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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까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근대문화유산은 600건이 넘습니다. 근대건축 문화재의 경우, 역사적인 형태를 살리면서 공공건물로 리모델링하는 사례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발논리에 밀려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질 근대 건축은 훨씬 많습니다. 한번쯤 그 시대의 건축가들을 되돌아보고 싶었습니다. 일그러진 근대의 일그러진 건축가들을 말입니다. 잊혀진 건축가들을 통해 그 시대의 또 다른 이야기를 알게 되면, 개발에 대한 관점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보존 방식도 좀 더 다양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 기자 말

1949년 6월 애도의 물결에 둘러싸인 경교장
 1949년 6월 애도의 물결에 둘러싸인 경교장
ⓒ 서울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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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첨장, 김구에 의해 경교장으로 바뀌다

1945년 11월 23일 오후 5시경 갑자기 함박눈이 내렸다. 어둑해진 거리에 국방색 세단과 지프차들이 나타났다. 비밀작전이라도 하듯 차들은 은밀하게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세단이 서자 동그란 안경을 낀 남자가 내렸다. 지프차에서도 사람들이 내렸다. 그곳엔 그들을 맞을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27년 만의 귀국은 비행장에서도 숙소인 그곳에서도 썰렁하고 싸늘했다.

한 시간 뒤, 미군 최고사령관 하지 중장이 발표를 했다. 방금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했다고, 아주 짧게 말했다. 방송을 들은 사람들 반응은 길고 폭발적이었다. 어둠과 침묵으로 가라앉았던 그곳에 시민과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그곳으로 통하는 거리는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를 연호하고 만세를 외치는 소리로 채워졌다.

그때부터 그 건물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다. 백범 김구는 건물의 일본식 이름부터 바꾸었다. 근처에 있던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이라고 불렀다. 새 이름을 얻은 건물은 사용하는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도,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달라졌다.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가 서거하기까지,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가 되었다. 그 3년 반의 시간으로 경교장은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를 얻게 되었다.

경교장의 원래 이름은 죽첨장이었다. 죽첨, 일본말로 다케조에(竹添). 1884년 갑신정변 때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 1842-1917)가 부근에 살았다. 일제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그 일대를 다케조에마치(竹添町, 죽첨정)라고 정했다.

1938년 7월, 죽첨장은 착공한 지 2년 만에 완공되었다. 서양 고전주의 양식을 본뜬 대저택이었다. 지하1층과 지상 2층의 건물 정면은 3분할된 좌우 대칭형이었다. 1층 출입구의 원기둥과 포치의 규모부터 일반주택 용도가 아니었다.

1층 좌우에 튀어나온 원형창과 2층 중앙의 들어간 아치창은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입면에 요철의 깊이감을 줬다. 가운데 돌출된 지붕창도 단조로움을 덜어냈다. 내부 공간은 훨씬 호화로웠다. 샹들리에가 있는 응접실과 식당, 당구실과 전용 이발실, 썬룸에 냉난방시설까지. 보통 사람들은 듣도 보도 못한 공간이고 시설이었다.    

건축주는 최창학, 광부였다가 금광을 발견한 후 일약 '광산왕'이 된 사람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백만장자도 아닌 천만장자답게 각종 친일 단체에 가담하고 헌금 스케일도 남달랐다. 그가 지은 죽첨장은 돈 냄새, 권력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접대용 건물이었다.

'조선건축회' 기관지인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에는 설계와 시공을 일본의 건설회사 오바야시구미(大林組)가 했다고 기록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설계한 사람은 조선인 김세연이었다. 

경성공업전문학교 출신 김세연, 부업으로 경교장을 설계하다

김세연은 박길룡보다 한 살 위이지만 경성공업전문학교(경성고등공업학교 전신)는 한 해 후배였다. 1920년 건축과를 졸업한 그는 박길룡이 근무하던 총독부 건축조직에 들어갔다. 당시 건축은 돈을 잘 버는 직업이라고들 하지만, 총독부 월급 때문은 아니었다.

조선에서 유일한 '관립' 공업전문학교를 나와도 조선인의 취업 길은 막혀 있었다. 예외적으로 토목과와 건축과의 조선인은 총독부나 관공서에 취직할 수 있었지만,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건축과와 토목과에서 조선인은 한 해에 한두 명 정도만 졸업했다. 공사 현장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았고 그들을 관리할 조선인이 필요했다. 조선인을 뽑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나마 몇 명 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조선인 건축가들은 취직하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임금차별을 받았다. 월급만으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낮에는 총독부에서 일하고, 밤에는 부업을 했다. 경교장도 김세연이 부업으로 한 설계였다.

하지만 설계는 김세연의 주종목이 아니었다. 그가 21년 동안 재직한 총독부에서도, 1932년에 설립된 박길룡건축사무소에서 부업을 할 때도, 그의 존재감을 드날린 것은 다른 것이었다. 

김세연이 구조 계산한 조지아(丁子屋)백화점, 출처: 부산근대역사관, <사진엽서로 떠나는 근대기행>, 민속원, 2009.
 김세연이 구조 계산한 조지아(丁子屋)백화점, 출처: 부산근대역사관, <사진엽서로 떠나는 근대기행>, 민속원, 2009.
ⓒ 부산근대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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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트 슬래브(Flat Slab, 평판 슬래브)에 대해서 
나상근(螺狀筋)을 갖는 철근 혼응토(混凝土, 콘크리트) 원주 설계 
곡축(曲軸)을 갖는 철근콘크리트 구재(構材)의 응력

멀미나도록 공학 냄새를 풍기는 제목들이다. 모두 김세연이 1928년과 1930년에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에 발표한 글이다. 첫 번째는 조선인 최초로 쓴 건축구조 논문인데, 일본과 미국의 철근콘크리트 시공법을 다루었다. 두 번째 논문은 프랑스와 미국 공학자의 실험과 이론을 도입해 썼다. 세 번째는 독일 잡지 <콘크리트공학>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이다.[1]

논문의 수준이나 깊이를 떠나, 그가 그런 글을 썼다는 자체가 놀랍다. 그는 경성공업전문에서 고작 3년을 배웠다. 유학은커녕 조선을 떠난 적도 없었다. 변변한 건축 서적도 없었다. 일본인이 주축이 된 '조선건축회'를 통해 들어오는 제한된 자료가 거의 전부였다. 그런 환경에서 김세연은 독학으로 논문을 썼고 구조 계산의 달인이 되었다. 

박길룡과 김세연은 조선 건축계에서 환상의 커플이었다. 설계는 박길룡, 구조는 김세연으로 통했다. 기술과 경험에 관한 한, 일본인들도 그들에게 토를 달지 못했다. 일본에서 대학까지 나오고 10여년 경력을 쌓은 일본인 구조기술자도 김세연의 계산을 더 믿고 따랐다. 김세연이 구조 계산한 건물은 미쓰코시백화점(신세계), 화신백화점(철거), 조지아백화점(롯데영플라자), 경성제대 본관(문예진흥원) 등이다.

당시 건축 일은 설계, 구조, 시공 업무가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대로 두루두루 하던 시대였다. 그는 경교장 외에 창신동의 옛 동덕여자고등학교 본관도 설계했다. 광복 후에는 풍문여고, 동성상업학교(동성고등학교) 강당, 옛 보성중학교 강당, 대한극장, 중앙청 제2별관과 옛 국학대학 등을 했다. 그 중에서 대표작은 역시 경교장이다.

차별받는 조선인 건축가들의 큰 우산, 박길룡

1941년 김세연은 총독부를 퇴사하고, 이듬해부터 대창공영주식회사라는 건설업체를 운영하였다. 그런데 1943년 박길룡이 뇌일혈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김세연은 박길룡 유족을 위한 모금에 참여하고, 자신의 회사 대신 박길룡의 회사를 꾸려나갔다. '박길룡건축사무소' 이름을 그대로 유지한 채.  

광복이 되자, 원로건축가가 된 김세연은 여러 건축 단체를 창립하는데 주역이 되었다. 1945년부터 1954년까지 조선건축기술단, 조선건축기술협회, 대한건축기술협회, 대한건축학회의 단장과 회장을 역임했다. 조선건축사협회 고문과 조선토건협회 초대 회장도 지냈다. 모두 오늘날 주요 건축 단체인 대한건축학회, 대한건축사협회, 대한건설협회의 전신들이다.

그 기간에 김세연은 '박길룡건축사무소'를 접고 '김세연건축사무소'를 열었다. '박길룡건축사무소'는 한국 최초의 건축사무소였다. 박길룡은 차별받는 조선인 건축가들의 큰 우산이었다. 박길룡사무소는 조선인 건축가들의 아지트였다. 그런 사무소가 계속 이어져왔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텐데, 아쉬워하는 건축가들도 있다.

그런데 김세연은 왜 그랬을까? 한꺼번에 여러 감투를 쓰다 보니, 없던 야심이라도 갑자기 생긴 것일까? '김세연건축사무소'가 개소한 것은 1948년이었다. 그 해에 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반민특위가 아니더라도 대중들은 이미 그전부터 친일파를 성토하고 단죄를 요구해왔다.

박흥식, 김연수, 김성수....조선인 건축가들의 건축주들이 반민특위에 회부되었다. 경교장의 주인 최창학도 마찬가지였다. 최창학이 경교장을 임시정부에 헌납한 것도 친일 경력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박길룡은 일제강점기에 가장 유명했던 조선인 건축가였다. 그만큼 홍보효과도 좋았다. 박길룡의 이름은 일제 말기 전시체제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에 올라가 있었다.

김세연은 불안했을까? 건축 인생의 파트너 박길룡이라는 이름 때문에? 차라리 박길룡의 간판을 내리자, 그게 갓 결성된 건축단체도, 그 자신도, 옛 동료의 명예도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김세연건축사무소'를 열기 한 달 전이었다. 평소 얌전·침묵·봉사의 이미지였던 그가 '조선건축기술단'의 기관지에 제법 센 어투로 글을 썼다. 내용은, 의타사상을 청산하고 자주건설의 용사가 되자!   

훗날, 윤동주 시인의 동생이자 건축학자인 윤일주도 불안한 적이 있었다. 박길룡의 자료를 조사하면서 혹시나 친일적인 요소가 발견되면 어쩌나 싶어서. 문헌을 뒤질수록 박길룡이 한국인으로서 뚜렷한 입장과 주장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자 설레기까지 했을 정도로.[2]

그만큼 그 시대의 건축가는 일제라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건축가끼리 아무리 팔은 안으로 굽어도, 의구심을 온전히 털어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근대건축은 편하게 말할 수 있어도, 근대건축가에 대해선 그렇지가 않다. 

그런데 실상 건축 밖의 사람들은 건축가를 주목하지도, 사상이나 의식과 관련된 존재로 여기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박동진이 보성전문 도서관을 설계했을 때였다. 건축주 김성수는 서양의 건축을 두루 돌아보고 직접 설계안을 낼 정도로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사람도 박동진이 민족의식 운운하자, 기술자가 도면이나 그리지 무슨 인생관이냐고 대꾸했다. 발끈해진 박동진이 기술자에게도 조국이 있고 민족이 있다고 받아치자 김성수가 사과를 했다지만, 근대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도 건축가의 의미는 그 정도였다. 사농공상의 관념이 잔존하던 시대에 건축가를 미장이로 알던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인식이 건축가에게 오히려 보호막이 되었다. 양날의 칼처럼, 건축가도 그 보호막 뒤에서 과학과 기술의 중립성이라는 함정에 빠지곤 했다. 건축 안의 문제에는 예민했지만, 건축 바깥의 문제를 끌어안으며 사회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속도는 더딘 편이었다.

김세연이 설계한 옛 동덕여고, 풍문여고, 동성상업학교(동성고), 옛 보성중학교(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출처: 김정동, ‘김세연과 그의 건축활동에 대한 소고’, <대한건축역사학회>, 2007.
 김세연이 설계한 옛 동덕여고, 풍문여고, 동성상업학교(동성고), 옛 보성중학교(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출처: 김정동, ‘김세연과 그의 건축활동에 대한 소고’, <대한건축역사학회>, 2007.
ⓒ 대한건축역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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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연이 부업으로 설계했던 경교장은 백범 김구가 살았을 때 가장 찬란했다. 백범 서거 후, 경교장은 최창학에게 반환되었다가, 타이완 대사관저, 미군 특수부대 주둔지, 베트남대사관저, 급기야 강북삼성병원의 현관이 되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후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복원을 거쳐 전시관으로 개관되었다. 그러나 백범 시절에 시민들로 가득 찼던 마당은 주차장이 되었고, 경교장은 구름다리와 고층 병원에 갇혀 있다.

그런데 이런 우연도 있을까. 한자 한 글자가 다르긴 하지만, 최창학을 천만장자 친일파로 만들어준 금광 이름이 삼성(三成), 오늘날 경교장을 재물로 가둬 버린 병원 이름도 삼성(三星)이다.

[1] 김정동, '김세연과 그의 건축활동에 관한 소고', 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2007.
[2] 윤일주, <한국근대건축사연구>, 기문당, 1988.


태그:#김세연, #근대건축가, #경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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