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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왜?"
"아버지 어디세요?"
"어디긴 뭐 어디야. 병원이지. 피 뽑고 기다리고 있다."

분명 병원 예약은 오전 10시이건만 아버지는 9시도 되기 전에 벌써 병원이라며 대답하십니다.

"아니, 무슨 병원을 그리 빨리 가요?"
"오늘은 7시에 버스를 탔는데 그나마 학교가는 애들이 타는 시간이라 좀 늦은 거다."
"엄마는 뭐하세요?"
"엄마는 뭐하긴 뭐하냐? 내 옆에 있지."

그러시곤 전화기를 건내시는 것 같더니 금방 엄마 목소리가 들립니다.

"응, 왜?"
"그냥 병원오시는 날이니까 전화했는데 너무 빨리 출발하신거 아니예요?"
"빠르긴 뭐가 빠르냐? 아침에 집안 치우고 빨래까지 다 널고 왔는데. 빨리하고 가야지."
"아이구, 그래도... 이제부터 천천히 진료받고, 맛있는것도 사드시고 내려가세요."
"응, 그래."

아버지가 의사선생님에게 선물을?

오늘이 그날입니다. 2~3개월마다 한 번씩 병원에 오셔서 피 검사하고 혈압도 재고, 당뇨도 체크하며 괜찮으신지 검사하고 약을 타가시는 그날입니다.

병원 가는 날이라하면 젊은 사람들도 무슨 이유인지 걱정스럽고 부담스러워 피하고 싶은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나이드신 우리 아버지는 이상하게도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리십니다. 뭔가가 있는것 같은데 그 뭔가가 무엇인지 통 알길이 없어 그동안 궁금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진료가 끝나고 다시 드린 전화기 너머의 아버지 목소리가 그 비밀을 알려주었습니다.

"다 좋단다! 그럼 그렇지. 내가 자전거도 하루에 세 번이나 타고, 그 맛난 술이랑 빵도 들 먹었거든."
"우와! 아버지 평소에 관리 잘하시더니 선생님한테 칭찬받으셨구나."
"뭐 칭찬은 무슨 칭찬이냐. 내가 한 만큼 받는거지. 하하하! 근데, 니 엄마는 조금 수치가 왔다갔다 한대. 내가 니 엄마 추석때 담근 감주 많이 마셔서 그런다구 다 일렀다."

그러시더니 전화기를 또 엄마에게 건네주십니다(우리 아버지는 본인께서 할 말 다하시면 이렇게 전화기를 엄마에게 넘깁니다). 우리 엄마, 아버지에게 뒤질세라...

"아이 그 냥반('그 양반'의 울엄마식 발음) 별란 말도 다 해주네. 그러는 니 아부지는 선생님한테 호박까지 따다 줬다!"
"호박이요? 무슨 호박? 설마 애호박? 호박을 의사선생님한테 줬어요? 큭, 선생님 별란 선물도 다 받으시네."

"호박 따다 주면 어떠냐. 선생님이 좋아하시더라!" 옆에서 아버지 큰소리로 떠드시는 목소리가 전화기를 대고 있는 엄마 목소리보다 더 큽니다. 잠시 가만히 있으라고 아버지에게 소리치신 후 엄마가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래, 이 냥반이 아침에 뭘하나 했더니만 애호박이 이쁘다고 애호박 따다가 비닐봉지에 싸서 가방에 넣어왔지 뭐냐. 그래도 선생님 받고 좋아하시니 다행이지만."

병원 가는 날 좋아하는 아버지

아, 의사선생님이 아버지 맘에 꼭 드셨나 봅니다. 자식들 보러 오실때도 남자가 뭐 들고 다니면 안 된다고 짐 같은 것은 들고 오지 않으시는 아버지가 선생님 드리려고 호박까지 따서 고이 싸오시다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아버지가 진료받으시는 선생님과의 인연은 한 5년쯤 되는 것 같습니다. 전에 남자선생님이 무뚝뚝하셔서인지 선생님이 바뀌시고는 아버지는 무척이나 좋아하셨습니다. 석 달에 한 번이면 1년에 4~5번 정도밖에는 보지 않는 사이입니다. 몇 분 되지 않는 진료시간에 보는 거라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무슨 상관일까 싶기도 한데... 선생님이 바뀌고는 병원다녀오시길 좋아하시기도 하고 그 후에 날마다 수치를 체크하거나 운동하는 걸 마치 숙제를 받아온 초등학교 학생처럼 열심히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호박선물 얘기는 오전 중에 형제들 사이에 모두 전파됐습니다. 그러다가 병원에 한번 모시고 다녀온 적이 있던 언니가 이런 말을 해줬습니다.

"아버지가 병원에 다녀오시면 왜 그리 좋아하시는줄 알아? 나도 몰랐는데, 두 어번 진료실에 따라가 보니 알겠더라구. 갈때마다 선생님이 '아버님 잘하고 계시네요, 전 아버님 믿어요, 아버님만 믿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라구."   

그거였습니다. 매일매일 열심히 숙제하고 싶어지고, 운동하고 싶어지는 이유. '아버님만 믿는다는 그말'때문에 아버지는 정말 신이나서 자전거 패달을 밟고 또 의사 선생님을 떠올리시면서 세상의 그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다고 하시는 술까지도 줄여드셨던 것입니다.

'믿는다' '믿는다'는 말

그래서인지 이번 처방에서는 드시던 약이 줄어들어 약값이 평소보다 훨씬 적게 나왔습니다. 덕분에 형제들에게 날라오는 '부모님 약값 1/n'메시지의 무게도 가벼워질 것 같습니다. 자식들에게도 안 싸다주는 애호박을 의사선생님에게만 싸다주시고 싶었던 아버지의 맘 충분히 이해됩니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이 술 좋아하시고, 간식 좋아하시는 우리 아버지의 입도 닫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칭찬과 더불어 정말 아무것도 아닐수 있는 그 작은 애호박 하나를 받으시며 좋아하셔서 다시 한번 아버지를 기쁘게 만들어주신 의사선생님이 너무도 존경스럽고 감사했습니다.

오늘 우리 아버지는 병원에 가서 몸을 아프지 않게 하는 약뿐만 아니라 마음을 더 튼튼하게 하는 칭찬과 고마움의 선물까지도 듬뿍 받아 오셨습니다.


태그:#애호박, #칭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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