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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대

몇 해 전 호남의병전적지 답사로 전라남북도 전역을 대여섯 차례 누볐다. 백수십 년 전의 옛 의병전적지를 더듬는 일은 수월치 않았다. 의병전적지는 대부분 산골에 있었는데 그곳에는 도시 사람도 없었고, 행여 사람을 만나도 '의병'에 대해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의병 후손을 애써 찾아 그분들의 안내로 현장을 답사하고, 그 증언으로 주로 기사를 썼다. 나주의 김태원·김율 형제 의병장을 취재할 때, 후손 김갑제씨에게 의병전적지 안내를 청했다. 그러자 흔쾌히 자기가 근무하는 <무등일보>에서 일단 만나자고 했다.

그때 나는 고광순 의병장 생가마을인 담양 창평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곳을 물어물어 찾아가면서 그 언저리를 살펴보니까 바로 옛 광주보병학교 상무대 부근이었다. 그런데 그 일대는 그새 그야말로 상전벽해로 고층아파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들어서는 등, 새로운 도심지로 변해 있었다.

그곳 상무대는 한국전쟁이 한창 치열했던 1952년에 세워졌다. 그곳에 육군 보병학교, 통신학교, 포병학교, 기갑학교 등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상무대(尙武臺)'라는 이름을 얻었다. 대한민국 육군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었다.

그 상무대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계엄군 지휘소와 군 법정 감옥의 설치로,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고문 구타당한 곳이 됐다. 원성의 대상이 됐음은 당연하다.

1994년에 보병학교 등, 육군 교육기관이 인근 장성으로 옮겨 이제는 그 일대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그새 역사의 뒤꼍길에 자리하게 됐다.

아무튼 상무대는 많은 이들에게 추억과 통한 그리고 아픔의 장소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광주 상무대는 임관 후 16주 기초보수교육을 받았던 추억의 곳으로, 많은 감회가 각인돼 있다.

일흔이 넘은 지금, 그때를 돌이켜 보니까 매우 힘들었다는 기억과 함께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은 자기가 생각한 이상이라는 사실을 터득했다. 그리고 그때의 받은 교육을 통해 얻은 것은 불굴의 도전정신과 인고(忍苦) 등이었다. 내가 오늘까지 쓰러지지 않고 살아오는 데는 역설적으로 그때 받은 교육의 힘이 매우 컸다고 생각한다.

16주 기초보수 교육

광주보병학교 16주 기초보수교육기간 중 첫 4주는 병 대우, 다음 4주는 하사관 대우, 다음 8주는 장교 대우라고 했다. 그런 탓인지 전반기 8주는 무척 힘들었다. 첫 4주는 머리도 박박 깎는 데다가 외출·외박은 물론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다.

내무생활은 엄청 피곤했다. 일과가 끝나도 병기손질, 청소, 관물 정돈, 보초 근무 등으로 도무지 쉴 시간도 없었고, 수면시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도무지 구대장들은 잠잘 시간을 주지 않았다.

상무대 각개전투 교장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을 받고 있다(1969. 3.)
 상무대 각개전투 교장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을 받고 있다(1969. 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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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어떻게나 졸렸는지 구보를 하면서도 졸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P.X.에서 사온 삼립빵을 입에 문 채 그대로 자다가 구대장에게 발각되어 매를 맞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 생활이 한 달 정도 지나자 내 얼굴은 완전히 구릿빛이요, 손은 농사꾼의 부르튼 손처럼 거칠게 변해 있었다.

육군 보병학교에서야 육군 정량대로 급식을 했을 테지만 그때는 삼시세끼를 꼬박꼬박 챙겨먹어도 늘 배가 고팠다.

초기 교육기간은 깨어있는 한 뛰고 기는, 기합과 매 맞는 때였으니 그때 위장은 아마도 쇠라도 녹일 만큼 소화력이 왕성했던 모양이었다.

4주가 지나자 주말에 면회가 허용됐다. 부산에 사는 여동생이 면회를 왔는데, 그가 가져온 통닭을 반은 뜯은 후에야 가족의 안부를 물었을 만큼, 지금 생각하면 난 창피할 정도로 식충이었다. 내가 평생 밥투정 반찬투정하지 않고, 후딱 먹어치우는 것은 아마도 그때 식습관 때문일 것이다.

8주가 지나자 외출이 허용되었는데, 조건은 군인복무규율과 국민교육헌장을 다 암송한 자에 한해서였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 에 이바지할 때다…."

그런데 그게 잘 외지지 않았다. 육군 정복에 잔뜩 멋을 내고 외출 준비를 한 우리 교육생들을 연병장에 도열시킨 채 중대장이나 대대장은 암송 테스트를 했다. 국민교육헌장을 처음부터 암송시킨 게 아니라 주로 중간 부분부터 암송시키자 더듬거리기 마련이었다. 탈락의 쓴 잔을 마시고 외출치 못한 채 다시 달달 왼 뒤 테스트에 간신히 통과해 광주 시내로 나갈 때, 가슴이 터질 듯했다.

외출과 외박

우리 학훈단 동기생들은 광주 시내에 가면 대체로 불고기, 만두, 탕수육 등 먹을거리를 잔뜩 먹었다. 그런 뒤 목욕탕에 가서 몸을 닦은 다음, 다방에 가서 커피를 거푸 두세 잔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소화를 시킨 뒤 다음, 다시 먹을거리를 목구멍까지 차오르도록 먹고 귀대했다.

상무대 시절 외출에서 돌아올 때 정문 앞에서(1969. 6.)
 상무대 시절 외출에서 돌아올 때 정문 앞에서(1969. 6.)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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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이나 외박 후 귀대한 그날 저녁엔 각 중대마다 으레 전원 특성 훈련이 있었다.

"각 내무반 전달! 5분 내 완전군장에 연병장에 선착순 전원 집합!"

일직사관의 전달에 우리 피교육생들은 함께 내무반에서 군장 꾸리기에 부산하기 마련이었다. 배낭에 방독면, 철모에 M1 소총을 메고 연병장에 뛰어나가면 한두 동기생이 5분을 넘기기 마련이었다. 7~8분 만에 중대장 학생이 집합 보고를 하면 구대장은 핏대를 세웠다.

"이 새끼들 동작상태가 엉망이야! 지금 즉시 내무반으로 돌아가 군장들을 원위치 시키고, 5분 내로 취침한다. 알았나?"
"네엣!!!"

우리들은 복창한 후 부리나케 각 내무반으로 돌아가 관물들을 원위치를 시키고 취침상태로 들어갔다. 다시 한 30분이 지나 막 잠들 무렵이거나 이미 잠에 곯아떨어졌을 무렵 다시 불침번의 복창이다.

"각 내무반 전달! 5분 내 완전군장으로 연병장에 선착순 전원 집합!"

그렇게 두세 번 비상집합에 연병장 구보를 한두 시간가량 하고 나면 잔뜩 불렀던 배가 다 꺼져버리기 마련이었다. 특성 훈련이 끝나 내무반으로 돌아오면 다시 먹을 것을 찾기 마련이었다.

"야, 누가 먹을 것 꼬불쳐 놓은 것 없냐?"


'특공훈련'

'특공훈련' 때 46번 독수리였던 기자(1969. 5.)
 '특공훈련' 때 46번 독수리였던 기자(1969. 5.)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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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7기 학훈단에게는 '특공훈련'이라는 교과가 새로 생겨났다. 아마도 그것은 그 당시 북한군 특수훈련에 자극을 받아 그에 대비한 특수훈련으로 기존의 유격훈련을 강화시킨 듯했다.

우리는 계급장과 군번을 모두 반납했다. 나는 '46번 독수리'였다. 훈련복도 억센 옷감인 특수복장이었다.

교육내용은 도피 및 도망, 도하, 대검투척, 암벽 타오르기, 암벽 뛰어내리기, 줄 타고 하강 등으로, 훈련 강도가 몹시 셌다.

훈련 중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전사고가 나기 마련이었다. 나는 이 훈련을 통해 사람은 독한 마음을 먹으면 불가능은 거의 없다는 것을 깨우쳤다. 

특히 도피 및 도망 훈련 때 그날 밤 장성의 불태산을 넘었는데 그날이 내 제삿날인 줄 알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두컴컴한 밤에 길을 잃어 넘어지고, 절벽에서 떨어지는 등, 그날 밤 그 산골짜기에서 그대로 죽는 줄 알았다. 그런 교육을 통해 극한 훈련은 인간도 개조시킬 수 있다는 것을 터득했다.

나는 이 훈련을 통해 대검을 던져 10여 미터 밖의 나무에 정통으로 꽂을 수 있었고,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대항군을 제압하고 적진을 탈출할 수 있는 능력도 길렀다.

이 특공훈련으로 다른 중대에서 두 명의 동기생이 희생됐다. 이들의 희생비는 홍익대 출신 동기생 고 이두식 화백의 설계로 방송인 이상벽씨 등이 주동이 돼 세웠다고 한다. 그 자리에 참석한 동기생들은 스페인 민요 <친구의 이별>을 부르며 그들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이 화백은 그때의 정황을 울먹이며 전했다.

서편의 달이 호숫가에 질 때에
저 건너 산에 동이 트누나
사랑빛이 감도는 빛난 눈동자에는
근심어린 빛으로 편히 가시오
친구 내친구 어이 이별 할까나
친구 내친구 잊지 마시오.

그 얘기를 전한 이 화백도 몇 해 전에 선종했다.

동기생들 가운데는 광주 인심이 짜다고 불평했지만 내 경우는 그와 반대였다. 그해 5월 하순, 우리 중대는 '중대 공격과 방어' 교육을 받으러 보병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장성의 어느 멧부리 교장에 갔다.

우리 교육생들이 야외 교장에 막 도착하자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 마땅히 피할 장소도 없었다. 우리들은 우의를 입은 채 교장 잔디계단에 앉아 10여 분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지만 하늘은 구멍이 뚫린 듯 굵은 빗방울이 그치지 않았다.

담당 교관은 내내 하늘을 쳐다보다가 악천후로 더 이상 교육이 불가능해지자 결단을 내렸다. 그는 오전 교육을 오후에 몰아서 하겠다고 하면서 어디 가서 비를 피하고 12시 50분까지 교장으로 집합하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피교육생들은 오랜만에 3시간 남짓 자유 시간이 생겼다. 그때의 기쁨이란…. '자유'가 그렇게 좋을 줄이야.

우리 피교육자들은 교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후딱 산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마을에 이르자 하늘은 언제 비를 쏟았나 싶을 정도로 금세 쾌청했다. 우리들은 휘파람을 불면서 꿀맛 같은 자유시간을 누렸다.

특공훈련 중 암벽 하강(1969. 5.)
 특공훈련 중 암벽 하강(1969. 5.)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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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욱국

우리 내무반 친구들은 어느 초가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주인아주머니가 혼자서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처지를 말하고 밥값을 드릴 테니 점심밥을 좀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마땅한 찬거리가 없다면서 사양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찬이나 괜찮다고 했더니 그제야 집안으로 들게 했다.

우리는 그 집 대청과 안방 건넌방에서 젖은 옷을 말리면서 그야말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자유시간을 즐겼다.

그 틈에 편지를 쓰는 친구, 부족한 잠을 청하는 친구…. 아주머니는 남새밭에서 아욱을 뜯어다가 국을 끓이고 한편에서는 장작불을 지펴 무쇠밥솥에다가 밥을 한 솥 가득 지었다.

한 시간 남짓 지나자 아주머니는 대청에다 큰상을 펴고 밥상을 차렸다. 머슴 밥처럼 밥주발에 고봉으로 하얀 쌀밥을 담아줬다.

그 밥을 먹자 입안에서 녹았고, 특히 아욱국 맛은 기가 막혔다. 우리들은 혁대를 풀고 한솥밥을 다 먹었다. 우리들은 밥상을 물린 후, 내가 밥값을 추렴해서 아주머니에게 건넸다.

"관두시오. 얼매나 집 밥이 그리웠으면 내 집을 찾아왔것소."
"아닙니다. 받으세요."
"아니라오. 참말이오. 아, 내 집 놈도 군에 갔는디 어떡키소롬 군인한테 밥값을 받것소."

아주머니는 한사코 밥값 받기를 사양했다. 우리들은 모두 장성 산골 인심에 어리둥절했다. 나는 모은 돈을 대청 구석의 쌀뒤주 안에다 슬쩍 넣었다. 그새 젖은 옷도 대충 말라서 주섬주섬 입고 아주머니에게 밥 한 끼 잘 얻어 먹고 떠난다는 하직 인사를 하고 산 위 야외교장으로 후딱 올라갔다.

육본 인사명령

마침내 16주 교육이 끝났다. 보병학교에서는 수료식 전날 연병장에 피교육생들을 전원 집합시키놓고 육군본부 인사명령을 전달했다. 나의 실무부대 배치는 보병 제26단으로 명령이 나 있었다.

나는 그곳이 어딘지도 잘 몰랐다. 군대 정보가 빠른 한 친구가 말했다. 그 사단은 의정부 북쪽에 있는 부대로서, 경계근무와 교육이 몹시 센 곳이라고 귀띔했다.

그 말에 아찔했지만, 한편으로는 남은 24개월 뭐로도 때우지 못하겠는가 하는 오기가 치솟았다. 입교 전 나약했던 나는 그새 그렇게 변해 있었다. 나는 동기생들과 함께 다시 더플백을 메고 송정리 역에서 용산행 군용열차에 올랐다. 그때는 모두 작업복 차림으로 풋내가 물씬 풍기는, '싱싱한' 소위들이었다.

그렇게 무서웠던 보병학교의 대대장, 중대장, 구대장과 교관들은 송정리 역 플랫폼까지 전송을 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들의 환송에 우리 동기생들은 지난날의 반감은 다 잊어버리고 "통일!"이라는 구호를 단체로 붙이며 거수경례로 답했다('통일'은 그때 보병학교 경례 구호였다).

삶이 그대들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마침내 기쁨의 날은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인생은 미래에 사는 것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리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는 것이다.
 - 알렉산더 푸쉬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렇게 나의 보병학교 상무대 시절은 푸쉬킨의 시구처럼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 나는 백발이 귀찮아 삭발을 한 채, 싱싱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젊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이다. 안녕! 나의 상무대 시절이여….

(* 다음 글에 계속)


태그:#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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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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