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이재용 감독이 29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아우르던 이재용 감독이 노인 및 소수자에 대한 영화로 돌아왔다. <죽여주는 여자>다. ⓒ 이정민


노인과 트랜스젠더, 그리고 장애인과 코피노 아이.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 등장하는 인물만 놓고 보면 흔히 말하는 '상업적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줄거리는 더 하다. 종로 일대에서 몸 파는 일로 생계를 꾸리며 서비스 '죽여주는 여자'로 소문난 일명 박카스 할머니 소영(윤여정)이 몇몇 노인들의 간절한 안락사 부탁을 들어주며 정말로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는 이야기다.

우울하고 무거워 보이지만 배우 윤여정과 윤계상, 실제 트렌스젠더 배우 안아주 등이 나름 유쾌한 톤으로 연기한다. 이 바탕엔 이재용 감독이 있다. 그가 누구던가. <정사>와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로 성애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제시했고, <여배우들>을 통해 배우들 민낯을 코믹하게 까발린 인물이다. 또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로 자기고백 비슷하게 감독의 지질함을 그리기도 했다. 상업과 저예산을 아우르며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꺼낸 이다. <죽여주는 여자>가 마냥 무겁고 우울할 수 없는 이유기도 하다.

공간 감수성

<죽여주는 여자>의 출발을 보자. 2007년 무렵 이재용 감독은 평소 눈여겨봤던 이태원 부근을 영화로 찍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도시 혹은 마을의 골목골목을 좋아했던 성향이 작용한 탓인가. 서울 후암동, 해방촌, 명륜동 등 골목 풍경에 매료돼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그는 "사라지기 전에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야기를 구상한다.

"출발은 실향민인 한 노인이 금강산으로 걸어가는 이야기였다. 이태원에서 복덕방을 하는 할아버지로 설정했다. 왜 이태원이었냐고? 특별한 곳으로 느껴졌다. 국내 유일한 국제도시에 이방인이 살고, 근처에 이슬람 모스크가 있는 게 재밌다. 또 산세를 따라 건축가들이 차마 생각할 수 없는 구조의 건물들이 많다. 호기심이 가는 동네였다. 내가 한남동 쪽에 사는데 스쿠터를 타고 촬영장을 갈 수도 있겠다 생각도 했고! 이건 농담이다. (웃음)

공간은 내게 참 중요하다. <정사>(1998)가 청담동을 배경으로 한 영화지만 남자 주인공은 석재공장을 다닌다. 강북 정서와 청담을 대비시키고 싶었지. <스캔들>은 당연히 서울 안 한옥과 도쿄를, <여배우들>은 딱 스튜디오 촬영장을 고집했다. 이 영화에서 박카스 할머니가 나오니 종로는 필연적 공간이고, 이태원은 사라져가는 이국적 지역이면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도 서로 해할 거 같진 않은 동네로 봤다.

그리고 장충단 인근과 남산 산책로가 중요하다. 평소 산책을 하는 곳인데 시각장애인도 운동할 수 있을 만큼 관리가 잘 돼 있다. 거기에 서서 도심을 보면 고요하다. 신기루 같은 건물만 보이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 안에선 전쟁터 같겠지만 소영은 그 풍경을 신기루 보듯 바라본다. 남들은 산책하러 오는 곳이지만 소영은 먹잇감을 구하는 곳이다. 자세히 보면 배경마다 남산 타워의 모습이 걸쳐 있다. 의도한 것이다."

 <죽여주는 여자> 촬영 현장의 이재용 감독과 배우 윤여정. 배우 윤여정은 이번 영화 촬영 과정이 매우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배우가 고생한 덕분에 기대 이상의 결과물이 스크린에 올라갈 수 있었다.

<죽여주는 여자> 촬영 현장의 이재용 감독과 배우 윤여정. 배우 윤여정은 이번 영화 촬영 과정이 매우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배우가 고생한 덕분에 기대 이상의 결과물이 스크린에 올라갈 수 있었다. ⓒ CGV아트하우스


이미 전력이 있다. 1994년 그는 약 700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24시간 동안 서울 구석구석을 담은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10년 뒤 2004년, <한 도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전시가 열렸고, 해당 작품을 2시간 분량으로 편집해 서울 정도 600년 기념 타임캡슐에 넣기도 했다. 이 정도면 공간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웃음) 공간과 기록 같은 것에 관심이 많다. 대전 출신인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30분을 버스 타고 통학했다. 12년 동안 창밖을 본 건데 그게 기억난다. 재채기 하는 여자, 싸움하는 아저씨들. 내 눈이 카메라였다면 그대로 담을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때 막연하게 영화감독이 되고자 한 것 같다. 물론 영화를 많이 보고 좋아한 것도 있지만 촉매제가 된 거지."

상상의 나래 그리고 현실

20년 전 일을 들춰낸 건 이재용 감독 특유의 공간에 대한 애정을 바라보기 위함이었다. 사실 그리 단순하게 바라볼 일은 아니다. 당시 작업을 두고 이 감독은 "지금의 유튜브 같은 걸 꿈 꾼 거 같다" 고백했으니. 같은 시간,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다른 공간을 담는 식인데 퍼포먼스 성격이 강한 일종의 '콘셉추얼 아트'(Conceptual Art)다.

영화감독이라지만 보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다. 실제 종종 함께 모임을 갖는 사람들 중엔 뇌 과학자, 음악가, 소설가 및 요리사 등이 포함돼 있다.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며 여러 상상을 하는 모습 자체가 내가 영화 하는 동력"이라며 그는 "그런 면에서 영화에 미쳐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웃으며 자평했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이재용 감독이 29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하나에 매달려서 죽자고 달려드는 타입은 아니다. 이재용 감독은 그보다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이 많다. 많은 이들을 만나고 경험하면서 번뜩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작업에 들어간다. 그만의 방식이다. ⓒ 이정민


마냥 상상 속에 빠져 있는 건 아니다. <죽여주는 여자>에 스치듯 지나가지만 분명 조계사에서 다부진 표정으로 투쟁 중인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모습이 보이고, 평범한 농민 백남기 선생이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졌다는 뉴스 장면이 보인다. 언론 시사회 당시 이재용 감독은 "애써 피하지 않으려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만큼 현실감을 담으려 했다는 뜻이다.

"영화를 찍는 시기에 그 사건들이 우연히 겹친 거다. 조계사에서 찍기로 했는데 마침 한상균씨가 계셨고, 오히려 그 모습을 피하는 게 더 어색하다고 판단했다. 영화는 가상이라지만 현재성을 담고 있기도 하고 기록의 의미도 있다고 본다. 과감하게 담았다. 훗날 이 영화로 2015년 대한민국의 한 단면을 기억하게 만들고 싶었다. 버려진 코피노, 트랜스젠더, 박카스 할머니 등과 함께 그런 사건이 있었다고."

죽음에 대해

영화 속 소영, 그리고 그녀가 어렵사리 안락사시킨 세 명의 노인들은 이 땅에 존재하는 복지시스템의 빈틈을 상기시킨다. 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엔 감독의 죽음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다. 나이듦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거라지만 굳이 이런 걸 전면에 내세울 필요가 있었을까. 또 성소수자의 모습은 어떠한가. 때론 신기함의 대상이 되면서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선 금기시 된다. 구석으로 숨어들어 가 있던 소수자의 모습을 이재용 감독은 담담하게 꺼냈다.

"기왕이면 안 해 본 이야기를 해야지. 윤여정씨와 놀다 보니 이런 데에 생각이 많다(웃음). 부모님도 연로하셔서 자극이 되고. 일전에 가족여행을 갔는데 눈썹 펜이 세 개가 세트더라. 싸기에 덥석 샀더니 어머니가 '하나만 사도 죽을 때까지 쓸 것 같아'라고 하셨다. 그 하나조차 다 못 쓰고 죽을 수도 있다는 얘기잖나. 이처럼 내 삶과 주변에서 자극이 있어 늙음과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이재용 감독이 29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여기까지만 들으면 이재용 감독은 참 따뜻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다. 자신을 자극하던 화두를 품고 서로가 서로를 돕는다는 작품을 만들었으니. 이 말에 그가 살짝 웃었다. "냉소적인 면도 있고, 남들과 같은 공감력이 없기도 하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영화는 분신인 것 같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영화를 나답게 만들 수밖에 없더라.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보면 집요하면서도 묵직하잖나. 그런 식으로 내가 영화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결국 내 영화가 아닐 것 같다. 극한을 제시하고 선동하기보단 각자 잔잔히 보면서 깨닫는 바를 남기게 하고 싶다. 우리 영화 대사 중에 '저 사람들도 다 사연이 있겠지'라고 있잖나. 대부분 사람들은 진실에는 관심 없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 겉가죽만 보고 함부로 지껄이기도 한다. 인생이 그런 거라고 구구절절 밝히지 않아도 다들 알잖나. 그 사람의 숨은 페이지를 상상케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설명이 남았다. 백세시대다. 이재용 감독은 "인류 최초로 오래 살면 어쩌지 고민을 하게 된 때"라며 안락사와 고독사에 대한 생각을 전했다.

"연명치료가 등장한 이 때 왜 이렇게 사는가 생각하고, 치매를 가장 두려워한다. 자아상실의 끔찍함, 세상에 홀로 남았을 때 고독감이 영화에 의도적으로 나열돼 있다. 나도 우울해지는데 이런 이야기를 내가 왜 하려 했을까. 중압감이 컸다. 그럼에도 할 수 있었던 건 내 문제이자, 우리의 문제이고 이미 늦었을 수도 있지만 이대로 흘러가다간 모두 지옥행 열차를 타게 된다고 생각했다. 요양병원에 가본 적이 있는지? 때가 되면 수면제를 맞고, 때가 되면 한 줄로 서서 약을 받는다. 집단 수용소 같더라. 거기에 가면 그렇게들 죽여 달라는 분들이 많더라.

하늘의 형벌이라 생각하기엔 자존감을 잃고 사는 건 너무 끔찍하다. 이 영화는 질문하는 영화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런 논의를 함께 해봤으면 좋겠다. 안락사, 존엄사 문제다. 자존감을 지키며 존엄하게 죽는 걸 고민할 때가 된 거 같다."

인터뷰 말미 이재용 감독은 '고독사'라는 단어의 정정 표기를 넌지시 제안했다. 일본 조어인데 그걸 언론이 그대로 갖다 쓰면서 벌어진 일이다. "꺼림칙하다. 사람의 연민을 자극하기 위해 쓰는 단어 같다"며 "독거사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 역시 함께 고민해 볼 문제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이재용 감독이 29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유쾌한 분위기였다. 꼭 담고 싶었던 이태원과 남산 일대를 담아서일까. 작품 면에서도 <죽여주는 여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수작이었다. ⓒ 이정민



죽여주는 여자 이재용 윤여정 노인 안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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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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