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행

포토뉴스

[남자 찾아 산티아고 09]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 정효정
가을의 산티아고는 풍요롭다. 밀밭은 이미 추수가 끝나있지만 에스텔라를 지나면서부터는 곳곳에 포도가 탐스럽게 달린 포도밭이 몇 km씩 이어져 있었다. 길에는 무화과, 올리브, 호두, 사과, 배가 달려있기도 했고 꽤 나중의 일이지만 갈리시아 지방으로 들어서면 밤이 지천이었다. 이른 아침 포도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여서 포도를 한 송이 얻어 먹어봤다. 포도는 껍질이 두껍고 알이 작았지만 향이 오래 남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사실 와인로드(wine road)이기도 하다. 스페인 와인은 고대 로마의 길을 따라 로마에 납품을 하기도 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에스텔라에서 하루만 더 걸으면 스페인유명 와인 산지인 리오하주에 들어선다. 리오하는 전세계 와인 생산량의 13%를 차지하는 스페인 최대의 와인 생산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이 이 스페인 와인이다. 값싸고 질 좋은 와인을 늘 쉽게 구할 수 있다. 심지어 아무 가게나 들어가 라벨이 붙어있지 않는 동네표 와인을 사도 맛있었다. 그리고 와인인심도 좋다. 순례자 메뉴를 시키면 테이블마다 와인이 한 병씩 나오곤 했다. 순례자들도 거의 매일 저녁 와인을 사서 나누어 마셨다. 

와인 인심의 최고봉은 이라체마을에 있었다. 마을에는 보데가 이라체 (Bodegas Irache) 와이너리가 있다. 이곳이 그 유명한 '기적의 와인샘'이다. 과거 수도원에서는 이렇게 순례자들을 위해 빵과 와인을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와인이 끊이지 않는 마법의 샘이라니... 생각만 해도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온다.
산타아고 순례길은 와인길이기도 하다 리오하주의 와인밭 ⓒ 정효정
이곳이 그 유명한 마르지않는 와인의 샘 이라체 마을에 있다 ⓒ 정효정
기대를 품고 와이너리에 도착하니 이미 익숙한 얼굴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수도꼭지를 한번 틀면 한 모금 정도의 와인이 나왔다. 와인탱크에 튜브를 연결해 바깥에 수도꼭지를 단 구조다. 와인으로 입술을 축이고 잘 익은 포도밭을 보니 내 포도밭도 아닌데 괜히 뿌듯하다. 마음 같아선 오늘 같은 날은 걷기보다 포도밭에서 와인병을 끼고 가을하늘이나 올려다보고 싶다.

로스아크로스(Ros Acros)에 도착한 날은 추석이었다. 한국에서 서쪽으로 7시간 거리, 달은 유난히 크게 떠 있었다. 다음날 아침, 길 위에는 어제 밤에 본 달이 아직 떠 있었다. 어찌나 큰지 마치 달을 향해 걸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달이 아직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등 뒤로는 해가 뜨고 있었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저 달이 지는 방향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있다. 문득 내가 가는 방향이 서쪽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동쪽이었다면 저 태양을 마주보며 걸었을 거고, 길이 끝날 때쯤이면 얼굴엔 자외선으로 인한 기미가 가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달이 지는 곳으로 걷고 있다. 이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즐거움으로 넘쳐흘렀다. 남자를 찾는다며 무작정 떠난 길, 앞으로 뭘 찾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 풍요로운 가을을 가로질러.
달이 지는 방향으로 떠나는 길 2015년 추석 달이 지는 모습이다 ⓒ 정효정
'지저스'의 재림

로그로뇨에 도착한 다음 날, 한국인 순례자들과의 단톡방이 울렸다.

"언니, 어디예요? 로그로뇨 도착했어요? 공립 알베르게에 안 묵으셨죠?"

한 동생의 질문에 나는 느긋하게 답했다.

"로그로뇨에 왔어. 중간에 다니엘을 만나서."
"만났어요? 지금 둘이 같이 있어요?"
"응, 같은 방, 같은 침대야."

순간 단톡방에 소요가 일었다. 잠시 킬킬 웃으며 그들의 반응을 보다가 오해가 길어지면 안될 거 같아서 수습했다.

"같은 침대이긴 한데, 그가 아래침대, 내가 윗 침대. 여기 사설 알베르게 4인실이야."

김샜다는 반응이 나왔다. 미안하긴 했지만 이게 현실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와의 거리는 4인실 이상 좁혀질 수 없었다.
로그로뇨시내 로그로뇨는 리오하 주의 주도로, 와인으로 유명하다 ⓒ 정효정
사흘 전, 에스텔라에서 헤어졌던 다니엘이었다. 하지만 헤어진 다음날. 로스아크로스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을 때였다. 종달새처럼 한국 동생이 내 방으로 뛰어들어왔다.

"언니! 언니! 다니엘 왔어요."
"어제 작별인사도 했는데?"
"지금 리셉션에 있어요."

영문은 모르겠지만 다니엘이 왔다. 지금 이 숙소에 남은 방은 40인이 묵는 이 공간밖에 없으니 그는 이 방으로 들어올 것이다. 일단 너무 반가워하는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2층 침대에 반쯤 기대앉아 카메라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발을 건드린다. 다니엘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는 듯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에스텔라에 하루 더 묵는다더니?"
"별로 할 게 없는 동네여서. 차라리 로그로뇨가 대도시니까 거기서 하루 더 묵을래."

그렇게 헤어진 지 하루 만에 싱겁게 다시 만났다. 그리고 난 방금 전까지 산소가 부족할 정도로 답답했던 40인실이 순식간에 맑고 향기롭게 변하는 기적을 보았다. 지저스의 재림이었다. (관련 기사 : 산티아고 순례길, 한밤중 숙소에서 생긴 일)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그가 물었다

로그로뇨로 향하는 날, 이날은 총 28km를 걷는 긴 코스였다. 길이 지겨워지고 있는데 저쪽 벤치에서 앉아있던 누군가 손짓을 했다. 다니엘이었다.

가까이 가보니 그는 스마트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서 사과를 먹으며 잠시 쉬고, 그는 문자를 마저 보냈다. 안보는 척 하면서 흘깃 보니 문자를 보내는 손길에 짜증과 답답함이 묻어있었다. 순간, '여자친구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 부러지게 설명은 못하겠지만, 살면서 저절로 발휘되는 능력 중 하나다. 아마 여자친구가 말을 쏟아내고, 그가 방어하고 있는 상황일 것이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는지 그가 스마트폰을 껐다. 그냥 모르는 척하며 함께 길을 걸었다. 함께 걷는 길은 여전히 즐거웠다. 그는 내게 무화과를 따주고, 스페인어 숫자를 가르쳐주고, 갑자기 한국어 노래를 부르겠다며 엉터리 한국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이 그에게서 나왔다.

"...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리오하의 밭 리오하 와인의 주요 품종인 뗌쁘라니요와 가르나차가 자라는 붉은 흙이다 ⓒ 정효정
포도밭에서 일하는 사람들 부탁하면 탐스런 포도를 얻을 수 있다 ⓒ 정효정
대체 이 질문은 어떤 경로로 나온 걸까. 방금 나누었던 대화들을 복기해봤지만 맥락이 안잡힌다.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깨닫기 전이라면, 내게 작업을 거는 멘트라고 오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난 이제 막 육감을 사용해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음을 간파한 상황이다. 어쩌면 내 의견을 듣는 것보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해서 먼저 그의 의견을 구해봤다.

"글쎄.... 너는 뭐라고 생각해?"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고 감정을 주는 거지. 되돌려 받지 못하더라도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해 "

그리고 그는 천천히 생각하며 덧붙였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에, 그래서 인간에겐 '서약' 같은 것이 필요한 걸 거야."

서약이라... 사랑에 대한 서약은 하나다. "결혼" 나는 결국 궁금함을 못 참고 물어봤다.

"왜? 여자 친구가 결혼하자고 해? 아까 문자 보내던 거 여자 친구였지?"
산티아고 길의 한국인 여성 순례자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들 자신만의 질문을 품고 있었다 ⓒ 정효정
그는 대답 대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결혼의 고민을 하고 있는 지저스라니. 그동안 그가 내게 많은 말을 했던 건 내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가진 고민이 많아서였나보다. 그늘이 진 잘생긴 얼굴을 보며 나는 며칠간 멋대로 설레었던 내 마음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그리고 고민을 잘 들어주는 의리있고 실속없는 '여자사람친구'가 되어 그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줬다.

다니엘의 고민은 이 지점이었다. 그는 결혼이 불합리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결혼은 그동안 인간의 역사에서 지나치게 미화되었고, 그 이유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노동력이 필요했던 농경사회에서 필수였기 때문이란다.

문제는 결혼에 대해 시니컬한 그와 달리 여자친구는 결혼에 대해 매우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 그녀를 잃고 싶지않기에 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결혼을 한다는 상황 자체가 그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대체 결혼은 왜 필요한 거지?"
로그로뇨로 향하는 길고 지루한 길 하루 20~22 km는 적당한 이동거리였지만, 25km 이상은 좀 힘들었다. ⓒ 정효정
그는 물어볼 상대를 잘못 골랐다. 차라리 '고대의 외계문명'에 대한 내 의견을 물어보는 게 나을 텐데. 보통 기혼자라면 이쯤에서 '인생의 깊이를 알기 위해서는 결혼을 해봐야 한다.' 혹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할거면 해보고 후회하라' 정도의 조언을 할 텐데, 불행히도 나는 그런 조언은 해줄 처지가 아니었다.

사실 결혼에 대한 관심도 자체가 좀 낮은 편이다. 각자가 느끼는 결혼에 대한 인식이 '아주 중요함', '중요함', '보통임', '안 중요함', '절대 안 중요함' 정도라면, 내 위치는 '보통임'과 '안 중요함'의 사이인,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 '정도의 레벨이다.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중 하나긴 하지만, 그것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결혼 또한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중 하나긴 하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결혼은 내 인생의 to do 리스트나 wish 리스트에서 늘 하위권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고 결혼 자체를 무시하는 건 아니다. 사실 결혼이라는 제도에 속하기 위해선, 여자든 남자든 포기해야하는 것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운 것을 평생 해내겠다는 결심을 하는 거다. 그것도 언제 자취를 감출지 모르는 '사랑의 힘으로'. 물론 완수해내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 결심 자체는 노력상이라도 받아 마땅하다.
로스아크로스가는 길에 만난 연주자 순례자들 위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었다 ⓒ 정효정
때문에 '사랑의 증명'이라는 말을 하며 지금껏 소중히 지켜온 순결이라도 잃은 표정을 짓는 다니엘이 이해가 안 가기도 했다. 증명을 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사랑이 있다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닌가? 하지만 지금의 다니엘에게 필요한 말은 아닐 것이다.

고민 끝에 지난 여행에서 만난 한 한국계 독일인을 떠올렸다. 아직 20대였던 그녀는 지난해 결혼을 했다고 한다. 보통 유럽권에선 결혼보다 동거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녀에게 결혼한 이유를 물어봤다.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독일은 결혼하는 편이 세제혜택이 많거든. 둘이 싱글로 빠져나가는 돈을 계산해보니까 어마어마하더라고. 그 돈이 아까워서 결혼했어."

어차피 독일사회에서는 결혼이든 동거든 큰 상관이 없지만, 결혼을 하는 편이 삶에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서 결혼을 했다는 거다. 나는 그녀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차라리 두 사람의 장래에 확실히 플러스 되는 요인이 있는지 제도적 장점을 찾아보는 건 어때? 장점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말고. 결심이 쉬워지지 않겠어?"
히브리어책 히브리 문자를 그때 처음 봤기에 무척 신기하게 느껴졌다 ⓒ 정효정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의 최선이었다. 로그로뇨에 도착한 다음날 오후, 그는 버스를 타러 떠났다. 헤어질 때, 그는 현관에 세워둔 자신의 나무지팡이를 가리켰다.

"저거 정말 좋은 나무인데, 네가 가질래?"

순간 갈등했다. 지저스가 주는 거라면 뭐든 받아야겠지만, 내겐 이미 가볍고 튼튼하고 심지어 길이까지 조절할 수 있는 등산스틱이 2개나 있다. 그러자 그는 누구든 필요한 사람이 썼으면 좋겠다며 숙소에 그 나무 지팡이를 두고 갔다. 나도 그의 나무 막대기가 좋은 주인을 찾길 바랬지만, 나중에 숙소주인이 가져다 버리는 걸 막진 못했다.
보통 순례자들이 들고 다니는 등산스틱 가볍고 튼튼하고 길이까지 조절할 수 있다 ⓒ 정효정

그가 떠난 지 한 달 후, 나는 그의 페이스북에서 웨딩사진을 봤다. 이렇게 빨리 결혼할 줄이야... 아마 당시 결혼을 앞두고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에 온 듯했다. 그가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고 결혼했을지 궁금했지만, 따로 메시지를 보내서 물어보진 않았다. 그의 결혼이 그의 표현대로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미약한 인간의 서약 '이 아니라, '두 사람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었길 바랄 뿐이다.

로그로뇨에서부터 나는 혼자가 되었다. 며칠 붙어 다녔던 다니엘은 이스라엘로 돌아갔고, 다른 한국인 순례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곧 새로운 여행 동료가 생겼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고질적인 동반자, 물집이었다.
로스아크로스에서 바라본 추석 달 한국에서 서쪽으로 7시간의 공간에서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 정효정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에 괜찮은 남자가 많다'는 말만 듣고 800km를 걸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태그:#산티아고, #카미노, #CAMINO, #로그로뇨, #순례길
댓글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