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모 음악평론가

임진모 음악평론가 ⓒ 임진모


서구의 존 레논,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커트 코베인 등이 말해주듯 일찍 세상을 떠난 음악가들은 오랫동안 기억되고 추모가 이뤄지며 또 지속적으로 부활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격언 그대로다. 음악계에선 '망자 특혜', '고인 특수(特需)'라는 말도 있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김광석 한 사람의 이름으로도 충분하지만 유재하, 김현식, 듀스의 김성재, 신해철도 고인이 됐어도 지금의 스타 누구보다도 널리 음악이 애청된다. 과거의 인물이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현재'라는 시제에 있다.

그가 살아있을 때 태어나지도 않은 1990년대 생 젊은이가 유재하의 음악을 듣고 김현식의 앨범을 찾는다. 목하 인기 최고인 힙합 가수들에게 김성재는 패션이든 래핑이든 여전히 레전드이며 신해철은 특유의 언변은 물론 그 절절한 고백적 음악이 우리 가슴에 살아 꿈틀거린다. 고령화, 장수 사회인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그들의 죽음은 명백한 요절이다. 그것이 주는 무의식적 연민과 안타까움이 더욱 그들을 자주 소환해내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인정(人情)보다 우위에 위치한 요소는 그들 음악이 남긴 각별한 예술성과 미학이다. 탁월한 음악이었기에, 소비성과 감각으로 치닫는 요즘 음악과 견주면 그 개성과 가치가 더욱 도드라지기에 우리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들과의 접선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유재하(1962.6.6-1987.11.1)] 단 한 장의 유작이 낳은 무수한 영감

 1987년에 발매된 유재하의 1집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

1987년에 발매된 유재하의 1집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 ⓒ KingPin


먼저 유재하는 자신이 노래를 만들고 직접 노래하는 이른바 '싱어송라이터'의 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것도 1987년에 내놓은 단 한 장의 유작으로. 여기 수록된 '지난 날', '사랑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듣고 후배 싱어송라이터들은 무수한 '팝 발라드'의 영감을 받았다. 유희열, 유영석, 김동률, 김광진, 윤상, 신승훈 등등이 그들이다. 대학에서 클래식을 공부한 유재하가 쓴 곡은 당대는 물론 이후에도 국내 가요에 포함된 약간의 트로트 기운, 이른바 '뽕끼'가 전혀 없었다.

그 뽕끼와 작별하고 현대적 감성을 음악으로 구현했기 때문에 그는 이문세 곡을 쓴 고 이영훈과 더불어 한국형 '팝 발라드'의 원조로 불리는 것이다. 유재하의 노래 '사랑하기 때문에'와 '가리워진 길'을 당대에 가왕 조용필과 언더그라운드의 제왕 김현식이 불렀던 것은 그 무렵의 유행과는 한참 다른 각별한 멜로디와 화성 그리고 편곡진행 때문이었다.

[김현식(1958.1.7-1990.11.1)] 주류를 이긴 비주류, 혼을 토해냈던 가객

 1984년 발표된 김현식 2집 <사랑했어요/어둠 그 별빛>

1984년 발표된 김현식 2집 <사랑했어요/어둠 그 별빛> ⓒ (사)한국음반산업협회


김현식은 바로 상기한 '언더그라운드'를 빛낸 가객(歌客)이었다. 그는 전성기인 1980년대 내내 거의 TV에 출연하지 않았지만 웬만한 주류 가수들보다 더 앨범이 많이 팔렸다. 그가 죽고 나서 300만장의 초대형 대박을 친 유작 노래 '내 사랑 내 곁에'가 왜 그렇게 성공했느냐는 질문에 레코드사 동아기획 김영 대표가 한 말이야말로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다.

"두 가지죠. 하나는 아까운 사람이 세상을 서른둘에 떠났다는 아쉬움. 그 다음은 '내 사랑 내 곁에'가 담고 있는 혼, 혼이랄까. 그 소리가 지금도... 아마 나중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바이올린 인트로를 듣고 있으면 뭉클하게 오는 뭔가가 있어요." 

주류 미디어와 마케팅이 아니어도 '음악만 좋으면 통한다!'는 진리가 언더그라운드에서 증명되었다. 그의 대표곡인 '사랑했어요', '어둠 그 별빛', '넋두리' 그리고 언젠가 한 조사에서 최고의 가요로 꼽힌 '비처럼 음악처럼' 등은 감정을 본능적으로 토해내 대중의 감화지수를 비약적으로 높인다. 혼으로 열창하면서 처절했던 삶과 음악을 일치시켰다고 할까. 그래서 김현식은 음악은 물론 음악에 대한 태도로도 후배들의 귀감이 된다.

김현식 헌정앨범을 내기도 한 김장훈은 "김현식 선배는 어떤 상황에서든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걸 가르쳐준 교훈적인 사람이다. 공연을 하다 보면 몸이 아플 때도 있고 그런데, 무대 올라가면 일단 '뭔가 하고' 내려오는 건 다 김현식 선배의 영향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음악은 영혼의 산물이라는 말을 김현식에게 만큼 리얼하게 적용할 인물은 없다. 마이크 앞에서 죽을 각오로 소리를 토해내는 그런 숭고한 접근으로 그는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파워를 축조했다.

[김성재(1972.4.18-1995.11.20)] 힙합, 춤, 패션... 그 모든 것의 주역

 1995년 발매된 김성재의 1집 앨범 <말하자면>

1995년 발매된 김성재의 1집 앨범 <말하자면> ⓒ 워너채플뮤직코리아


김성재와 이현도의 듀오 '듀스'는 서태지와 아이들 뒤이어 등장해 흑인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통칭하는 '힙합'이란 말을 국내에 회자시킨 주역이다. 일반적으로 듀스는 '국산 라임의 창조자' 이를테면 한국식의 랩 운(韻)과 언어를 확립한 공을 평가받는다. '고!고!고!', '약한 남자', '굴레를 벗어나' 등에서 김성재의 랩은 진화가 거듭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당시로는 빠르고 결이 선명했으며, 요즘 말로 '플로우'가 뛰어나 강한 펀치력을 발휘했다. 음악은 이현도가 주도적으로 만들었지만 그 음악은 김성재를 통해서 비범함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김성재가 있어서 토착화가 어렵다던 랩과 힙합 음악이 국내에서 순탄하게 뿌리를 내렸는지도 모른다.

김성재의 춤과 패션 또한 역대급이었다. 준수한 외모에 역동적인 그의 춤동작이 가미될 때 팬들은 환호했고 특히 격렬한 움직임 가운데서도 부드러운 동선(動線)의 유연한 춤은 현장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파격적인 패션 감각 또한 듀스의 인기를 부채질해 그들이 신곡을 선보일 때마다 강남 지역 옷가게의 매상은 평소의 두 배 이상 치솟았다는 보도가 나왔을 정도. 그들 앨범사진에 나타난 김성재의 패션은 지금 봐도 조금의 촌스러움이 없다. 사망한 지 20년이 더 지났어도 이현도를 포함해서 사람들이 김성재를 줄기차게 그리워하는 이유는 많다.

[신해철(1968.5.6-2014.10.27)] 대담하고 진실했다... 삶도 음악도

 2007년 발매된 신해철의 5집 앨범 <The Songs For The One>

2007년 발매된 신해철의 5집 앨범 ⓒ CJ E&M MUSIC


가장 최근의 레전드라고 할 신해철은 솔직히 음악에 앞서 대담함으로 가득한 그의 발언, 이른바 '소셜테이너'로서의 스탠스가 더 기억날 것이다. '마왕', '야외 정론의 메신저'로 불린 그의 죽음을 두고 필자는 음악가의 사망을 넘는 '우리 시대 진실한 메시지의 상실'이라고 그 의미를 확장했다.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사회적 발언을 해선 안 되고 사회적 위상을 갖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신해철 전설의 핵심은 말할 필요 없이 그의 음악이다. 그는 거짓 상상이나 남의 경험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실제로 번민하고 겪은 것을 노랫말로 써냈다. 어디까지나 자신과 자신 주위의 이야기에 집중한 '1인칭 음악'이었다. 2부작으로 만든 '아버지와 나', '증조할머니의 무덤가에서', '날아라 병아리', '난 쓰레기야'와 같은 노래들의 제목만 봐도 그렇다. 대부분이 '레알 스토리'다. 자신의 경험담을 토해냈기에 팬들은 그의 진실한 음악에서 용기와 위로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흐릿하게 눈물너머/ 이제야 잡힐 듯 다가오는/ 희망을 느끼지/ 그 언젠가 먼 훗날엔/ 반드시 넌 웃으며 말할 거야/ 지나간 일이라고...'   - 'Hope' 

'...나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학교에서 배웠던 것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았었지/ 무엇을 해야 하나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나의 첫 깨어남이었지...' - '길 위에서'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2년의 세월이 흘렀다. 김성재 유재하 김현식도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신해철의 마흔여섯 살 죽음은 받아들이기에 너무도 이르다. 사망원인을 두고 일어난 격렬한 사회적 회오리만큼이나 우리는 그의 출중한 음악을 뚜렷이 기억하고 사랑한다. 성남 분당에 조성된다고 하는 '신해철 거리'와 같은 추모시설과 함께 신해철 음악의 광대한 울림이 더욱 널리 후대에 전해질 것이다.

오래전부터 서구에서는 마치 지금도 살아있는 듯 고인의 음악이 골동화 되지 않고 현재 가수의 노래인 것처럼 전파를 타고 줄곧 이용자와 만난다. 그러면서 시장과 차트를 장식하는 요즘 음악과는 다른 그들의 '옛' 음악이 다채로운 소리 풍광을 제공하면서 문화의 기본인 다양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일이 근래 들어서 마침내 우리에게도 고 유재하 김현식 김성재 그리고 신해철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한국 대중음악의 계통잡기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다행인 흐름이다.

유재하 김현식 김성재 신해철 임진모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