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따라> 자체가 멜로 중심 드라마는 아니었잖아요. 밴드의 성장 드라마라 선배로서 누나 같은 마음으로 응원했어요. 그래도 석호(지성 분)가 조금 이해는 안 됐어요. 이렇게 괜찮은 여자를 어떻게 10년이나 몰라줘. (웃음)"

<딴따라> 여민주는 정말 괜찮은 여자였다. 재벌 2세지만 부모의 부를 누리지도 않았고, 오랜 시간 짝사랑해온 친구 석호의 마음이 그린(혜리 분)에게 향해있는 것을 알고도 훼방을 놓거나 쏘아대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여민주를 연기한 배우 채정안(38)과 만나 든 생각도 그랬다. 정말 괜찮은 여자.

데뷔 20년, "여전히 철 없다"

 채정안

그녀는 여전히 '누나'로 있고 싶다고 했다. 데뷔한 지 20년이나 됐지만 그녀는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채로 남아있기를 바랐다. ⓒ 더좋은ENT


1996년 MBC <남자셋 여자셋>으로 데뷔한 채정안은 올해 꼭 데뷔 20년이 됐다. 유난히 어린 신인들이 많았던 <딴따라> 촬영장에서 그녀는 '원로급'에 속했다. 실제로 촬영장에서 한 스태프가 자신을 선생님이라 불러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고. 정말 질색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나이가 든다고 다 철드는 거 아니잖아요"라면서 어린 친구들에게 어른이기보다 "그냥 누나가 되고 싶었"단다.

본인은 "여전히 철들지 않았"다지만, 20년이라는 시간은 그녀를 어른으로, 배우로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통통 튀는 하이틴 스타로 데뷔한 그녀는 가수로 변신해 테크노 여전사가 됐다가, <커피프린스 1호점> 한유주 역으로 첫사랑의 대명사가 됐다. 남자 주인공의 첫사랑은 로맨스 드라마의 단골 소재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한유주를 최고의 첫사랑 캐릭터로 꼽는다.

"전 한유주가 너무 좋아요. 그땐 어린 마음에 빨리 변신하고 싶은 마음만 있었어요.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잖아요. 그때만의 예쁨, 자연스러움. 돌아간다 해도 지금과 감성이 다르겠죠."

그래서일까? 최근 <개과천선> <용팔이> <딴따라> 등 연이어 재벌, '차도녀(차가운 도시 여자)'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지만 "급격하게 변해야겠다는 조바심보다는 서서히 변화를 주고 싶"단다.

"어느 순간부터 재벌 역할이 계속 들어왔어요. 정체되는 기분도 들기도 했죠. 보통 재벌녀는 돈, 야망을 장치로 이용하는 캐릭터잖아요. 가난해도 되니까 이제는 진짜 사랑을 갖고 싶기도 하고. (웃음) 어쨌든 제 안에 그런 모습이 있어서 찾아주신 걸 테니 '너무 싫어' 이런 마음보다, 조금씩 깨고 싶어요. 사실 여민주도 재벌이기는 하지만, 전형적인 재벌녀 캐릭터는 아니었잖아요. 언젠가 제 안에 다른 매력을 끄집어낼 수 있을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

첫사랑의 아이콘, 재벌 전문 여배우... 그게 다 아니다

 채정안

절절한 로맨스에서 액션까지…. 그녀는 이전과는 다른 '나'를 보여주고 싶어했고, 그 갈증이 배우의 길을 걸어가는 원동력을 선사하는 듯 했다. ⓒ 더좋은ENT


그녀가 보여주고 싶은 다른 매력이 뭔지 물었더니 "액션"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묘한 분노와 답답함 같은 게 있는데, 정의를 위해 이 한 몸 부서져라 투쟁하고 싶은 에너지가 있다"며 목소리를 높이며 허공에 주먹을 날리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사실 어제 같은 질문 받았을 땐 절절한 로맨스라고 했어요. 하루하루 바뀌어요. 하지만 공통점은 막 쏟아내고 싶다는 거? 징그럽게 사랑하는 역할도 하고 싶은데, 꼭 이성 간의 사랑의 사랑이 아니라 모성애도 있을 거고, 선생의 마음도 있을 것 같아요. 지독하고 처절하게, 캐릭터와 전쟁을 치르고 싶어요. 끝내고 스스로 '잘했어' 하고 싶은."

채정안은 쉴새 없이 하고 싶은 것들을 말했다. JTBC <마녀보감> 염정아 같은 소름 끼치는 악역도 해보고 싶고, 강아지를 워낙 좋아해 반려견과 함께할 수 있는 예능프로그램도 해보고 싶단다. <딴따라>에서 딴따라 밴드가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장면을 보면서 과거 '테크노 여전사' 시절이 그립기도 했다고.

번뜩 "다시 앨범 낼 거예요. 싱글로라도." 다짐처럼 외치더니 금세 "저 혼자 생각이에요"라며 깔깔대고 웃었다. 이어 "돈 벌어서 제가 제작할 거예요, <유희열의 스케치북> 같은 프로에도 나가서 라이브도 해보고 싶어요, 저 그렇게 라이브 안 되는 가수 아니었어요"라고 유쾌하게 말했다.

채정안의 '디마프' 멤버는?

 채정안

<딴따라>에서 선배 노릇을 하는 그녀가 <디어 마이 프렌즈>를 보며 위안을 얻은 건 그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선배 배우들이 가는 길은 후배에게 어떤 좌표를 제시한다. 누군가는 그녀의 등을 보며 길을 걸어가고 있을지 모른다. ⓒ 더좋은ENT


채정안은 요즘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tvN <디어 마이 프렌즈>에 푹 빠져있다는 채정안. 김혜자, 고두심, 윤여정, 김영옥, 박원숙 등 까마득한 선배 여배우들의 노련한 연기를 보며 자신의 30년 뒤를 그려봤다고.

"선배님들 연기를 보면서 존경심도 생겼지만, 한 번 뵙고 꼭 안아보고 싶더라고요. 아니, 안기고 싶은 마음? 본의 아니게 <딴따라>에서 선배 노릇을 하다 보니 선배님들께 위안받고 싶었어요. 그냥 너무 멋있으시더라고요. 우리 드라마에서 얘기하려던 진짜 '딴따라'가 그런 모습이었겠지 싶어요. 그 속에서 선배님들과 눈 마주치고 연기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할 것 같아요."

오랜 시간, 한 길을 함께 걸어온 까마득한 선배들이 한 앵글에 담겨있는 모습을 만으로도 감동이 밀려들었다는 채정안. 먼 훗날 그녀가 <디어 마이 프렌즈>에 출연한다면 그 곁에 함께하고 싶은 이들은 누구인지 물었다.

"연예계에 친한 또래 배우가 몇 없어요. 하지만 김현주씨랑은 같은 VJ 출신에 데뷔연도도 비슷해서 가끔 시상식에서 만나면 응원하는 사이예요. 지금도 연기 굉장히 잘하고 있잖아요. 최지우씨도 너무 예쁘고 곱게 나이들 것 같은 여배우라 떠오르네요. <딴따라>에서 함께한 지성씨는 주현 선생님이나 신구 선생님 역할로 참여하실까요? 그럼 이보영씨도 함께? 하하하. 이런 생각 하면 늙는다는 게 슬프지만은 않아요."

언젠가 후배들이 자신의 이름을 떠올렸을 때 든든한 위로가 되는 따뜻한 선배가 되고 싶다는 그녀. "갑자기 연기파 배우가 돼서 '네게 연기를 알려주겠어!' 이런 건 아니에요"라고 손사래를 치더니 "한 길을 꾸준히 가는 멋있는 사람 멋있잖아요, 그런 선배, 힘들 때 술 한잔 사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내 편인 것 같은 선배가 되고 싶어요"라고 진지하게 소박한 바람을 이야기했다.

한 시간. 그녀는 시종일관 호탕했고 유쾌했다. "나이 먹는다고 다 어른 되는 건 아니더라"며 내내 자신의 여전한 철없음을 어필하던 채정안. 하지만 허투루 흐르는 시간은 없는 법. 20년간 차곡차곡 쌓여온 시간은 호탕한 웃음과 유쾌한 말투로도 감춰지지 않았다.

 채정안

채정안은 호탕하고 유쾌한 사람이었고, 또 그런 배우였다. 스스로 자꾸 "철없다"고 말했지만, 그녀가 거쳐 온 시간은 그녀를 그저 지나가지 않았다. 20년의 내공, 그녀의 호탕한 웃음 뒤에서 단단한 힘이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 더좋은ENT



채정안 딴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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