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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가 어르신들을 위해 공연 봉사를 하고 있다.
▲ 유희의 공연 유희가 어르신들을 위해 공연 봉사를 하고 있다.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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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도 해요?" "데모도 해요?" "어르신들 목욕도 해 드려요?" "급식도 해요?"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 사람도 드물다. 조끼를 입고 경찰과 싸우고 악을 쓰던 이가 어느 날은 짧은 가죽 치마를 입고 트로트를 부른다. 틈틈이 어르신들 목욕을 해 드리는 자원봉사도 한다. 가끔 빈민들 연탄 나누기 봉사 활동도 한다.

유희. 본명이다. 사람들은 가끔 이름을 가명인 줄 안다. 아버지가 딸을 가수로 키우고 싶어 이름을 그렇게 예쁘게 지었다.

"아버지는 신문사 사장이었다. 그런데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는 가수가 되고 싶어 집안을 다 말아먹었다. 그때 가수 박시춘, 김희갑 등과 같이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수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아버지 이름은 유시종이다."

유희도 아버지를 닮아 노래를 잘했다. 아버지는 유희가 네다섯 살 때부터 기타 반주를 해 주고 노래를 시켰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부울러야 옳으냐.' 이 노래를 꼭 시켰다. 어딜 가서도 그 노래를 불러 지금까지도 다 외우고 있다."

유희의 초등학생 때 모습
 유희의 초등학생 때 모습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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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는 서울 성동구 금호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무 살 때 한 군인이 납치하다시피 해서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직업군인인 남편이 군대가 싫다고 제대해 버렸다. 유희의 역경이 시작됐다.

남편은 극장 경비로 들어갔지만 2년도 못 버티고 나와 버렸다. 유희가 스물세 살 때 둘째를 낳으면서 남편은 집안 경제에 완전히 손을 놨다. 먹고살 길이 없었다. 유희는 어느 날 중부시장을 갔다. 닭똥집을 파는 아주머니를 봤다. '저걸 받아다 팔면 장사가 되겠다.' 유희는 아이를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창피해서 좌판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성거리다 손님이 와서 "어머, 이거 누가 팔지?" 하면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제가요" 하고 좌판으로 갔다. 당연히 먹고사는 게 만만치 않았다. 아이들은 점점 커 갔다.

유희는 남편과 청계천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공구도 팔고, 카메라도 팔았다. 구청 직원들인지 모자를 쓰고, 팔뚝엔 '단속'이라는 완장을 찬 이들이 돈을 뜯어 갔다. 유희는 돈을 걷어서 바치는 총무 역할을 맡았다. 그자들은 돈을 뜯어 가면서도 걸핏하면 철거를 한다고 협박을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걸으면서 살 때 양연수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양연수는 유희에게 이것저것 물으면서 말을 붙였다. 노점상도 그렇게 당하지만 말고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유희는 '남의 땅에서 장사하는데 무슨 권리를 찾을 수 있을까' 하고 믿지 못했다. 양연수는 유희를 설득했다.

"우리가 이렇게 노점상을 하면서 사는 게 우리가 못나서 그런 게 아니다. 이건 사회 구조가 잘못돼 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노점을 하겠나. 우리도 떳떳하게 장사할 권리가 있다. 만날 철거한다고 겁주면서 돈을 뜯어 가는 게 말이 되는가."

유희는 솔깃했다. '아, 그럴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양연수가 유희에게 보여 줄 게 있다고 자기와 같이 어디를 가 보자고 했다. 유희는 속는 셈 치고 그날 장사를 접고 따라갔다. 양연수가 유희를 데리고 간 곳은 한창 철거 중이었던 돈암동이었다.

노점상 올림픽

때는 1980년대 말 무렵. 88올림픽을 연다고 정부가 노점을 단속하고 무허가 집을 강제로 허물 때였다. 노태우는 '범죄와의 전쟁'에 노점상을 집어넣었다(도시 노점상들은 83년 IPU총회 당시 환경미화를 위한 정부의 노점 단속에 항의하는 투쟁을 계기로 결집하기 시작, 86년 아시아게임 이후 '노점상복지회'를 결성하고, 88년 올림픽을 앞둔 87년 11월 '전국노점상연합회'(전노련)를 탄생시켰다. - 한국근현대사사전).

유희가 돈암동 산동네로 올라가는데 풍경이 처참했다. 철거를 당해 갈 곳 없는 이들이 다 부서진 곳에서 살거나 또는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어디선가 꽹과리 소리가 들렸다. 유희는 거기서 놀라운 장면을 봤다. 여덟 살에서 열 살 되는 아이들 한 무리가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꽹과리를 치고 있었다. 저런 애들도 자기 집을 지키려고 저렇게 싸우고 있구나. 유희는 소름이 돋았다. 그 모습을 한참 쳐다보던 유희는 양연수에게 말했다. "저, 같이 할게요." 그 한마디를 던지면서 유희는 빈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유희는 서울노점상협의회(서노협) 문화국장을 맡았다.

1987년 7월 17일에 '서울시 철거민협의회'가 결성됐고 1989년 11월 11일에는 전국노점상연합회·서울철거민협의회·일용노동조합의 결집체로서 '전국빈민연합'을 결성했다. 목소리가 크고 말을 잘하는 유희는 자연스레 메가폰을 들고 맨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선동하는 사람이 됐다. 노태우 정권 내내 길에서 살다시피 했다.

1993년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점상연합회는 김영삼이 취임하기 전에 노점상 현실을 알려 주자고 의견을 모았다. 김영삼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충현교회였다. 대찬 여자들 일곱 명을 뽑았다. 강남구 역삼동 충현교회를 갔다. 아홉 시에 자연스럽게 교회를 들어가 있었다. 드디어 김영삼 당선자가 교회를 들어왔다. 둘레엔 경호원들인지 건장한 남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우르르 달려갔다. 노점상연합회가 만든 브리핑 자료를 주면서 하소연했다. 김영삼은 그걸 받았다. 유희가 '아, 받기도 하는구나' 하는 순간 김영삼은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 옆 사람한테 던지다시피 주었다. 그걸 본 유희 옆에 있던 노점상 한 명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너 같은 XX가 대통령 되면 내가 영부인 되겠다. 최소한 봐 주는 척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무시하면 되냐? 니가 대통령 되나 봐라."

그이는 그 옆에 있던 경호원한테 명치를 맞고 쓰러졌다. 그자들은 유희 일행을 쫓아내려고 했지만 유희는 악이 받쳤다.

"당신들 11시 예배 못 본다고 난리를 피웠다. 강남, 서초 경찰들이 다 몰려왔다. '나도 교인이다. 여기 교인 김영삼한테 답변을 받아야겠다'고 소리소리 질렀다."

정보과에서 유희 일행을 달랬다. 꼭 답변해 주겠다고 해서 소란을 끝내고 돌아왔다. 몇 개월 뒤 결국 답변이 오긴 왔다. "귀하의 민원에 대해서 검토를 하겠습니다." 뻔한 답변이었다.

밥을 먹어야 싸운다

농성장에 밥을 해 가기 전 김치를 담그고 있다.
▲ 김치 담그는 유희 농성장에 밥을 해 가기 전 김치를 담그고 있다.
ⓒ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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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특별법이 제정되고 전두환과 노태우가 감옥에 간 뒤 세상은 좀 변하는가 싶었다. 자연스레 빈민들과 약자들도 인간답게 살자는 요구가 쏟아져 나왔다. 장애인들도 '앵벌이'를 하지 말고 주체적으로 살아 보자고 노점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영삼 정권도 약자들에게는 폭력으로 탄압했다. 장애인들은 강제 철거에 항거하다가 죽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났다.

교통사고로 장애 1급을 받은 최정환은 1994년부터 서초구 방배역 부근에서 오토바이에 가판을 달고 테이프 노점상을 시작해 먹고살았으나 서초구청에서 노점상 단속이 심해 생활이 어려웠다. 그해 6월에 서초구청의 살인적인 노점단속으로 한쪽 다리가 골절되는 전치 8주의 부상을 입었다. 서초구청은 치료비는커녕 고소하면 장사를 아예 못하게 하겠다고 협박했다.

다음 해인 1995년 3월 8일, 최정환은 서초구청에게 장사하는 스피커와 배터리 등을 빼앗겼다. 최정환은 서초구청을 방문 압수된 물품을 찾으려 했지만 담당자로부터 욕설과 비아냥만 듣고 빈민 정책에 항의하며 온몸에 신나(시너)를 끼얹고 분신했다. 서초구청은 최정환의 몸에서 불이 다 꺼질 때까지 후송조치도 하지 않았다. 결국 3월 21일 최정환은 사경을 헤매다 사망했다. 장애인들은 강남성모병원(현 서울성모병원)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굶고 싸울 수는 없었다. 유희는 그때 처음으로 천 명이 먹을 정도 되는 밥을 했다.

1995년 11월 24일엔 인천 연수구 아암도에서 변사체가 발견된다. 장애인빈민운동가 이덕인이었다. 발견 당시 그이는 얼굴 부위와 어깨 등에 피멍 든 상처가 있고 윗도리와 신발은 벗겨져 있었으며 두 손은 밧줄로 포박된 상태였다. 당시 나이 만 28세였다. 인천시와 연수구는 아암도에 친수공간을 조성한다며 용역 1500여 명을 투입해 그곳에서 생계를 꾸려 가던 노점상들을 철거했다.

이덕인은 장애인, 노점상인들과 함께 망루 위에 올랐다. 경찰은 초겨울의 추운 날씨에도 소방차를 동원해 망루에 물대포를 쏘고 돌멩이를 던졌다. 또한 경찰은 음식물 반입을 막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했다. 25일 밤 그이는 고립된 망루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고자 경찰 포위망을 뚫고 탈출을 시도했다. 그런데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유희는 조덕휘 서노협 사무국장과 같이 병원 영안실에서 시신을 지키고 있었다. 다음 날인 29일, 경찰은 병원 영안실 콘크리트 벽을 부수고 들어와 시신을 탈취해 갔다. 인천대, 인하대 학생들이 시신 탈취를 막을 때 무차별 두드려 맞았다. 부검 후, 경찰은 이덕인이 연안부두로 수영하다가 지쳐 익사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가족들과 장애인, 노점상 등 지역단체들은 의문을 제기하며 다음 해 5월까지 6개월여 동안 장례투쟁을 벌였다. 유희는 그때도 농성장을 지키면서 밥을 했다.

"도로와 보도가 어딘지 모른다"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유희, 가운데는 엄마가 키운 사촌언니
▲ 유희의 자매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유희, 가운데는 엄마가 키운 사촌언니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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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는 노점상, 장애인을 위한 투쟁은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 사회를 변혁하는 정치투쟁이라는 걸 투쟁 현장에서 배웠다(병원에 있을 때 조덕휘 현 전노련 의장이 줘서 읽은 막심고리끼의 <어머니>도 유희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95년 5·18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집회 때도 늘 거리에 있었다. '유희 만나려면 종로 나가면 돼'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유희는 주로 방송차에서 선동하는 역할을 맡았다.

"노점상, 장애인들이 내 눈앞에서 죽는 걸 보니까 악이 생겨 더 했다. 사람들이 그러더라. 어떻게 트럭 위에서 그렇게 중심을 잘 잡고 선동할 수 있냐고."

유희는 요주의 인물이 됐다. 서초경찰서에서 수배령이 내렸다. 어느 날 종로에서 2천 명 단위 집회를 열었다. 본부에서는 오지 말라고 했지만 유희는 당당하게 가고 싶었다. 단상에서 다른 대표가 연대사를 했다.

"늘 이 자리에서 사회를 봤던 유희가 지금 수배 중에 있다. 현 정권은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이런 굴레에 가둬 놓고 있다."

그 연대사를 듣던 유희가 군중 속에서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군중들이 "와!" 환호성을 질렀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정보과 형사들이 유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욕을 하더란다."

공권력을 무시했다고 형사들은 유희를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켰다. 유희는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갔다. 집에 들어갈 때까지 서너 명이 호위했다. 경찰도 노점상 단체들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 사람들 있는 데서는 함부로 집행부를 잡아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희는 집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도와주는 이들이 많았다. 서초에서 노점상을 하고 있던 어떤 상인은 유희에게 열쇠를 주면서 자기는 밤에 노점을 하고 아침 여섯 시에 들어가니까 언제든지 들어가서 자라고 했다.

"그이는 20만 원을 줬다. 구세주였다. 그 집에 가서 한 달 반 정도 살았다. 어떤 할머니는 나를 보더니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를 주면서 굶지 말라고 했다. 제기동에서 나물 파는 할머니였다."

정보과는 수시로 유희 집을 수색했다. 중학생이었던 큰아들은 우리 엄마는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인데 왜 우리 엄마를 찾냐고 따졌다. 요즘 집에 안 들어오니까 찾지 마시라고 정중히 항의했다.

집회 때 유희가 사회를 보는 등 활동을 자유롭게 하려면 수배가 풀려야 했다. 노점상연합회는 유희의 수배를 푸는 방법을 회의 안건으로 올렸다. 경찰과 협상을 했다. 경찰은 유희가 주로 동대문에서 도로 점거를 하고 동대문 경찰차를 부숴 버렸으니 최종 조사를 동대문에서 받아야 한다고 했다.

연합회에서는 유희가 조사를 받는 대신에 바로 집행유예로 풀어 줘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경찰은 집행유예를 해 주겠지만 3개월은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합의를 못 보고 유희는 인권위원장과 같이 경찰서를 들어갔다. 전국에서 노점상 전노련 회원들 8백 명가량이 올라와 동대문경찰서 앞에서 농성을 했다. 조사를 한 시간이 넘게 하기만 하면 경찰서로 쳐들어간다고 협박했다.

동대문경찰서는 조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경찰서 앞에 진을 친 노점상인들이 꽹과리를 치면서 노래하고 구호를 외쳤다.

"10분 정도 조사를 받고 있으면 인권위원장이 들어와 '차 한잔 하시라'고 했다. 20분 받으면 노수희 전 의장이 들어와서 '밥 먹고 하자'고 했다. 노점상들이 들어와 '유희씨, 괜찮아요? 이 사람들이 협박 안 해요?' 한마디로 '상식이 없는 투쟁'이었다."

경찰은 그런 노점상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경찰서를 못 들어가게 하면 "화장실 가야 되는데 여기서 싸? XX야" 하는 욕을 퍼부었다.

경찰은 유희에게 "도로로 올라가세요" 하고 경고 방송을 몇 번이나 했는데 왜 안 올라가고 도로를 점거했냐고 추궁했다.

"나는 무식한 노점상이라 도로와 보도가 어딘지 잘 모른다고 했다. 보도로 올라가라는 말이 도로로 내려가라는 줄 알았다."

경찰은 어이가 없어 "배울 만큼 배웠잖아요!" 하고 열이 뻗쳐 소리쳤다. 유희는 "못 배워서 노점상 하죠. 배웠으면 노점상 하겠어요? 근데 정말, 도로가 어디예요?"하고 느물거렸다.
도로와 보도를 모른다고 우긴 이야기는 전설이 됐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수배가 해제됐다. 전노련 활동할 때 50만 원, 70만 원 정도 벌금을 낸 적이 있었지만 구류를 살지는 않았다.

황당한 포장마차의 출현

양재동 현대본사 앞 유성기업 문화제에서 밥을 나눠주는 유희
▲ 밥 나눔 양재동 현대본사 앞 유성기업 문화제에서 밥을 나눠주는 유희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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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는 길에서 집회를 하고 경찰서를 드나들며 살았지만, 그도 먹고살려면 장사를 해야 했다. 어느 날 유희는 무작정 포장마차를 만들었다. 그리고 서부에서 홀연히 나타난 총잡이처럼 포장마차를 끌고 보무도 당당히 종로로 들어섰다. 유희가 자리 잡은 곳은 관철동 골목. 황당한 포장마차의 출연에 종로구청에서 출동해 금방 실어가 버렸다.

전국노점상연합회 회원들이 몰려왔다. 유희는 그이들과 같이 구청을 쳐들어갔다. 종로경찰서에서는 구청 직원들에게 유희를 건드리면 골치 아프니까 놔두라고 했다. 유희는 포장마차 장사를 하면서도 집회를 다녔다. 포장마차를 끌어다 주는 것은 고등학교를 다니던 유희의 막내아들이었다. 하지만 한 3년쯤 하다가 그 옆에서 장사하는 이에게 넘겨 버리고 유희는 인천으로 이사를 간다.

그 당시 유희의 언니는 남편의 죽음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유희는 일단 언니 집으로 들어가 언니를 보살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유희는 부평동에서 카페를 열었다. 그리고 인천에 있는 인봉봉사단이라는 단체에 가입했다. 유희는 사회자 겸 가수로 활약했다. 어느 날은 조끼를 입고 데모 현장에 있는가 하면 어느 날은 짧은 치마에 부츠를 신고 요양원에 있는 어르신들 앞에서 트로트를 불렀다. "목이 메인 이이별가아를" 유희 때문에 경찰은 골치를 썩이고 어르신들은 웃음꽃이 피었다. 전국 요양원은 거의 다 다녔다.

농성장을 찾아와 유희를 돌려달라고 했던 언니.
▲ 언니 농성장을 찾아와 유희를 돌려달라고 했던 언니.
ⓒ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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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가 노점노동연대 수석부의장이었을 때 민주노총 지엠대우 기자회견에서 인천빈민연합 박원주 의장을 우연히 만났다. 25년 만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박원주 어머니가 영종도 요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원주에게 우리 봉사단에 앰프가 있으니 거기 가서 어머니와 어르신들을 위해 공연해 주겠다고 했다. 박원주는 믿지 못했다."

공연하는 날, 박원주 눈이 휘둥그레졌다. 늘 데모꾼 차림을 하던 사람이 짧은 치마를 입고 나타났다. 그날 가수 열두 명과 같이 간 유희는 사회를 보고 노래를 불렀다. 늘 외로웠던 할머니들은 오랜만에 웃었다. 사회복지사들도 이런 공연 처음 봤다고 했다. 사회복지사는 한 달에 한 번씩 공연해 주면 안 되냐고 인봉봉사단에게 부탁했다. 박원주도 감동을 받았다. 이 삭막한 운동권 내에서 이런 '휴머니즘적인 봉사'를 한다는 게 신기했다. 박원주는 그 뒤 유희의 강력한 지지자가 됐다. 어느 날은 식판 100개, 수저 100세트를 선물했다.

유희는 그런 봉사단에서 위문 공연, 목욕 봉사, 연탄 나눔 봉사 등 여러 가지를 하고 있지만 이 사회를 변혁하는 집회 현장 연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가운데 집회하는 이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게 밥이다. 유희는 이덕인 열사 투쟁 때부터 지금까지 농성하는 이들에게 밥을 해 주는 '음식 연대'를 하고 있다.

유희는 거의 모든 농성장에 밥을 해 갔다. 강원도 골프장반대 투쟁 현장부터 부천 원종 종합복지관, 삼성, 쌍용차, 콜트콜텍, 코오롱, 풀무원, 구미스타케미컬, 동양시멘트, 티브로드, 청주노인전문병원, 세종호텔, 사회보장정보원 등에서 쫓겨나 길에서 농성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위해 음식을 해서 싸 갔다.

"이기든 지든 밥은 먹고 살아야 한다. 아침에 어디 갈까? 생각하다가 가야 할 농성장이 떠오르면 바로 준비한다. 백 명, 이백 명 정도는 혼자 감당할 수 있다. 냉장고 다 열어 놓고 반찬 준비하고, 밥하면 두 시간이면 된다. 쌀 10킬로면 백 명이 먹는다. 천 명이 먹으려면 백 킬로 이상, 두 가마니가 있어야 한다. 15인분 밥솥, 50인분 밥솥이 있다. 반찬? 큰 통 하나면 100명이 먹을 수 있다. 몇 명이 모인다고 하면 밥과 반찬을 얼마큼 해야 할지 그림이 나온다."

농성자가 천 명이 넘으면 페북 친구들이 밤새 음식 하는 걸 도와준다. 유희와 페북 친구들이 천 명이 넘는 농성장에 밥을 해 간 게 서너 번이다. 삼성지회투쟁, 코오롱 고공농성을 접던 날도 천 명 가까이 모였다. 그렇게 인원이 많은 날은 돈이 문제였다. 유희는 '십시일반 음식연대'를 만들었다. 통장을 개설하고 '2천 원이면 한 사람이 먹을 수 있습니다' 하고 페북에 올렸다. 거짓말처럼 만 원, 2만 원이 통장으로 들어왔다. 그날 하루 돈이 240만 원이 걷혔다. 페북 친구들이 모여 주먹밥 천 개를 만들었다. 그 코오롱 투쟁을 기점으로 음식 값을 조금씩 페북 친구들에게 후원받았다.

유희는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받은 적이 있었다. 유희보고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9번으로 배정을 받으라고 했다. 유희는 거절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내가 싸워 왔던 정당함이 없어질까 봐 두려웠다. '너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투쟁했던 게 국회의원 되려고 그랬구나' 하는 소리를 듣기 싫었고, 혹시나 내가 국회의원이 된 뒤 다시 빈민 쪽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했다."

그 당시 민주노동당은 비례대표 8번까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유희는 일본으로 갔다. 도쿄에 있는 아사쿠사에서 구두를 만드는 일을 했다. 수제구두로 유명한 성수동에서 노조 하는 이들하고 친해져서 배우게 된 일이었다. 일본에서 1년 넘게 살았다. 빨리 한국에 오고 싶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보고 싶었고 운동판도 궁금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뿌연 일본의 공기도 싫었다.

한국으로 건너와서 유희는 잠깐 동안 활동을 안 하고 살았다. 물론 전노련 조덕휘 위원장하고 연락은 하고 있었다. 그 당시 빈민운동은 세 군데로 찢어진 상태였다. 노점노동연대의 노노련, 전국노점상연합회, 민주노련이었다. 유희는 노점노동연대의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유희는 빈민운동을 하면서 부평 문화의 거리에서 10년 동안 사회를 보고, 인봉봉사단에서 연탄기금을 모으고 봉사활동을 했다. 유희는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다. 공연 요청이나 농성장 밥 연대 요청이 오면 거절을 못하고 "내일 몇 시?" 하고 시간부터 확인한다. 티브로드 노동자들이 "누님이 해 주는 밥 먹고 공연 보면 이겨요"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보람이 있다.

예전엔 위문공연, 연탄 나누기 행사 등과 농성장 밥 연대가 50대 50이었는데 요즘은 농성장 밥 연대를 가는 시간이 많이 늘었다.

"독거노인도 요양원 어르신들도 아프기는 한데 그건 나 아니라도 할 사람이 있다. 이 농성장은 내가 밥을 안 해 가면 노동자들은 컵라면으로 때우거나 굶는다. 그리고 이들은 사회를 변혁하는 원천이다. 하지만 순수한 봉사도 중요하다. 집회하는 농성장을 꺼리는 시민들도 밥을 해 주러 간다고 하면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아직도 그런 데가 있어요?' 하고 농성하는 이들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한다."

유희가 가장 마음 아픈 곳은 날마다 컵라면으로 때우고 있는 열악한 농성장이다. 뜨거운 물도 없고 김치도 없는 곳도 있다. 그러고도 승리로 끝내지 못한 농성장을 보면 눈물이 난다. 풀무원도 그렇게 고생했는데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유희는 그이들에게 용기를 준다.

"노조가 이렇게 힘 있게 싸웠다는 걸 자본가들이 알 거라고 말해 준다. 당신들은 탄압을 받으면 언제든지 농성할 수 있다는 걸 자본가들에게 보여 줬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긴 것이다."

유희가 자주 가 보고 싶은 곳은 열악한 곳과 더불어 잘 싸우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고공농성과 같이 극단적으로 농성하는 곳이다. 복기성처럼, 친했던 사람이 고공농성 한다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연락이 오면 가슴이 철렁한다.

유희는 집회 현장을 다니고, 밥 연대를 하면서도 장사를 했다. 인천 부평동 유흥 지역에서 카페를 8년이나 했다. 노래도 하고 주방 일도 겸했다. 카페에서 새벽 세 시에 퇴근하고 두세 시간 잔 뒤 아침에 몇백 명분 밥을 해서 연대를 나갔다. 잠이 모자라 버틸 수가 없었다. 카페를 접은 뒤엔 부평동에서 노래방을 시작했다. 좌충우돌하는 유희의 삶에 장성한 아들 셋은 정신이 없었다.

"어머니, 또 뭔 일을 저질렀어?"
"어, 나 노래 좀 하고 싶어서 노래방 하기로 했어."

매사가 그랬다. 그래도 아들들은 옳은 일을 하는 어머니를 믿었다.

유희가 마지막으로 했던 일은 '주마등'이라는 술집이었다. 가겟세가 한 달에 300만 원이었다. 그 가게를 운영하면서 밥 연대를 다니느라 장사를 할 수가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 문을 여는 가게라고 소문이 나서 손님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8월, 권리금도 못 받고 가게를 접었다. 가게에서 먹고 자고 했는데, 가게를 접으니 잘 데가 없었다. 이틀 만에 재개발할 예정으로 돼 있는 다 무너져 가는 연립을 얻었다. 아들들은 그런 엄마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나는 정말 좋았다. 18평인데 방이 세 개였다. 무엇보다 주방이 넓어서 좋았다."

하지만 유희는 이제 그 연립에서 벗어났다. 든든한 '빽'인 아들들 덕분이다. 남편과 별거하고 노점상을 하면서 잘 돌보지 못했는데 아이들은 자라서 지금 39살, 37살, 35살이 됐다. 아들들이 떼돈을 버는 강남 부자들은 아니다. 아낄 때는 만 원짜리 한 장 내놓지 않는 자린고비들이다. 그 아들들이 1년 동안 돈을 모아 인천시 청라에 있는 아파트를 사 줘 무너져 가는 연립 생활에서 벗어났다. 사람이 많이 찾아오니 사방에 신발장이 있고, 가장 중요한 건 한 군데에서 음식을 만들기 쉽게 주방이 아주 잘 돼 있다는 것. 게다가 냉장고가 890리터짜리 대형이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유희
▲ 유희의 든든한 백, 세 아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유희
ⓒ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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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실 몸이 안 좋다. 어깨도 아파 냉장고 문도 잘 못 연다. 아들들은 그런 나를 위해서 버튼 하나로 문을 열 수 있는 대형 냉장고를 사 줬다."

유희가 지금 밥을 싣고 다니는 에쿠스 승용차도 아들들이 사 줬다. 에쿠스는 보통 1억이 넘는 고급 중형차다. 농성장에 시커먼 에쿠스가 들어서면 경찰들도 홍해가 갈라지듯 쫘악  길을 비켜 준다. '이건 뭐지?' 하고 쳐다보면 강남의 복부인 같은 포스로 유희가 문을 열고 나온다. 그리고 당당히 "밥 왔어" 한다.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그 에쿠스 뒷좌석과 트렁크에서 주먹밥이 나오는 광경은 웃기면서도 숭고하다. 유희는 '밥은 하늘'이라는 믿음이 있다.

"소원이 있었다. 아들들이 대학에서 총학생회장을 하다가 잡혀가서 사식을 넣어 주는 게 꿈이었다. 그런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막내는 드디어 나한테 물이 들었다. 미술학원에서 야외 수업을 한다고 세월호 광장을 돌고 세월호 팔찌를 제자들에게 다 채워 준다. 언니도 변화했다. 이덕인 열사 투쟁 때 형부랑 우리 애들을 데리고 농성 현장을 찾아와 동생을 돌려달라고 망신을 줬던 언니가 이제 봉사하는 언니로 바뀌었다. 데모 얘기가 나오면 경기하던 언니가 이젠 사람들한테 세월호 이야기를 하고 국정원 이야기도 한다. 미용실 손님하고 이야기하다가 말이 막히면 '우리 유희한테 물어봐' 할 정도가 됐다."

이런 차를 대면 경찰들이 쫘악 비켜 준다. 차를 대면 주먹밥이 나온다.
▲ 에쿠스 이런 차를 대면 경찰들이 쫘악 비켜 준다. 차를 대면 주먹밥이 나온다.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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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의 동지들

유희가 이렇게 활동할 수 있는 또 다른 백은 같이 연대해 주는 페이스북 친구들이다. 페북 친구들은 늘 유희가 어려울 때마다 나타나서 도와준다. 또 밥 연대를 할 때 같이 움직이는 동지도 있다. 김기수, 박원주는 유희가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배식할 때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꼭 있다. 이들은 묵묵히 배식한다. 남에게 봉사한다고 내세우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이들이 벙어리인 줄 알았다고 한다."

농성하는 노동자들도 음식을 나눠 주는 유희를 모를 때가 많다. 그냥 밥만 나눠 주고 얼른 와 버리기 때문이다. 세월호 광장에서도 음식을 나눠 주는 유희가 누군지 유가족들은 몰랐다. 나중에 유가족이 유희에게 누구냐고 물었을 때 유희 대답은 "유희예요"였다. 유희도 유가족 얼굴을 잘 모른다. 나중에 영석이 아빠가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눠 친해졌다.

유희가 가고 싶지만 자주 못 가는 곳이 있다. 강원도 골프장 건설에 반대하는 박성율 목사는 누님, 동생 하는 가족 같은 사람이다. 강원도청, 홍천군청에서 농성하거나 기도회를 할 때 밥을 자주 해 갔는데 요즘은 자주 못 갔다. 강원도를 한 번 내려가면 경비가 30만 원이 든다. 그 돈이면 서울에서 백 명이 밥을 먹을 수 있다.

"얼마 전 박성율 목사가 심장 수술을 했다. 그때 내가 팔십몇만 원을 모금했다. 지금 회복 중이다."

박성율 목사 아버지는 도공이었다. 자연과 함께 살려고 내려갔는데 정부가 산을 깎고 울창한 나무를 베어내고 골프장을 만들기 시작해 골프장 반대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박성율 목사는 소금을 구워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골프장 반대 투쟁하다가 집이 풍비박산 났다. 박성율 목사 아버지는 진폐증으로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자본과 결탁한 이 정부는 정직하게 살려는 이들을 편히 살도록 놔두지 않는다.

유희도 건강해 보이지만 아픈 곳이 많다. '팔꿈치 엘보' 때문에 늘 통증이 있다. 큰 교통사고로 죽을 뻔한 고비도 넘기고 다리와 목 디스크 등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다. 하지만 유희는 아픈 티를 내지 않는다.

"인상 쓰면 밥도 맛이 없다. 배식하는 이들도 몸이 아프거나 기분이 나쁘면 내가 오지 말라고 한다. 기분 나쁘게 밥을 주면 밥을 먹는 이들도 맛이 없게 먹는다."

유희는 살아 있는 동안 노래 봉사와 밥 연대를 하고 싶다. 그런데 유희의 부모님들은 모두 50대 초반에 돌아가실 정도로 단명 집안이다.

"나는 지금 덤으로 살고 있다. 지금 죽어도 이 사회에서 열심히 살다 죽었다는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욕심이 있다면 나이 들어서 아프더라도 짧게 아프고 죽는 것이다. 죽을 때 혹시 건강한 신체가 남아 있다면 기증하기로 했다."

후세들은 유희의 생을 어떻게 기억할까. 많은 사람들이 유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한 사람이 역사에서 아주 작은 물줄기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변치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고 모이면 이 야만의 시대를 끝장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야만의 시대를 끝장낸다는 건 모두가 평등하게 밥을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유희는 밥 한 끼의 소중함을 이렇게 표현한다.

"밥은 하늘이고, 밥은 힘이고, 밥은 사랑이다."  

덧붙이는 글 | 작은책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어 올립니다.



태그:#작은책, #안건모,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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