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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대전형무소 터에 조성된 인민군에 의한 희생자 추모비
 옛 대전형무소 터에 조성된 인민군에 의한 희생자 추모비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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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당시 대전의 인구는 13만이었다.

6월 25일. 북한의 탱크와 대포가 일제히 38선을 넘었다. 이틀 뒤인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탈출, 몰래 대전으로 피신했다.

이날 충남도지사 관사에 머문 이승만은 대전방송국 방송과장을 불렀다. 이승만은 현관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 이어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방송기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충남도지사 관사에서 녹음된 이승만의 방송요지는 '국군이 인민군을 격퇴하고 서울을 방어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것이었다. '자신과 함께 서울을 사수하자'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누가 물어도 대전에서 방송한다고 말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과 함께 서울을 지키자'는 호소를 믿고 피난을 포기했던 서울시민들은 28일 새벽 한강 다리가 끊기면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대통령이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도주한 것을 가장 먼저 안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국회의원과 내무부장관, 법무부 장관 등 정부 각료, 고급관리, 재계인사, 별을 단 장군, 그들의 가족이었다. 정부 각료들은 한강 다리가 끊기기 전 이승만이 내려온 길을 따라 대전에 속속 도착했다.

이들은 부지 3000평에 건평이 2백 평 남짓한 대전 시내에 있는 성남장 여관에 머물렀다. 이곳에만 약 300여 명이 몰려들었다. 이들의 생활은 전쟁과 무관해 보였다.

"뜰에는 그 사람들이 타고 온 자동차가 80대 이상이나 주차돼 있었고 그중에는 가재도구부터 개까지 끌고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식사용 쌀이 하루 다섯 가마나 필요했고 반찬만도 큰일이었습니다. 이 중에는 '이것은 맛이 없다, 다른 반찬을 더 내라'며 귀찮게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하루라도 빨리 더 안전한 곳으로 가려고 수소문하기만 했습니다." ('성남장' 주인 김금덕씨 증언, 중앙일보사, <민족의 증언> 1권, 1983년)

충남도청은 임시 중앙청 건물로 사용됐다. 도청의 각 국장실은 장관실이 됐다. 충남도청 회의실은 국회의사당 역할을 했다. 7월 1일과 4일 각각 임시국회가 소집됐지만 두 번 모두 과반을 채우지 못했다.

1950년 인민군의 '대전 해방작전진행도, 『조선전사?25』
 1950년 인민군의 '대전 해방작전진행도, 『조선전사?25』
ⓒ 조선전사?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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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이승만이 일찌감치 목포를 거쳐 부산으로 피난했기 때문이다. 정부요인들은 곧장 대통령을 따라 부산으로 향했다.

다른 한편 이승만과 정부 각료들은 '반정부 세력' 처단을 지시했다. 6월 28일부터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하기 직전인 7월 중순까지 충청지역에서 최소 4400명에서 최고 7000여 명의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수감 재소자 등이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불법 총살됐다.

7월 2일.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보병 21연대(제1대대장인 스미스 중령)가 바주카포를 둘러매고 대전역에 도착했다. 3일에는 미 8군 산하 제24사단장인 딘 소장이 대전비행장에 도착했다. 딘 소장은 이날 충남도청 2층의 처치 장군 집무실에서 주한 미 육군사령관직을 겸직하게 됐음을 통보받았다.

7월 12일. 충남도지사 관사에서는 '대전협정'이 체결됐다. '재한(한국거주) 미국군대의 관할권에 관한 협정'으로 이는 대한민국에서 미군의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게 한 굴욕적인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의 모태가 됐다.

7월 14일부터 20일까지. 금강을 사이에 두고 한국전쟁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참혹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대전 전투'가 벌어졌다. 24사단과 인민군 1군 산하 3·4사단이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대전시가지가 전쟁터가 됐다. 시도 때도 없이 폭격기가 도심을 공격했다.

그로부터 6일 만에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했다. '대전전투'에서 미군은 제24사단장 딘이 낙오됐다. (딘 소장은 헤매다 8월 25일 전북 완주에서 인민군에게 생포됐다.) 또 30%의 병력 손실과 1개 사단 분의 장비를 잃어버렸다. 살아남은 24사단 장병들은 대부분 개별적으로 후퇴했다. 인민군 또한 15대의 전차와 15대의 자주포, 그리고 122mm 곡사포 6문과 병력 손실을 보았다. 그만큼 전투가 치열했다.

대전 보문산에 세운 대전지구 전적비(미 제24사단의 전적과 혈맹의 우의를 전하기 위해 세운 비)
 대전 보문산에 세운 대전지구 전적비(미 제24사단의 전적과 혈맹의 우의를 전하기 위해 세운 비)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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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1일. 대전을 완전히 장악한 인민군 일부는 곧장 산내 골령골 집단희생지로 향했다. 산내 골령골에서 군경의 보도연맹원 등에 대한 마지막 집단학살이 있은 지 나흘이 지난 뒤였다. 인민군은 충남도청을 군 본부로 사용했다. 군에는 정치보위부가 설치됐다. 산내 골령골에서 민간인을 살해한 가해자를 체포하고 분류하는 일은 정치보위부가 맡았다.

인민군은 퇴각 직전인 9월 25일 새벽부터 27일까지 3일간 대전형무소 등에 갇혀 있던 경찰, 군인, 공무원, 대한청년단원 등 우익인사 1557명을 집단 처형했다. 정치보위부 간부가 심사 및 처형 명령을 내렸고, 인민군 및 정치보위부원, 내무서원이 총살을 집행했다. 이로써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대전형무소를 중심으로 최소 6000여 명이 희생됐다.

9월 28일. 서울 수복으로 인민군이 퇴각하자 군경은 다시 인민군에 협조하거나 동조한 부역자 색출에 나섰다. 대전형무소는 다시 부역혐의자로 가득 찼다. 군경은 중국군의 참여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대전형무소에 갇힌 부역혐의자들을 1.4 후퇴(1951년 1월) 시기에 대전 산내 골령골로 끌고 가 처형했다. '보복'이 또다시 '보복'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국전쟁과 대전 전투 66주년을 맞아 대전시민들이 당시 '전쟁의 상처'를 찾아 나선다.
'평화의 길'을 묻기 위해서다. '대전충청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아래 대전 평통사)이 마련한 '제2회 대전 평화 발자국' 행사다.

대전 골령골에서 군경에 의해 희생된 의생자 유가족들
 대전 골령골에서 군경에 의해 희생된 의생자 유가족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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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5일, 이들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 20분까지 대전형무소 터를 시작으로 옛 충남도청사 - 옛 충남도지사 공관 - 보문산 대전지구 전승비(미 24사단 대전지구 전승비)- 대전지구 전적비(미 제24사단의 전적과 혈맹의 우의를 전하기 위해 세운 비)- 애국지사총(인민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 묘지) -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지(군경에 의한 민간인 집단 희생지)를 차례로 찾을 예정이다.

유영재 대전 평통사 사무국장은 "대전 곳곳에 남아 있는 전재의 흔적을 찾아 대전이 왜 한국전쟁의 최대 피해 도시가 됐는지를 살펴보고 전쟁을 넘어 평화와 상생의 도시로 만들기 위한 고민을 나누려 한다"고 말했다.

관심 있는 대전 시민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이날 역사 기행은 <오마이뉴스 대전충청>과 <금강일보>가 후원한다.


태그:#대전전투, #66주년, #한국전쟁, #보문산, #대전형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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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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