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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찾아 산티아고 15] 남자에게 차여서 산티아고에? ⓒ 정효정
"아, 잠깐만 화장실에 가야겠는데."
"여기 화장실이 어디 있다고?"

같이 걷던 문은 내게 가방을 맡기고 낮은 수풀 사이로 들어갔다. 나는 불안하게 다른 사람이 오는지 망을 봐야했다. 메세타 구간의 가장 문제는 마을이 띄엄띄엄 있는데다, 어딜 봐도 평원이기에 볼일을 보고 싶어도 숨을 공간이 없다.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서 출발해 다음 마을인 칼사디아 데 라 쿠에사까지 17km를 걷는데 화장실이 하나도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이용하는 순례길이면 이동용 화장실 하나는 만들어둘 법도 한데 말이다. 
메세타 평원 아무리 살펴봐도 숨을 공간 하나 없는 곳 ⓒ 정효정
메세타 구간 땡볕에서 쉬면서 책 읽는 순례자 ⓒ 정효정
이틀 전 만나 함께 걷기 시작한 문은 한국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노르웨이로 입양되었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한국성을 그대로 이름으로 쓰고 있었다. 지금은 직업학교를 마치고 1년 정도 일을 하다가 쉬면서 장기여행 중이다. 노르웨이는 실업자에 대한 지원이 다양해서 다시 일을 찾는 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부럽기도 하다. 한국에선 장기여행을 마치고 원래의 일로 복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의 삶은 거대한 단체줄넘기 같아서, 뛰다가 숨이 가빠져 빠져나갈 수는 있지만, 다시 돌아가긴 힘들다. 정신없이 줄이 돌아가는 그 속도에 다시 뛰어들 수 없는 것이다. 문은 노르웨이에서의 삶에 만족한다고 한다. 단 한 가지 말고는.

"북유럽에 입양되는 건 미국에 입양되는 것과 또 다른 경우야. 왜냐면 북유럽엔 아무리 둘러봐도 머리가 까만 아이는 나밖에 없거든. 그리고 '넌 참 인형처럼 예쁘다'는 칭찬을 많이 받지. 다르다는 이유로 주목받는 게 정말 스트레스였어."

다음날 우리는 사하군(Sahagun)을 지났다. 사하군은 레온주에서 첫 번째로 만나는 도시다. 이곳에서 산티아고 순례길 절반을 완수했다는 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 문은 여기까지만 걷고 세비야의 친구집으로 갈 예정이었다. 우리는 반완주 증명서를 받고 자축한 후 헤어졌다. 그녀는 언젠가 한국에 와서 엄마를 찾을 거라고 했다.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한국에서 엄마를 못찾을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은 꼭 완성에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사하군의 400km 지점 순례 절반 완주 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 ⓒ 정효정
남자한테 차여서 산티아고에?

레리에고스(Reliegos)에는 엘비스의 바(Elvis' bar)라는 독특한 바가 있다. 건물 외벽에 형형색색의 페인트가 칠해져 있고 커다란 눈이 그려져 있다. 내부는 더욱 기괴하다. 각국의 언어로 낙서가 되어 있고, 대마초 그림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었다.

주인장과 종업원도 상당히 독특한 분위기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바에만 들어가면 타임워프가 일어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의 사차원적 공간이었다. 밤에는 온갖 세계의 음악을 다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점심으로 스페인 햄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바네사가 지나가다 묻는다.

"너 다비드랑 릴리 만났어? 걔들 며칠 전부터 너 찾던데?"
레리에고스의 특이한 바 들어가면 타임워프가 일어날 것 같은 공간이다 ⓒ 정효정
엘비스 바의 주인 보기엔 무섭게 보이지만 공짜로 하몽(햄) 잘라서 맛보라고 주신 멋진분이다 ⓒ 정효정
한때 작은 가족이라 불렸던 다비드, 미첼, 릴리, 지블란 일행들. 이들과는 5일 전 헤어졌다. 헤어질 때는 어차피 걷는 속도가 느리니까 이들이 날 금방 따라잡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들이 나보다 앞서 걷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음 마을인 만실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에 도착하자 날 발견한 다비드가 뛰어나왔다.

"우린 네가 UFO에 납치된 거라고 생각했어."

날 따라 잡으려고 빨리 걸었는데 나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거다. 다비드는 늘 밝은 성격으로 이 작은 패밀리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는 늘 멤버들을 잘 챙겨줬다. 내 발이 아플 때 약을 가지고 있는 게이탄을 불러 온 것도 그였고, 와인이 모자라면 먼저 일어나 사러 가는 것도 언제나 그였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인사삼아 내게 사랑고백이나 청혼을 하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가슴은 1g도 설레지 않았다. 그는 애정표현이 우리와는 정반대인 이탈리아에서 왔기 때문이다. 주로 내가 웃긴 소리를 하면 찬사와 함께 '아이 러브 유'를 외치는 식이다. 그 경우 '아이 러브 유'는 칭찬의 의미다. '넌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혹은 '넌 진짜 웃긴 녀석이야' 정도로 알아들으면 된다.

케밥을 먹다가도 "우리 결혼해서 아침 저녁으로 케밥 먹자"라는 소리를 한다. 동서양이 만났으니 그 중간의 음식인 케밥을 먹어야 한다는 거다. 웃자고 하는 소리다. 죽자고 달려들면 나만 이상해진다. 때문에 나 역시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대답해주곤 했다. "고마워, 근데 난 됐어. (Thank you, But no thank you)" 그런 내 반응에 주변 친구들은 즐거워하곤 했다.
요리중인 친구들 요리를 담당하는 건 늘 이탈리아 친구들 이었다 ⓒ 정효정
대체 얼마만에 들어보는 사랑고백인데, 이리 실속이 없다니... 스스로가 안쓰러울 정도다. 그래도 이렇게 유쾌한 사랑고백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사랑이라는 말만 들어가도 모든 것은 쓸데없이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사랑이 대뇌에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을 분비시켜 행복지수를 높인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랑은 행복지수를 높여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스트레스지수를 높여 지옥행 특급열차를 타게 하기도 한다.

호주에서 온 헬레나의 경우엔 사랑 때문에 이미 지옥에 한 번 갔다 온 상태였다. 그녀는 늘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사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차여서 홧김에'였다. '오, 연애이야기다.' 우리는 귀가 쫑긋해져서 그녀 주변으로 모였다.

헬레나는 1년 전 호주로 여행을 왔던 영국남성과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 둘은 호주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이번엔 그녀가 영국의 남자친구를 방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알고 보니 오랜 여자 친구를 두고 호주에서 헬레나를 만나 바람핀 거 였다.

"내 마음이 다친 건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거짓말쟁이인 그의 본질을 몰랐다는 거야! 난 그가 아니라 속아 넘어간 내가 싫다고."

결국 이런 마음으로 호주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는 이 순례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길을 걷기만 해도 저절로 치유가 되는 하이패스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게 있을리가 없다. 하지만 최소한 이 길은 그녀가 호주에 돌아가기 전까지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그녀의 친구들 앞에서 웃으면서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을.
팜플로나의 가면 사랑을 할때 우리는 상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 정효정
가족의 해체

이제 순례자들의 무리는 대도시 레온(Leon)으로 향한다. 이곳은 10~12세기 레온 왕국의 수도였다. 순례길에서 만난 한 한국여성은 친구들과 돈을 모아 레온의 국영호텔(Parador de León)에 묵기로 했다고 했다. 이 호텔은 산마르코스 수도원을 개조한 유서 깊은 곳이다. 그들이 그곳에 묵는 이유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룬 영화 <더 웨이>에 나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화 <더 웨이>는 순례길을 걷다가 사망한 아들의 유해를 찾기 위해 온 아버지의 이야기다. 그는 길을 걸으며 3명의 캐릭터를 만난다. 살을 빼기 위해 왔다는 네덜란드인 요스트, 담배를 끊기 위해 왔다는 캐나다 여성 새라, 글감을 찾기 위해 왔다는 아일랜드 출신 잭이다.
레온의 국영 호텔 Parador de Leon 영화 <더 웨이>에 보면 일행들이 여기 묵는 장면이 나온다 ⓒ 정효정
내게 이 영화 이야기를 해준 존은 이 캐릭터들은 4가지 문제를 대변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아집과 불통, 요스트는 건강상의 불균형, 새라는 과거의 트라우마, 잭은 권위(교회)와의 문제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이 네 개의 문제 중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자신은 네 가지를  다 지니고 있다고 한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요스트는 자신감을 얻게 되고, 새라는 폭력적인 남편 때문에 유산했던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되고, 잭은 산티아고 성당에 들어서며 신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으로 각자 해결을 본다. 그리고 영혼이 자유로운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고지식한 아버지는 순례길을 걸으며 죽은 아들을 이해하게 된다.

사람들은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자신이 가진 문제가 이 영화처럼 해결되기를 바란다. 어느새 길은 절반을 넘은 상황, 이제는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슬슬 초조해지기도 한다. 릴리도 그런 듯했다. 레온에 도착하기 전부터 그녀는 컨디션이 저조했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레온으로 향하는 길 10월 중순이 넘자 비가 오는 날이 많아졌다 ⓒ 정효정
"이제 걷는 건 충분한 것 같아. 오늘은 버스를 타고 가려고."

그런데 옆에서 듣던 한 미국 할머니가 끼어든다.

"차를 타다니. 걸어야지! 난 60세가 넘었지만 단 한 번도 차를 타지 않았어. 단 한 번도. 이 길은 걸어서 가야만 의미가 있어."

'Never ever'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버스를 타는 행위에 혐오감을 표출하는 그녀 덕분에 릴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서 완주하느냐, 아니냐'는 오래된 논쟁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무조건 걸어야 한다고. 심지어 배낭을 보내는 서비스도 이용하면 안 된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이 할머니처럼 자신의 주장에 너무나 확신이 있는 나머지 다른 사람에게 훈계를 시전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타입들이 즐겨 쓰는 말은 '속임수(cheating)'이다. 버스를 타거나 짐을 보내는 건 속임수라는 거다.

뭘 또 굳이 그렇게까지 하나 싶다. 일단 꼭 걸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이 길에 순례자가 넘쳤을 중세에는 왕족이나 귀족은 말을 타고 순례했을 것이다. 걸어서 순례하는 이는 우리처럼 가난한 평민들이었을 거다.

어차피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자기가 좋아서 걷는 순례길이다.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산티아고까지 가면 되는 것이다. '순례의 의미가 육체적 고난에 있다면, 오체투지나 삼보일배로 가보시라'는 말이 나오는 걸 꿀꺽 참았다. 굳이 이 할머니와 말다툼을 할 필요는 없다. 릴리의 표정은 더더욱 가라앉았다.
당나귀와 함께 순례중인 순례자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가끔 개나 당나귀를 데리고 다니거나 말을 타고 다니는 순례자도 있었다. ⓒ 정효정
우리는 레온에 도착해서 또 다시 도시관광을 즐겼다. 그리고 다음날, 다비드와 헤어졌다. 그는 회사로 돌아가는 날이 정해져 있어서 조금 더 빨리 완주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레온 성당 앞에서 다비드와 나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이 작은 가족의 구심점이었던 그였다. 그는 어스름한 새벽 속으로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이 러브 유"를 외치며 사라졌다. 나 역시 두 팔을 휘저으며 힘차게 "땡큐"를 외쳤다. 

다른 친구들도 오전에 떠나고 릴리와 나는 오후에 떠나기로 했다. 나는 머플러와 폴라폴리스 상의를 샀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이 복장으로 끝까지 버틸 수 있어야 할 텐데. 시내에서 릴리를 만나자 그녀는 여전히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입에서 예상치 못했던 말이 나왔다.

"이제 걷는 건 충분하다고 생각해."

그녀는 내가 옷을 사는 동안 레온역에서 기차표를 샀다고 했다. 여기서 기차를 타고 사리아까지 가서 그곳에서 마저 걸을 거라고 했다. 사리아는 산티아고를 100km 남긴 지점이다. 다비드는 떠났지만 나머지 멤버들은 산티아고까지 함께 갈 거라고 생각했기에 충격이었다. 그녀는 계속 연락을 하겠다는 말만 남겼다. 하지만 곧 단체 채팅방에서도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작고 단란했던 가정은 다비드와 릴리가 사라짐으로 깨지고 말았다.
레온 대성당 13세기에 제작된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름다운 성당이다 ⓒ 정효정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에 괜찮은 남자가 많다'는 말만 듣고 800km를 걸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태그:#산티아고, #카미노, #레온, #CAMINO,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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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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