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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때였나보다. 수업이 끝나 어둑해진 교실 한구석에서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집에 가려고 기다리던 친구들이 깜짝 놀라서 달려왔고, 쉽게 눈물이 멈추지 않는 나는 이유도 말하지도 못한 채 책상에 엎드렸다.

"왜 그래? 야, 무슨 일이야?"

친구들의 웅성거림과 위로에 간신히 꺽꺽거리는 울음을 삼킨 채 고개를 들고 한 말이, 지금 다시 떠올려도 부끄럽다.

"체력장. 내일 체력장. 점수 깎이면 어떻게 해."

운동에 재주가 없다. 백미터 달리기의 최고 기록이 20초 대이고, 공은 제대로 잡기보다 '맞기' 일쑤이다. 그래도 그렇지! 초등학교 6학년짜리가 체력장 점수에 무슨 걱정이 그리 컸다고 저리도 서럽게 울었는지, 마흔을 넘긴 지금까지도 화끈거린다.

결국, 체력장은 그럭저럭 점수만 맞추는 선에서 끝이 났고, 나는 지금까지도 '운동 지진아'의 삶을 살고 있다. 보는 것에 만족하며, 그저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을 즐기고, 잘 하는 사람들의 경기를 '응원'하며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갖지 못한 능력에 대한 부러움과 열등감은 완전히 숨겨지지 않는다.

<완벽에 대한 반론>(생명공학 시대, 인간의 욕망과 생명윤리), 마이클 샌델(대학교수) 저.
 <완벽에 대한 반론>(생명공학 시대, 인간의 욕망과 생명윤리), 마이클 샌델(대학교수) 저.
ⓒ 와이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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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센델의 최신작 <완벽에 대한 반론>(The case against Perfection)을 읽으면서 어린날의 부끄러운 기억이 떠오른 것은, '완벽함'이라는 말로 자연스레 연상되는 '끝없는 욕심'때문이 아니었을까?

현대 사회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경쟁에 대한 신경증과 뒤처짐(혹은, 실패)에 대한 불안감은, 언제이고 '완벽함'에 대한 동경을 불러온다. 우리는 어쩌면, 절대 어떠한 실수도 하지 않고, 모든 것에서 출중한 능력을 지닌 '새로운 인류'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완벽한' 인류, 말이다. 어떻게?

저자는 '생명공학'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 질문에 답이 될 수도 있겠다고 말한다. 이 책 <완벽에 대한 반론>은 저자 마이클 샌델이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에 '대통령 생명윤리 위원회'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논의된 다양한 '명제'들에 대한 논쟁의 기록이다.

생명공학이 그리는 '완벽한' 미래에 대해 샌델이 이 책에서 던진 5개의 질문과 고민은 그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없을 뿐더러 내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고민을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미래는 이미 '급하게' 다가와 있고, 우리의 옆에서 '진입 허가'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도 함께 샌델이 던진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첫 번째 질문]
인류의 부족한 능력을 '강화'하는 행위는 비윤리적인가?

"성형수술과 마찬가지로 유전적 강화는 비의학적 목적을 위해 의학적 수단을 사용한다. 즉 유전적 강화의 목적은 질병의 치료나 예방, 신체적 손상 복구, 건강회복과 관계가 없다. 그러나 성형 수술과 달리 유전적 강화는 단순히 미용을 위한 것이 아니며 피부에 가하는 수술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 ...... 더 뛰어난 신체 능력이나 기억력, 더 높은 지능, 더 행복한 기분을 위해 유전공학 기술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더 불편한 기분을 느낀다. 문제는 그런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옳은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만약 옳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 p.23


인간은 언제나 '완벽함'을 추구하며, '불완전함'에 대한 보완을 원한다. 지금까지는 이러한 행위가 개인의 선택사항으로 용인되어 왔으나, 유전자 조작을 통해 '완벽하게 통제 가능한 행위'로 가정한다면, 이를 선택하지 않겠다는 '또 다른 선택'이 가능할까? 더 이상 불완전한 부분이 없는 '강화된' 인류로 채워진다면 그 사회는 완벽한 '평등'을 가져다 줄까? 우리는 더 이상 서로간의 끝없는 경쟁으로 서열을 세우지 않게 될까?

오후에 동료들과 잠깐 이 질문에 대해 얘기를 했다. 하지만, 결론은 '역시 불편하다'였고, 그리되면 각각의 인간이 '개성'으로 구별될 수 없을 것이고, '나도 없어지는 것'이기에 싫다고 하더라. 과연 모두에게 완전한 '평등'은 개인을 사라지게 할 것인가? 우리처럼 '간판'이나 '소속'으로 평가받는 세상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겠다.

[두 번째 질문]
스포츠에서의 유전적 강화를 반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정성의 관점에서 보면 유전적 강화로 인한 차이는 선천적인 차이와 마찬가지로 나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유전적 강화 기술이 안전하다고 가정한다면 누구나 이 기술을 활용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도덕적 이유로 스포츠에서 유전적 강화를 반대하려면 공정성이 아닌 다른 이유가 필요하다." -p.27


다음 달이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제 31회 하계 올림픽이 시작된다. IOC가 탄생한 지 122년 만에 남미에서 개최되는 올림픽이라는 역사성을 띠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수많은 잡음이 끊이질 않아 걱정스럽기도 하다.

올림픽과 관련된 최신 '걱정'은 러시아팀에 대한 '도핑 파문'이다. 이미 러시아는 육상과 유도에 출전이 금지되었다. 어떠한 스포츠에서도 '도핑'은 불법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만약 생명공학의 도움으로 특정 기능이 강화될 수 있다면, 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는 그들을 '자연인 그대로'의 능력으로 제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가? 그렇다면 이는 '효과적인 시스템'에 기반한 트레이닝과 어떤 차별성을 지니는가? 만약, 올림픽 정신에서와 같이 '아마추어리즘'을 적용하여 강화된 인류의 진입을 금지한다면, 스포츠 선수들에 의한 '평범한 인간'의 플레이에는 어떤 흥미를 느껴야 하는지 의심스럽다.

[세 번째 질문]
유전적으로 '맞춤 설계'된 인류는 '인간'인가, '인간'이 아닌가?

"유전적 강화와 복제, 유전공학 기술이 인간 존엄성에 위협을 가한다고 흔히들 말한다. 충분히 맞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들이 우리의 인간성을 '어떻게' 손상시키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들이 인간의 자유나 번영의 어떤 측면을 위협하는가?" -p.39


이번 질문은 좀 더 무섭다. <가타카>(1998)라는 영화가 있다. 제목에서 짐작하겠지만(제목은 DNA 염기서열인  A-T-G-C의 조합이다) 근미래의 인류는 유전자의 조합을 통해 '원하는 능력을 지닌' 인류를 '설계'하여 출생시킨다. 자연 출산을 희망한다면 그것을 선택할 수는 있으나, 그들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주어지지 않는다(주인공도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으나, '설계된 인간'과의 경쟁에서 도태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설계하여 태어났다면' 그는 인간이 아닌가?

저자의 예시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이미 '하버드대학' 출신인 여성의 난자를 제공받기를 희망하여 아이를 생산한 부부가 있고, 청각장애인의 정자를 제공받아 청각장애가 있는 아이를 낳은 청각장애인 커플이 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를 낳기 위한 선택이었다. 우리는 이미 이런 식으로 '원하는 아이'를 설계하는 행위를 진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유전공학'의 힘을 빌어 수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 유전공학이 완벽한 능력을 가진 배아를 만들어 낸다면, 이런 아이를 선택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존중하지 못할 근거는 무엇인가? 쉽지 않은 문제이다. 아마,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금지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네 번째 질문]
기능적으로 우월한 인류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열등한 인류에 대해 가해지는 폭력은 정당한가?

'독일에서는 미국의 우생학적 법안을 숭배하는 인물로 아돌프 히틀러가 등장했다.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우생학에 대한 신념을 이렇게 밝혔다. "유전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이 똑같이 열등한 자손을 번식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요구에는 매우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체계적으로 시행하기만 한다면 그것을 막는 일은 인류가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행동에 해당한다. 수백만의 불운한 자들이 부당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인류 전체의 건강 수준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p.91


이번 질문은 이미 인류의 역사에서 여러번 반복된 사실에 기반한다. 20세기 초, 히틀러는 '우생학'에 지원을 받은 우월감에 기대어 선택받지 못한 인류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정당화했다. 히틀러가 내세운 논리가 <가타카>에서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이는 그저 '기시감' 정도로 무시할 수 있을까? 인류를 선택하여 '설계'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은, '열등'한 인류에 대한 차별 또한 인정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히틀러'가 저지른 '죄악'을 되풀이하지 않겠다 자신할 수 있을까?

계산을 하나 해 보자. 신체적으로 우월한 인류가 만들어진다면, 건강 보험이나 다양한 업무상의 효율을 고려할 때, 분명히 사회적인 이익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신체적 능력이 '열등한' 인류가 발생시키는 손실을 사회가 부담해야 하는 것에는 어떤 논리적인 근거가 있는가?

"우생학의 교훈을 정리하는 일은 강화의 윤리와 씨름하는 또 다른 하나의 길이다. 나치는 우생학에 오명을 씌웠다. 그런데 정확히 무엇 때문에 우생학이 잘못된 것인가? 오로지 강제성을 띤다는 이유 때문에 우생학에 반대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음 세대의 유전적 구성을 통제하기 위한 비강제적 방법들도 잘못된 것인가?" -p.93


26일 충격적인 뉴스가 들렸다. 일본의 한 장애인 요양시설에서 집단적인 학살 사건이 벌어졌는데, 범인은 '모든 장애인들이 죽어야 한다'고 외쳤다고 한다. 무섭다. 인간은 인간을 '보유한 능력'으로 차별하고 '처단'할 수 있는가? 우생학이 유전공학에 던지는 또 다른 질문이다.

미래를 그린 수많은 영화들은 '우월한' 인류의 지배 하에서 고통을 받는 많은 일반 인간이 등장한다. 그들은 '절대적인 능력'을 지닌 새로운 인류에 대한 저항의 명목을 '인간에 대한 존엄'으로 들고 있지만, 과연 '강화되지 않기를 선택한 인류'를 지배하는 '강화된 인류'에게는 인간의 존엄을 인정할 수 없는가?

두렵기는 하지만, 언젠가 분명히 부딪혀야 하는 고민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불안감에서 기인하나, 사회가 제시한 해결법이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 뿐이라면 두려운 선택을 막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다섯 번째 질문]
일방적인 '승리'는 비윤리적인가? 우리 사회가 '승자'에게 던지는 찬사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만일 우리가 유전공학으로 인해 유전적 제비뽑기의 결과를 무시하고 운 대신 선택에만 중점을 두게 되면, 인간의 능력이 '주어진 선물'이라는 개념은 점차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또한 우리 자신을 공동의 운명을 공유하는 존재로 여기는 관점도 사라질 것이다. ... 타고난 재능의 우연성을 인정하지 않는 능력주의가 더욱 심해져 관대함도 줄어들 것이다. ... 완벽한 유전적 통제가 가능해지면 자신의 재능과 운이 갖는 우연성을 진지하게 숙고할 때 발현되는 실제적 연대성도 사라질 것이다." -pp. 118~119


인간의 사회는 상당히 복잡한 '빚'의 얼개 안에서 형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타인이나 공동의 계약에 의한 '시스템'의 도움을 통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러한 '필수적인 도움'의 기저에는 인간의 생명이 '우연'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운명을 '완벽하게 선택'하여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러한 '불완전함'에 기반하여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불완전함에 의한 능력의 차이는 우리가 개인의 노력을 통해 '승리'한 사람에 대한 찬사가 자연스러운 세상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일방적인 승리를 '강제적'으로 제한해야 하는 세상을 맞이해야 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인간의 '완벽한 선택'이 가능하다고 느끼면 사회적인 연대는 '필요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2016년의 대한민국에서처럼 모든 문제를 '개인의 것'으로 몰아세우는 사회라면 더더욱 그럴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인간은 사회적 동물) 이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사회'와 '인간'의 관계를 다시 정의해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사회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규칙'으로 통제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도 '생명공학'은 전혀 낯선 이야기는 아니다. 2005년의 일이었으니, 벌써 10년도 더 지난 사건이지만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조작에 대해 '국익'과 '진실' 사이의 딜레마에 시달렸던 기억이 여전히 아픈 기억이다(하지만, 이 논쟁은 '과학의 진실성' 면에서 우선적으로 비판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10년 전 이 사건은, 그만큼 우리에게 '미래'가 가까이 다가와 있으며 앞에서 던진 다섯 개의 질문은 더 이상 '미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같이 깨닫게 해 주었다. 게다가 2016년의 대한민국과 같이, 극심한 경쟁을 통해 이뤄낸 성과로 개인을 평가하는 사회에서는 더욱 더 심각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우리의 '연대'는 이미 느슨해져 있지 않은가!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는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을 살게 될 수도 있다. 모두가 원하는 능력을 극대화시켜서 태어날 수 있고, 부족한 능력을 강화하여 타인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게 될 수도 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의 '경쟁'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게 될까? 누군가의 삶에 비교하여 얻어지는 행복이 아니라, 나 자신이 만들어가는 행복으로 '존중'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능력이 강화된 '신인류'를 생각할 때 가장 크게 고민하는 것이 '그들을 인간으로 존중할 수 있는가?'임을 떠올리면, 이는 모순이다. 당장 지금의 세상에서부터 경쟁에 의한 성취에 의한 평가가 아니라 '각자의 삶에 대한 존중'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생명공학'의 획기적인 진보가 던지는 수 많은 질문들은 세상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선생님은 세상의 1퍼센트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셨지만, 전 달라요. ...우리반 25명에겐 25개의 다른 행복이 있는 것 아닌가요?"
"네 생각을 믿어라. 그리고, 절대 잊지 마!"

몇 년 전, <여왕의 교실> 이라는 드라마에 등장한 대화이다. 무조건 1등을 강요하며 아이들을 경쟁으로 몰아넣은 교사에게 '현명한 주인공'이 던지는 대사인데, 우리는 어쩌면 '생명공학'을 얘기하기 이전에,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개인에 대한 '존중'을 먼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완벽한' 인간이라는 허상으로 우리들 개인의 존재에 대한 존중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결국, 샌델의 질문에 대해 우리가 고민을 시작해야 하는 점은 바로 '각자의 삶에 대한 존중', 여기부터가 아닌가 싶다. 결국 <완벽에 대한 반론>이 던져준 것은 '완벽함'을 강요하는 현재의 대한민국에 대한 고민이었나보다.

책정보: <완벽에 대한 반론_생명공학 시대, 인간의 욕망과 생명윤리> 마이클 샌델 지금/김선욱 감수/이수경 옮김, 와이즈베리


완벽에 대한 반론 - 생명공학 시대, 인간의 욕망과 생명윤리

마이클 샌델 지음, 김선욱.이수경 옮김, 와이즈베리(2016)


태그:#오늘날의 책읽기, #완벽에 대한 반론, #생명공학, #극심한 경쟁, #인간에 대한 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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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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