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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키보드를 치는 손이 낯설게 느껴졌다. 과거에 비해 손의 쓰임새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요리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사소하게 고장 난 전자기기는 손수 고쳤다. 결혼하고 나서는 밥 짓는 횟수가 뚝 줄어들었고, 약간 귀찮다 싶으면 용도에 맞게 출시된 제품을 구입해서 썼다. 그 시간을 아껴 여가를 즐길 수 있겠거니 여겼는데 손의 감각이 무뎌지니 삶이 단조로워졌다.

학교에 출근해서도 전자문서로 도착한 공문을 엑셀이나 한글 프로그램으로 처리했다. 분필 쥐고 판서하는 시간보다 컴퓨터로 유인물, 학습지 제작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월급은 숫자의 형태로 계좌에 찍혔으며, 현금 만질 기회도 없이 카드질 몇 번에 숫자가 사라졌다. 가상세계에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수제 우든펜 제작 과정에 지원한 건 이 때문이었다. 펜은 평소 내가 가장 자주 쓰는 아날로그 도구이다. 돌이켜보니 늘 곁에 두고 사용하는 물건 중 대부분이 기성품이었다. 돈과 상품의 교환으로 맺어진 관계 말고 정성과 애정이 담긴 물건을 만들고 싶었다.

이번에 참여한 우든펜 수업은 잉크나 펜촉까지 개발하는 것은 아니고, 펜 키트를 감싸는 몸통 부위를 제작하는 과정이었다. 작업실에 들어가니 책상 위에 세 가지 종류의 나무토막이 준비되어 있었다. 원통 모양에 붉은기가 도는 파덕, 직육면체 모양에 검은 줄무늬가 밝은 갈색 바탕 위를 가로지르는 제브라 우드, 진한 초콜릿 색에 나뭇결이 선명한 로즈우드였다. 따뜻한 색감의 파덕을 선택했다.

펜 길이에 맞게 재단된 나무들. 중심부에 황동튜브가 박혀있다.
 펜 길이에 맞게 재단된 나무들. 중심부에 황동튜브가 박혀있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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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파덕 수종이지만 부위에 따라 색과 무늬가 조금씩 달랐다. 공산품이 아니니 저마다 다른 생김새다. 찬찬히 살핀 후 색이 은은한 녀석으로 골랐다. 코 가까이에 대어보니 옅은 향이 났다. 제브라 우드와 로즈우드의 내음과는 차이가 났다. 생명의 다양성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신비로웠다.

강사는 목재를 펜 블랭크라 불렀다. 블랭크 중심에는 볼펜심이 다니는 통로 역할을 하는 황동 튜브가 박혀있었다. 원래는 수강생들이 직접 드릴 프레스로 구멍을 내고 황동 튜브를 삽입해야 하나, 운영진이 시간을 아끼려고 미리 조치했다고 했다. 옆에서 같이 수업 듣던 여자분은 까다로운 공정이 없어졌다고 환호했다. 나는 그렇지 못했다. 조금 고생스럽더라도 여러 과업들을 모두 경험해보고 싶었다.

뚱하게 서있는데 아쉬워할 틈도 없이 드릴이 투입되었다. 어느 눈치 빠른 사람이 내 마음을 읽고 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황동 튜브와 블랭크의 높이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윙~ 윙 ~ 모터음과 함께 드릴 축이 시계방향으로 빠르게 회전했다. 목재를 바이스에 야무지게 고정시킨 후 수직으로 드릴을 꽂았다. 드르륵드르륵 체중을 실어 내리누르자 트리머라 불리는 둥근 쇠톱이 톱밥을 튕겨냈다.

몸 전체로 누르듯 드릴을 꽂았다.
 몸 전체로 누르듯 드릴을 꽂았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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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찰열 때문에 불에 그을린 나무 냄새가 났다. 황동 튜브 끝이 보이는 지점까지 내려갔는데 사방으로 목재 가루가 흩어졌다. 집에서는 상상도 못 할 짓이었다. 작업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길이 조절을 마친 수강생들은 환풍기가 설치된 목선반 앞으로 이동했다. 나무를 깎는다고 해서 칼로 잘라내는 줄 알았지만 기계의 회전력을 이용한다고 하였다. 마스크를 쓰고 선반에 재료를 장착했다.

전원을 켜자 엄청난 속도로 나무가 돌기 시작했다. 손잡이가 긴 가우지 칼을 회전체 아래에 밀어 넣자 칼이 들어간 깊이만큼 목재가 파였다. 드릴 작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굉음이 울리고 나무 향이 훅 끼쳤다. 다홍색 파덕 나무 조각들이 폭발하듯 튀었다. 너무 힘을 세게 줘서 그렇다고 조언을 들었다. 자칫하면 재료가 쪼개질 수 있으니 바깥쪽부터 천천히 들어가기로 했다.

회전하는 나무에 가우지 칼을 대면 둥근 모양으로 깎인다.
 회전하는 나무에 가우지 칼을 대면 둥근 모양으로 깎인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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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나무가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회전하는 힘에 의해 전체적인 모양은 원통을 유지했다. 도자기 빚는 물레와 동일한 원리였다. 가우지 칼이 블랭크에 닿자 진동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진동의 크기에 따라 재료의 두께와 단단함이 가늠되었다. 나무는 떨림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눈으로 보지 않고도 분명히 느껴졌다. 놀랍고 새로운 감각이었다. 얼마만이었던가? 손에 잠재되어 있던 기능이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났다.

아주 오래전, 모래밭에서 두꺼비집을 짓는다며 굴을 파며 놀곤했다. 모래 굴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흙과 물을 적절히 배합하고 기둥 안쪽을 튼튼히 다져야 했다. 겨우 팔목이 드나들만한 모래 터널은 얼굴을 박고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워 전적으로 손의 감촉에 의지해야 했다. 우든펜을 만드는 동안 까슬까슬함과 푸석거림을 구분하며 모래 터널을 짓던 지난날의 즐거움이 되살아났다.

소근육을 움직여 미세하게 칼의 각도를 조절했다. 내 의지에 따라 붉은 나무 조각은 투박한 껍질을 벗고 얇고 유연한 형태로 변해갔다. 모니터 화면에 보이는 가상의 장면이 아니라 질감과 온기가 느껴지는 실제상황이었다. 쏟아지는 톱밥에 양쪽 콧구멍에서 주황색 콧물이 흘렀지만 행복했다.

모양이 잡힌 목재를 사포로 매끈하게 다듬었다. 흔히 알고 있는 검은색 사포는 밝은 색 나무에 어둡게 물들게 한다고 MSC 하얀색 종이 사포를 사용했다. 200, 400, 600 순으로 사포 입자의 거칠기를 점차 줄여나가며 보드랍게 가공했다. 부들부들한 미세입자가 일었다. 사포질로 미끈해진 표면에 목공 왁스를 발랐다. 헝겊으로 열을 가하여 문지르니 왁스가 녹으며 윤기가 났다. 색은 선명해지고 무늬는 도드라졌다. 죽은 나무가 다시 반짝였다.

펜프레스를 이용해 목재와 펜키트를 조립한다. 펜심은 교체 가능하다.
 펜프레스를 이용해 목재와 펜키트를 조립한다. 펜심은 교체 가능하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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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프레스에 펜촉과 연결대, 잉크 카트리지, 클립을 넣고 결합했다. 탈칵, 처억, 끼익 두세 차례 짧은 기계음이 났고 펜이 완성되었다. 펜을 좌우로 돌리면 심이 위아래로 들어갔다 나왔다. 적당한 저항감이 있어 휙휙 꺾이지 않았다. 플라스틱 대신 펜을 감싸는 원목은 따스하고 묵직했다.

이리저리 펜을 돌려보고 있으니, 목공예를 하시는 분이 오셔서 우든펜은 악기를 다루듯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알려주셨다. 펜을 차 안에 두면 직사광선을 받아 나무가 상할 수 있으니 가급적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장소에 보관하되, 자주 써서 주인의 몸에 익숙해지도록 하라 하였다. 나무를 가까이하는 사람이 들려주는 지혜였다.

저렴하고, 튼튼하며 잘 써지는 플라스틱 펜이 넘쳐나는 시대에 우든펜은 어리석어 보일지 모른다. 비싼 재료에 장시간의 노동, 까다로운 사후관리는 전혀 효율적인 라이프 스타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수작업은 신체를 부지런히 움직여 가치로운 것을 만드는 순수한 기쁨을 준다. 디지털 세상의 변화 속도가 버겁게 다가올 때 구식으로 제작한 펜으로 무엇이든 끄적거리며 위안받을 수 있다면 충분한 보상이 되지 않겠는가?

작업실을 나서기 전, 레이저 각인으로 아내 이름을 새겨 넣었다. 강사가 로맨틱한 남편이라 치켜세웠다. 말은 고맙지만 오해다. 체험한답시고 주말 내내 독박 육아하게 만들었으니 이렇게라도 나의 죄를 덜어야 한다. 

완성된 우든펜과 샤프펜슬
 완성된 우든펜과 샤프펜슬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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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우든펜, #목공예, #목공, #우드펜, #수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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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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