가했고, 결국 수상을 포기한 채 1960년 조용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 경우는, '거부'보다 '박탈'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반면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의 노벨문학상 거부는 유례없는 사상적 확신범의 자유의지였다.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거장이자 대표적인 리버럴리스트라 할 만한 사르트르는 1964년 노벨문학상을 단호히 거부했다. 자신의 철학에 '제도권 딱지'가 붙는 것이 싫었고, 더욱이 서구 1세계 위주로 돌아가는 노벨상의 풍토에 반기를 든 셈이다. 기다리는 기자들과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스치듯 시크하게 나눈 인터뷰는 아직까지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정치적, 사회적, 혹은 문학적으로 그 어떤 태도를 가진 작가는 자기 자신만의 수단, 그러니까 자신이 쓴 말과 글을 가지고만 행동해야 한다. 작가에게 주어지는 수상과 같은 명예는 결국 스스로를 유무형의 압력에 노출시키는 법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장 폴 사르트르와 작가 장 폴 사르트는 엄연히 다른 법이다."

그리고, 이제 노벨상 116년 역사상 세 번째 거부의 가능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올해 수상자로 선정된 밥 딜런의 묵묵부답이 스웨덴 한림원 측의 노기를 사고 있다는 외신이 타전됐다. 밥 딜런은 사르트르 이후 적극적으로 노벨상이란 영예를 거부하는 '역사적' 인사로 이름을 올릴 것인가. 결론적으로, 왜 그러면 좀 안 되는가. 한림원의 파격을 환영한다면, 밥 딜런의 파격, 즉 거부할 권리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밥 딜런의 침묵 행보, 사르트르 뒤 이을까

 스웨덴 한림원 측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 비판을 보도하는 BBC 뉴스 갈무리.

스웨덴 한림원 측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밥 딜런 비판을 보도하는 BBC 뉴스 갈무리. ⓒ BBC


주요 외신에 따르면, 22일(현지시각) 스웨덴 작가이자 한림원 노벨문학상 선정위원인 페르 베스트베리가 밥 딜런의 침묵을 비판하고 나섰다. 지난 13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밥 딜런을 선정했지만, 전 세계적인 화제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한림원의 의중을 대변한 듯 보이는 페르 베스트베리는 "밥 딜런은 무례하고 오만하다"면서도 "지금이라도 연락이 닿길 바란다"고 밝혔다고 한다.

밥 딜런의 행보는 꽤나 굳건해 보인다. 수상 발표 직후 열린 미 라스베가스 공연에서도 밥 딜런은 수상에 대한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이제는 한림원의 연락까지 피하고 있다고 한다. 수상 결정 이후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왔던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 문구도 현재 사라진 상태. 이쯤 되면, 침묵  시위라 봐도 무방해 보인다.

행여 오는 12월 10일 열리는 시상식만이라도 참석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품는 팬들(과 혹은 한림원?)도 있을 법 싶다. 하지만 우디 알렌 감독은 아카데미상에 20번 넘게 후보로 지명됐고, 수상자로도 4번이나 지목됐지만, 단 한 번도 시상식 단상에 오르지 않았다. 1978년 대표작인 <애니홀>로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수상자로 지명됐지만, 우디 알렌이 끝내 뉴욕에서 LA로 날아가가기도 싫고, 뉴욕에서 애정하는 재즈 밴드 연주를 빠지기도 싫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아마도 밥 딜런이 염두에 두는 인물은 역시나 사르트르가 아닐까. 시상식 전 편지를 보내 수상 거부 이유를 밝혔던 사르트르의 행보 말이다. 만약 밥 딜런이 정말 수상을 거부하면 전 세계 여론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때도 이 '음유시인'의 파격적인 결단에 지지를 보낼까.

밥 딜런과 그의 음악이 보여준 가치, 그리고...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발표하는 노벨위원회 홈페이지 갈무리.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발표하는 노벨위원회 홈페이지 갈무리. ⓒ 노벨위원회


밥 딜런은 이미 대중예술에 있어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위인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11회의 그래미상 수상 이력도 대단하지만, 지난 2000년에는 스웨덴 왕립음악원이 주관하며 '음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폴라음악상'을 수상한 바 있다. 심지어, 언론인들에게 수여되는 풀리처상까지 받았을 만큼, 밥 딜런과 그의 '작품'들에게 보내는 전 세계인들의 찬사와 격려는 이미 차고 넘친다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 테오도르 몸젠, 정치인 윈스턴 처칠,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 문학인이 아니면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들의 면면이다. 어쩌면, 1941년생인 밥 딜런 역시 역사적으로 뮤지션인 자신이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깊게 고민하고 성찰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시를 노래할 수는 있지만, 노래가 전부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중음악을 곧바로 시로 치환할 수는 없다. 더 정확히, 음유시인은 '음유' 즉, 읊는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시인'이 될 수 없는 존재다. 사실, 음유시인의 모태가 중세 유럽의 서정시라는 점도 아이러니하다.

서정적인 줄글인 듯 보이지만, 그 안에 묵직한 메시지와 함의, 시대성을 담았던 밥 딜런. 평생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그 작품성과 공로를 전 세계 그 누구보다 인정받은 그가 노벨문학상을 계기로 '음유시인'으로 재규정된다면, 과연 스스로 달가워할까. 아니, 그냥 뮤지션 밥 딜런, 아티스트 밥 딜런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진 않을까. 그가 2012년 오바마 대통령으로 부터 받은 '자유의 메달' 역시 뮤지션으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다시 한 번 인정받은 것이지 않나.

결코 문학이, 시가 음악보다, 대중예술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음악의 노벨상'을 비롯해 이미 자신이 평생 바쳐온 장르 안에서 대가의 경지에 오른 이가 굳이 한림원의 파격에 반가이 장단을 맞출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만약 노벨음악상을 신설했다면 또 얘기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한림원이 선택한 파격 역시 진정성을 의심해 볼 만하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노벨상은 지속적으로 대중예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밥 딜런만이 예외적인 존재인가. 전 세계적으로 파격이라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림원의 선택을 환영한다면, 밥 딜런이 고민 중인(것 처럼 보이는) 노벨상 수상 거부 역시 인정할 필요가 있다. 밥 딜런의 음악을 기존 가치의 전복이나 구시대적인 권위에 도전으로 받아들여왔던 팬이라면 더더욱.

밥딜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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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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