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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가 사라진다. 글로벌 저성장 기조와 기술의 발달은 우리 모두를 일자리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평생직장의 시대는 오래 전 끝났고, 100세시대 누구나 2~3번의 일(業)을 해야 생존한다. 국가도 사회도 답해줄 수 없는 문제, 결국 개인이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내 일은 내가 만들어가야 하는 시대다. 직장을 다니면서, 또는 홀로서기를 통해 '1인기업'을 운영해온 이들에게서 답을 찾고자 한다. '직장 다닌다고 직업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찍 간파한 '1인기업가'들의 경험담을 통해 해법을 찾아본다. [편집자말]
2014년 <세상을 통역하다> 책 출간시 표지로 썼던 박혜림씨의 프로필 사진.
 2014년 <세상을 통역하다> 책 출간시 표지로 썼던 박혜림씨의 프로필 사진.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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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성적에 맞춰 부모님이 좋아할 만한 전공을 선택해 성균관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고3때 입던 똑같은 트레이닝복과 방석을 들고 와 사법시험 공부를 하는 친구들의 모습에 아연실색 질려버렸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 느꼈지만 적성을 찾지 못해 방황했다. '뭐하고 살아야 하지, 나는 뭘 좋아하는 사람이지?' 고민이 시작됐다. 영어 통번역사 박혜림 유노이아 대표(37) 이야기다.

막연히 영어가 재미있었다. 교내 봉사활동으로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통역을 하면서 영어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즐거움을 느꼈다.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는 이들 사이에서 가교가 돼 양쪽을 이어주는 역할에 매료됐던 것이다. 진로를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2003년 8월 롯데그룹에 입사하게 됐다. 경영관리본부 소속으로 그룹 총괄사장의 전문비서로 특채된 것이다.

"첫 직장은 스스로 찾은 진로가 아니었어요. 한 계열사 사장님께 지사로 나가게 되면 국제업무를 담당해보고 싶다는 뜻을 전했더니 일본출장 때마다 만나는 롯데그룹 일본어 통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통역 업무는 물론이고 모든 분야에 준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춘 멋진 분이라고요. 그 순간 제 머릿속을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어요. 통번역사!"

통번역전문가가 되기 위해 통번역대학원 진학을 결심한 박씨는 한 달간의 고민 끝에 퇴사라는 배수의 진을 쳤다. 주 6일 근무인데다 회사는 불법대선자금 수사로 어수선한 상황이라 오전 8시 출근하면 밤 11시~새벽 1시에 퇴근하기 일쑤였다.

"MBA도 로스쿨도 아니고 생뚱맞게 통번역대학원 유학을 가겠다니 다들 말렸어요. 특히 부모님은 유학 갔다 오면 스물아홉인데 결혼하기에도 늦은 나이인데다 오라는 직장도 없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시며 결사 반대하셨죠. 하지만 저 역시 진로를 못 찾아서 방황했던 고통이 컸기 때문에 꼭 가야겠다고 굽히지 않았습니다."

롯데그룹 퇴사 후 미국 통번역대학원 유학 '동시통역사의 길'

2005년  몬트레이 국제대학원(현 미들베리 국제대학원) 재학 당시 및 졸업식 모습.
 2005년 몬트레이 국제대학원(현 미들베리 국제대학원) 재학 당시 및 졸업식 모습.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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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한 바로 다음날 학원에 등록해 공부를 시작했고 국내보다 외국에 있는 대학원을 목표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듬해인 2005년 세계 3대 통번역대학원 중 한 곳인 몬트레이 국제대학원(현 미들베리 국제대학원 Middlebury Institute of International Studies at Monterey)에 합격했다.

"미국 땅에 떨어진 첫날부터 후회했어요.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승합차로 3시간반가량 이동해 도착한 곳은 그야말로 시골이었어요. 다른 친구들은 근처에 친척이나 친구가 있거나 미리 숙소를 알아보고 왔는데 저는 그저 가방만 챙겨 가면 학교에서 어떻게 해줄 거라 생각했었어요. 그때까지 온실 속 화초로 자라 해외 배낭여행 경험조차 없었으니까요."

2005년 8월 학기가 시작이 됐고 도전정신으로 의욕이 넘치던 박씨의 자신감은 금세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기생들 대부분 어린 시절 외국생활을 경험했거나 어문학과 출신이거나 하다못해 남자친구가 외국인인 영어와 끈끈한 연관성을 지닌 이들이었다. 공부를 할수록 기본기가 부족함을 실감했고 매순간 느껴지는 위기의식으로 '졸업을 못하면 어쩌나'하는 말을 달고 살았다.

"번역이든 통역이든 수업방식이 '크리틱(Critic 제출한 숙제에 대해 잘못된 점, 나쁜 점 위주로 코멘트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말이 좋아 건설적인 대안으로서 비평이지 자꾸 듣다 보면 자신감이 끝없이 하락하는 경험을 하게 돼요. 통번역대학원 공부가 힘들다는 것이 바로 이런 부분을 감당해낼 만한 멘탈이 필요하다는 의미인 것 같더군요."

졸업시기에 맞춰 지원한 3곳 모두 운 좋게 합격했고 그 중 한 곳인 서울시 정보화기획단에 입사했다. 4개월 일한 후 외국계 컨설팅사로 이직해 2년8개월간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다.

5년간 앞만 보고 달리던 삶에 브레이크가 걸리다

케이블T의 일반인 대상 서바이벌 프로그램 ‘뷰티워?피부의 여왕’ 출연 당시 모습.
 케이블T의 일반인 대상 서바이벌 프로그램 ‘뷰티워?피부의 여왕’ 출연 당시 모습.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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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서치 업무를 비롯해 번역, 보고서 검토, 언론접촉 등 대외홍보까지 온갖 잡다한 일은 다 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눈 상태가 나빠져 검사했더니 '황반원공'이라는 거예요. 당장 수술을 해야 하고 2~3개월은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라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서른 두 살의 미혼여성, 직장도 없고 남은 건 병든 몸뿐이었다. 2010년 6월, 수술 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또다시 진로 고민이 시작됐다.

책을 읽을 수도 운동을 할 수도 없었던 상황, 케이블TV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뷰티워–피부의 여왕' 지원자 모집 광고를 보곤 불쑥 용기가 생겼다. 셀카로 찍은 프로필 사진을 올렸더니 제작진으로부터 연락이 왔고 한 달간 매주 2명씩 탈락하는 와중에 최종 3인에 오르게 됐다.

"그 동안 제가 살아왔던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죠. 그리고 당시 바닥상태였던 자신감이 회복되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그때 통번역업계로 돌아가 보자는 자신감도 함께 생겼어요."

통번역사를 채용하는 곳마다 지원서를 제출했고 그 중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가 있었다. 몇 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국제규모의 행사인 만큼 경쟁은 치열했고 2번의 서류심사를 거쳐 최종 선발된 10명의 지원자들 중 까다로운 인터뷰를 거쳐 박씨가 최종합격 했다. 실현 불가능할 것 같은 목표라도 일단 발을 떼놓고 보면 기회는 찾아온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2010년 12월말 유치위에 들어간 이후 해외출장의 연속이었다. 입사 3주 만에 떠난 1월 중순 첫 이탈리아 출장, 충분히 적응할 시간 여유가 없었던 터라 첫 통역을 마친 후 특임대사로부터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에도 통역마다 어떤 점이 잘못됐는지 지적 받고 깨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한 달의 절반은 해외에서 보냈고 출장이 없는 날엔 통번역 감각을 찾기 위한 스터디로 쉴 틈이 없었다. 개최지 결정까지 가장 집중해야 할 행사 중 하나인 2011년 4월 런던 스포츠어코드(SportAccord)에서 박씨는 자신의 한계를 깨는 계기를 맞게 된다.

30개국 돌며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 활동... 또다시 가시밭길로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그리스 출장 당시.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그리스 출장 당시.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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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부터 한 시간 단위로 미팅이 이어져 장장 8시간 동안 통역을 해야 했어요. 머리가 빙빙 돌 지경이었는데 숙소에 들어가기 전 좀처럼 칭찬 안 하시던 특임대사님이 '오늘 통역 아주 좋았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순간 만감이 교차했어요. 한계를 극복한 저 자신이 뿌듯했어요."

그해 7월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평창이 확정됐고 유치위가 해산한 10월 박씨의 계약기간도 만료됐다. 당연히 조직위에 남을 거라 예상됐던 박씨는 다른 선택을 했다.

"유치위원회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다했던 것 같아요. 제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롯데를 나와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그때도 그랬었죠. 조직에 계속 남아있으면 조금 편해질 수 있었겠지만 제가 가고 싶었던 길이 아니었어요. 누군가 저에게 절대 남이 물어다 주는 고기를 먹지 않는 사냥개 같다고 했으니까요."

'뷰티워' 출연으로 인연을 맺은 작가로부터 Mnet '슈퍼스타K3' 미국인 출연자의 통역을  제안 받았다. 생소한 경험이었지만 또 한 번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인터뷰 요청과 프로그램 출연 섭외가 줄이었다. 방송과 출판사에서 박씨의 이름으로 영어강좌나 교재를 만들자는 제의가 이어졌고 영어교육 분야에 눈을 뜰 수 있었다.

2013년 유노이아라는 이름으로 개인사업자 등록과 함께 출판사까지 등록했다. 목적은 영어교육 콘텐츠 제작과 유통을 전자책으로 간편하게 하자는 것. 1인기업 유노이아는 영어 통번역, VIP 영어컨설팅, 출판 등 3가지 일을 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글로벌 역량을 키우는 콘텐츠'를 제작 유통하는 것이 목표다.

편안함 추구보다 도전 즐겨 "가시밭길이지만 내 길 갈 것"

2011년 10월 Mnet ‘슈퍼스타K3’에 출연 미국인 출연자 크리스의 통역을 맡게 됐다.
 2011년 10월 Mnet ‘슈퍼스타K3’에 출연 미국인 출연자 크리스의 통역을 맡게 됐다.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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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기업으로서 수입은 프리랜서로 일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사업을 시스템화하면서 버는 족족 재투자비로 들어간다는 점이 크게 달라졌다.

"대기업에 다니는 제 또래라면 과장이나 차장쯤 될 텐데 연봉으로 치면 그 이상은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경험을 쌓는 시간인 만큼 미래를 보고 투자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선택한 가시밭길이고 비포장도로이니 버텨야겠죠. 저에게 편안함은 중요한 가치가 아니예요. 내가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밀어붙이는 일이 힘들지만 즐거웠으니까요."

박씨는 1인기업에 도전해보고자 하는 청년들이 꼭 갖춰야 할 자질로 질문력과 문제해결력을 꼽았다.

"사회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너무 일찍 사업부터 시작하면 더 힘들 수도 있어요. 경험을 통해 그만큼 시야가 넓어지고,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이 분명해지니까요. 제 커리어는 한마디로 '갈지(之)자'였어요. 30대 초반엔 열등감에 시달릴 때도 있었죠. 하지만 스티브 잡스의 말 'connecting the dots'처럼 뒤돌아 보면 연관성 없어 보였던 일들이 연결돼 지금 저를 만들었고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요. 그 모든 과정들이 참공부였다고 생각합니다."


태그:#1인기업, #동시통역사, #평창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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