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KBS <일요진단>에 출연한 윤병세 장관.
 KBS <일요진단>에 출연한 윤병세 장관.
ⓒ KBS

관련사진보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문제와 관련해서는 아마 지난 20년 동안의 역사를 회고해 보신다면 박근혜 정부처럼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할애한 정부는 사실은 저는 없다고 봅니다."

논리를 베끼려면 화법까지 닮아가는 걸까. 이른바 '박근혜 화법'을 창시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이 아니다. 28일 방송된 KBS1 <일요진단>에 출연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위안부 문제 합의에 대해 내놓은 자평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그 결과가 참담하다는 것을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윤 장관은 또 이렇게 말했다.

"지난 3년 동안 특히 지난 18개월 동안은 집중적으로 노력을 했고 또 이어서 지난 8개월 동안 후속협의를 통해서 많은 협의를 했고요(중략). 그것은 대통령께서도 강조하셨듯이 우리가 아무리 좋은 합의를 만든들 위안부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시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그런 절박한 그런 시간 의식을 갖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여타 문제에 대해서 행여라도 정부가 초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러한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마는 저희로서는 항상 이런 위안부 문제를 타결했던 그러한 정신으로 앞으로 할머니들의 그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여러 가지 그런 사업에 대해서 많이 더 신경을 쓰고 할머니들의 의견을 청취할 생각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20년 동안 가장 '노오력'을?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맞아 열린 '나비 문화제'에 참석한 김복동 할머니가 소녀상 옆 빈 의자에 앉아있다. 오른쪽은 길원옥 할머니.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맞아 열린 '나비 문화제'에 참석한 김복동 할머니가 소녀상 옆 빈 의자에 앉아있다. 오른쪽은 길원옥 할머니.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어디 가서 어떤 할머니들 의견을 청취할 생각인 건지, 아니 그보다 아직도 외교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당사자들의 의견을 청취하지 않았다는 것인지, 재단이나 보상금과 관련해 의견을 청취할 생각이라는 건지 '박근혜 번역기'라도 돌려 봐야 할 지경이다.

박근혜 정부 5년 내내 함께할 장관이라는 의미의 '오병세'라는 별명 때문일까. 화법까지 박근혜 대통령을 빼다 박은 윤 장관이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도 힘들다. 윤 장관 스스로는 자신이 내뱉은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는 있을까.

진정 박근혜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제일 노력한 정부라고 생각하는 건가. 할머니들 마음에 대못을 박았다는 걸 인정할 생각이 있다면 이런 말을 뱉으면 안 되는 거다.

이날 윤 장관은 '동북아 갈등 현안, 우리 외교 전략은?'이란 주제로 지난 24일 도쿄에서 열린 '한중일 3국 외교장관회의', 사드 관련 향후 대책, 북한 핵문제, 대중 외교 정책 등 당면한 외교 현안들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그 발언들 중 위안부 문제에 관해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지난 광복절 경축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밝힌 '건국절' 논란과 함께 이 정부가 근대사와 친일 문제를 어떻게 정리할지를 유추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우선 윤병세 장관이 자부하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문제나 한일 관계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말을 했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정부, 박근혜 대통령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제71주년 광복절을 맞아 경축사를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제71주년 광복절을 맞아 경축사를 하고 있다.
ⓒ 청와대

관련사진보기


"한·일 관계도 역사를 직시하는 가운데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냉철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선제적이고도 창의적인 사고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시대정신이며, 71주년을 맞는 광복의 정신을 되살리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회피하고 싶은 사안은 과감하게 말을 아끼는 박근혜 대통령. 지난 광복절 경축사 중 한·일 관계에 대한 대목을 아무리 읽어봐도, 그가 지시하는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는 가늠을 할 수가 없다.

"냉철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선제적이고도 창의적인 사고"는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한일 합의도 끝난 지 오래고 재단까지 만든 마당에, 더 이상 위안부 문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선제적으로 일본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다' 정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 대통령은 논란 중인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한 마디도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3.1절 경축사에서는 달랐다. 

"지난해 말, 24년 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한·일간 합의가 있었습니다. 이번 합의는 피해자 할머니가 한 분이라도 더 살아 계실 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집중적이고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습니다. 앞으로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 한 분 한 분의 명예를 회복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실질적인 지원을 확대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박 대통령이 거론한 "절박한 심정"이 과연 피해자를 위한 발로인지, 한일 관계나 이 정부의 역사관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쉬이 추론이 가능하다. 합의 이후, 윤병세 장관은 단 한 번도 직접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난 적이 없다. 만남은커녕 이 정부가 피해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적이 없다는 사실 역시 만천하가 알고 있다. 보상금과 소녀상 철거 관련 일본의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JTBC는 지난 26일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가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며 이렇게까지 말했다고 보도했다.

"정부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속상하다."
"차라리 이 길로 나가려면 정부가 손을 떼는 게 좋다고, 그러면 우리가 우리 대로 싸우고, 이래선 해결이 안 됩니다."
"이거는 배상도 아니고 보상도 아니고 위로금입니다. 우리가 위로금 받자고 이때까지 싸우고 있겠습니까."

여전히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적어도 박근혜 대통령과 윤병세 장관에게 '우이독경'일 뿐이다. 한심한 것은 둘째치고, 12.28 한일합의 이후 이어지고 있는 거짓말 릴레이에 한숨 짓는 할머니들의 원통함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모르쇠'가 박 대통령이 지난 광복절에 재점화시킨 '건국절' 논란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이리라.  

박 대통령의 아버지를 위한 정치

<무한도전> '도산을 찾아서' 중 한 장면.
 <무한도전> '도산을 찾아서' 중 한 장면.
ⓒ MBC

관련사진보기


"역사에 다소 관용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요 무책임이니, 관용하는 자가 잘못하는 자보다 더 죄다."

지난 20일 방송된 <무한도전> 속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이 전언이 방송 이후 머릿속을 떠날 줄을 몰랐다. 미국 LA을 찾아 도산 안창호 선생의 발자취와 업적을 더듬으며, 예능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이미 뛰어넘어 버린 <무한도전>의 진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마도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면서 스스로에게 '관용'을 부리며, 지난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건국절 논란에 불씨를 당긴 박근혜 대통령 때문이리라. 의도적인 건국절 논란이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항일'의 역사를 지워야 한다는 대명제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뻔뻔한 작업이란 지적은 새로울 것도 없다.

친일 세력의 반민족적인 시간들을 어떻게든 지워내면서, '1948년 건국'으로 역사를 수정하고 친일과 항일을 동등하게 지우려는 속내가 보인다. 한일 간의 졸속합의가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의 실마리라고 우겨대는 것도 이러한 '뉴라이트' 식 역사 재해석의 일환 아닌가.

지난 25일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원내 대변인도 논평을 통해 이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정부의 건국절 주장을 지켜보면서 일제 강점기의 우리 투쟁의 역사와 고통의 흔적을 지우려는 박근혜 정부의 역사인식을 국민도 알게 됐다"고 "한·일 위안부합의도 그 일환이었는가"라고 물었다. 적확하고도 유효한 물음이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이미 국정교과서 채택과 12·28 한일 합의처럼 40%의 안팎의 지지만으로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밀어붙일 수 있고, 밀어붙여도 된다는 학습효과를 이미 내재화 했을 것이다. 광복회는 물론 역사학회와 역사학계 원로들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건국절 제정을 논란의 도마 위에 올리는 저의를 해석하기란 어렵지 않다.  아버지의 '친일' 역사를 지우고, '건국절' 제정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싶은 딸 박근혜의 열망이 바로 그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를 만드는 것도 모자라 임기 말 '아버지를 위한 나라'를 완성하려는 박근혜 대통령. 이제 역사마저 다시 쓰려는 박 대통령의 폭주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무한도전>을 보며 독립운동의 의의를 곱씹었던 국민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가을이다.    


태그:#건국절
댓글7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