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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5일,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이하여 이 글을 완성했다. 이 글은 지난 2년간 다카하시 다케토모 선생과 만나며, 이예다씨와 함께 하며, 일본의 평화운동가 및 시민운동가들의 궤적을 따르며 기록한 것들의 결과물이다.

아직 한국의 비인간적인 징병제와 군사주의 타파는 갈 길이 멀고, 일본은 아베 정권의 '정상국가'화 작업으로 군사화가 진행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날이 커지고 있다. 이 와중에 평화와 자유를 갈구하는 일본과 한국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시대의 틈바구니에서 소중한 만남을 가질 수 있어서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에 이곳에 그날의 기록들을 정리해 놓는다.

혹시나 잘못된 정보로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다카하시씨의 행적과 베헤이렌의 활동을 오랜 시간을 두고 살펴보느라 다소 원고가 늦은 감이 있다. 유엔이 제정한 세계 난민의 날(6월 20)에 맞추어, 이 글을 내어 놓는다...<기자말>

망명자와의 재회

2015년 새해 벽두였다. 나와 이예다씨가 일본의 외국특파원협회(FCCJ. 일본에 주재하는 외국인 기자들의 클럽. 필자 주)에서 징병제의 문제점을 두고 기자회견을 한 후 두어달이 흐른 때였다. 우리는 헤어질 때 일본에서 징병제 반대모임을 조직하고 계신 한국인 K씨(가명)와 향후 방향을 이야기 했다.

"가능하시다면, 안악희씨도, 이예다씨도 올해 연말 연시를 일본에서 보내시면 어떨까요. 함께 일본 신정음식도 먹으면서, 다양한 사람도 더 만나고요."

일본에서 이예다씨와 K씨와 함께 보낸 시간은 정말 엄청난 시간이었다. 나는 우리가 함께 하면 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내심 기대되었다.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세밑을 함께 하기 위해 일본으로 서둘러 향했다. 지난 일정은 좀 촉박하기도 했고, 좀 더 넉넉한 분위기에서 예다씨와 사람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단숨에 도쿄로 향했다.

옛 망명자의 거처를 찾아간 신 망명자 이 곳은 그 유명한 “김대중 납치사건"의 현장이다. 옛 망명자가 납치당한 현장에 새로운 망명자로 하여금 답사를 시킨다는 K씨의 장난스러운 취지였다.
▲ 옛 망명자의 거처를 찾아간 신 망명자 이 곳은 그 유명한 “김대중 납치사건"의 현장이다. 옛 망명자가 납치당한 현장에 새로운 망명자로 하여금 답사를 시킨다는 K씨의 장난스러운 취지였다.
ⓒ 안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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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만에 만난 이예다씨와 K씨는 좀 더 친숙하고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도쿄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K씨가 말을 꺼냈다.

"이번에는 일본에서 베트남 전쟁 시기에 평화운동을 하던 베헤이렌(베평련.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대". 필자 주)의 비밀조직 자테크(JATEC. Japan Technical Committee to Aid Anti War GIs - 반전 탈주 미군 원조 일본 기술위원회. 필자 주)의 멤버들을 만나보시면 어떨까요?"

자테크라니, 놀라운 이야기였다.

1960년대, 일본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에 따르면 "배멀미의 시대"였다. 다양한 시민/사회단체가 다양한 이슈를 두고 체제에 대항해 싸우던 시기였다. 일부 과격단체는 거리에서 경찰 기동대와 격돌했고, 그들 중 일부는 지나치게 '멀리 간' 나머지 테러리즘에 빠지기도 했다.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 베헤이렌이 있었다. 이들은 베트남 전쟁의 보급기지로 쓰이는 일본의 현실에 분개하여 결성된 단체였다. 이들은 기존 단체들과 달리, 좌우 진영을 초월하여 대중적인 반전운동을 전개했다. 베헤이렌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으로, 무당파 연합이었다. 이들은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등 미국 일간지에 일본 시민의 의견으로서 반전광고를 게재하기도 했으며, 각 지역별로 저마다의 방식을 통해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혔다. 조직원도 노동조합원, 좌익단체, 우익, 학생, 주부, 예술가, 학자, 자영업자 등 다양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통한 범 사회 집단이었다. 때로는 좌익 단체로부터 "문화인들의 부르주아적 베트남 운동"이라는 비난도 받았고, 일부 멤버들은 베평련을 통해 과격화 되어 "과격파의 디딤돌"이라는 비난도 받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유로운 시민연합으로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들 중 일부는 지역마다 카페나 가게를 열어서 반문화와 저항세력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베헤이렌 내부의 비밀조직이 바로 자테크였다. 자테크는 미군 탈영병을 망명시키는 목적으로 결성된 내부 그룹이었다. 일본은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중간거점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 출발한 병력과 물자들이 일본의 미군기지를 거쳐서 베트남으로 출발했다. 대부분의 미군들은 일본에 머무는 동안 며칠간의 휴가를 얻어 휴식을 취했다. 당시 미국은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었고, 많은 병사들이 자의에 반하여 베트남으로 끌려갔다. 이들 중 일부가 일본에서 탈영을 감행했고, 이들을 제3국으로 망명시킨 조직이 바로 자테크였다.

자테크는 당초 비밀루트를 통해 탈영병들을 홋카이도로 이동시킨 뒤, 소련을 통해 북유럽이나 서유럽으로 망명시켰다. 그러나 CIA요원으로 추정되는 가짜 탈영병의 유입으로 소련 루트가 탄로난 뒤, 밀항이나 여권 위조를 통해 미군 탈영병들을 해외로 빼돌리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방식은 19세기 당시 미국에서 흑인 노예들을 자유주나 캐나다로 탈출시키던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와 나치 독일 치하에서 유태인들을 탈출시키던 방법을 벤치마킹 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단체의 실제 인물을 만나게 된 것이다.

과연 격동의 시대에 전쟁에 저항하던 사람은 어떨까? 우리는 기대 반 우려 반의 마음으로 요코하마로 향했다.

요코하마에서

나와 예다씨와 K씨는 요코하마로 향했다. 요코하마는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인해 개항된, 일본 근대화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다. 우리는 일본의 개화기를 상징하는 요코하마의 오래된 부둣가를 거닐었다. 요코하마는 나의 느낌으로는 마치 인천과 같은 곳이었다.

요코하마의 부둣가에서 필자와 이예다씨. 요코하마는 개항장으로서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였다. 요코하마 개항 박물관의 어느 건물 벽에 기대어 서서.
▲ 요코하마의 부둣가에서 필자와 이예다씨. 요코하마는 개항장으로서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였다. 요코하마 개항 박물관의 어느 건물 벽에 기대어 서서.
ⓒ 안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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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이 되어서, 우리는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K씨의 연락을 따라, 우리는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의 한 음식점으로 향했다. 이윽고, 우리는 베헤이렌의 멤버이자 자테크의 주요 멤버였던 다카하시 다케토모(高橋武智. 81)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인자한 표정의 다카하시 선생님은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다.

막상 뵙기 전 까지는 걱정이 앞섰다. 연세가 많은 분이시기에, 괜스레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다카하시씨는 굉장히 정정한 분이셨다. 그는 일본에서는 불문학자이자 9시간 30분에 달하는 대작 영화인 <SHOAH>(나치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강제수용소 주변인들의 시선을 다룬 세미 다큐멘터리)의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우리와 본격적으로 이야기 하기에 앞서, 간단히 식사를 하며 술을 마셨는데, 맥주와 소홍주를 몇잔이고 비우셨다. 역시, 젊은 시절 유럽과 일본을 오가며 한 가닥 하시던 분은 다르구나 싶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손자뻘이었는데, 우리에게 격의없이 대해주시는 모습에 다소 감동받았다.

시민의견 30의 모임·도쿄의 광고 다카하시씨가 공동대표로 계신 “시민의견 30인의 모임"은 2015년 광복절에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일본 정부와 입장을 달리하는 일본 시민들의 전후 70년 메시지”라는 광고를 게재했다. 이 광고에는 “일본에 피해를 입은 모든 나라 국민들께 진심 어린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라는 메세지가 담겨 있었다.
▲ 시민의견 30의 모임·도쿄의 광고 다카하시씨가 공동대표로 계신 “시민의견 30인의 모임"은 2015년 광복절에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일본 정부와 입장을 달리하는 일본 시민들의 전후 70년 메시지”라는 광고를 게재했다. 이 광고에는 “일본에 피해를 입은 모든 나라 국민들께 진심 어린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라는 메세지가 담겨 있었다.
ⓒ 市民の意見30の會/東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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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씨는 한국에서 온 망명자 이예다씨의 이야기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자신들은 전쟁에 반대하여 미군을 유럽으로 망명시켰는데, 비슷한 케이스의 이야기가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자뭇 흥미로우신듯 했다. 다카하시씨는 이예다씨가 가져온, 프랑스 정부가 발급한 망명자용 여권을 흥미롭게 살펴보셨다.

"저는 한국에서 징병을 반대하여 프랑스로 망명했습니다."
"전쟁과 징병에 반대하는 행동은 옳습니다. 어려운 결정 하셨습니다."

망명의 증명 이예다씨의 여권을 살펴보고 계신 다카하시 다케토모 선생
▲ 망명의 증명 이예다씨의 여권을 살펴보고 계신 다카하시 다케토모 선생
ⓒ 안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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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씨는 이예다씨에게 덕담을 건넸다. 이어서 그의 베헤이렌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는 베트남전의 북폭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태평양 전쟁을 겪은 세대입니다. 베트남 전쟁이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민간인을 폭격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베헤이렌은 미국의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 베트남전 초기의 전략 폭격작전. 1965년에 시작하여 1968년에 끝났다. 필자 주)에 자극을 받은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이 결성한 단체다. 당시 일본에는 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오롯이 가진 사람들이 생존해 있었다. 한국인들은 일본을 군국주의적 집합체로 보는 선입견이 존재하는데, 일본은 패전 이전부터 전쟁에 비판적인(또한 전시 체제 하에서 숨죽이며 암약하던) 세력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전후 진보와 리버럴 세력으로 결집하였고, 사회 개혁을 위해 좌충우돌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들 중 일부가 베헤이렌을 결성하게 되었다.

"베헤이렌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고 일본이 전쟁의 전진기지로 쓰이는 것에 반대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조직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죠. 가입도 탈퇴도 자유였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수행하지 않도록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여담으로 다카하시씨는 태평양전쟁 종전 이전, 그 시절에는 '평범하게' 받아들여 지던 군국주의 사상에 경도된 소년이었다. 공습을 경험했고, 민간인 소개로 인해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친척집에서 생활한 적도 있다고 한다. 적들이 쳐들어 오면 죽창을 들고 싸울것이라고 다짐했던 소년은, 패전 후 등교한 학교에서 교과서에 온통 먹칠이 되어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교과서의 군국주의적인 부분이나 군사주의를 미화하는 부분은 미군정에 의해 전부 먹칠을 하도록 명령받은 것이다.

다카하시씨는 도쿄대 대학원 졸업 후, 1965년 국비 유학생 신분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이 소용돌이 치던 시기였다. 이 때 다카하시씨는 막 결성된 베헤이렌에 참가했고, 베헤이렌 유럽 담당이라는 명함을 가지고 다니면서 유럽에서 연대활동에 나서게 된다(여담으로 이 당시 다카하시씨는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와 조우하게 되고, 이 두 석학의 일본 강연을 성사시키는 데에 협력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인해, 그는 귀국 후 릿쿄대에서 조교수로 임용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전임 활동가로 나서게 된다.

베헤이렌은 당시 철학자 츠루미 슌스케(2015년 작고)와 정치학자 다카바다케 미츠토시에 의해 1965년 결성된 조직이었다. 베헤이렌은 보다 넓은 저변확대와 실효적인 운동을 위해 "대중적 인지도가 있으면서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을 리더로 필요로 하다가, 인기 작가 오다 마코토를 찾게 되었다. 오다 마코토는 1960년부터 평화 운동에 관여하고 있었지만,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그렇게 리더가 되었다. 베헤이렌은 폭넓은 대중운동을 통해 "전쟁을 하지 않는 일본"의 의식을 일깨우는 운동을 했다.

우리는 반전 평화운동으로 격동기를 형성한 단체와 인물들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쌓여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다카하시씨에게 물어본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에서는 징병에 반대하여 감옥에 가거나 망명하는 사람들을 겁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시 베트남에 가고 싶지 않다고 탈영하는 미군을 비난하는 일본인들은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일본이 하던 짓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시 미군 병사들은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다카하시씨는 말을 이어 가셨다.

"군인은 (지휘부를 제외하고)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우리의 리더인 오다 마코토는 전쟁의 참화에서 죽어가면 그것은 '난사(難死)'라는 개념을 들어, 군인이 전장에서는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원하지 않는 명령을 수행하는 피해자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당시 탈주 미군들을 도왔을 때, 일본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우리를 신고하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우리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도 우리에게 궁금한 점이 있으신듯 했다.

"하지만 베트남전의 상황 하에서, 저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베헤이렌이 결성되기 전에, 한국군은 이미 파병을 완료한 상태였습니다. 사회 일각에서 한국군이 '미국의 용병'이라는 문제 제기를 했지만, 한국군은 미국이 요청하기 전에 스스로 파병했습니다. 저로서는 당시의 한국 분위기를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복잡한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사실, 한국은 당시 한국전쟁의 트라우마에 강하게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전쟁은 다양한 이유가 있었고, 여러가지 이해에 따라 같은 한국인들끼리 죽고 죽인 전쟁이지만, 남한에서는 '북한 공산도배의 침략으로 인한 전란'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있었습니다. 실제로 북조선의 전면 남침으로 벌어진 전면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억에 따라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기 위한 반공성전이라는 인식, 한국전쟁 당시 UN 연합군에 의해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도 보답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통킹만 사건으로 인해 베트남전이 개전한 후, 이 흐름은 당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습니다."

당시 탈영병들의 이야기

베헤이렌의 미군 탈영병 지원은 1967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활동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바로 미 항모 인트레피드호에서 탈영한 "인트레피드의 4인"이다.

다카하시씨의 말에 따르면, 인트레피드호가 일본에 정박했을 당시, 베트남전에 반대한 미군 4명이 탈영을 감행했다. 이들이 도쿄 시내를 떠돌고 있을때, 우연히 신주쿠에서 이들을 만난 젊은이들이 "베헤이렌이라는 단체에 도움을 청하면 어떻겠는가"라고 제안했다. 이들은 그 길로 베헤이렌을 찾았고, 베헤이렌은 이들을 몰래 홋카이도로 보내서 소련 연락선을 통해 밀항시켰다. 이들은 소련을 통해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이에 고무받은 베헤이렌은 미군 탈영병들을 망명시키는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고, 베헤이렌의 내부의 비밀조직인 자테크가 결성되었다. 자테크는 망명 지원을 전문으로 하는 소그룹이었다.

베헤이렌은 인트레피드의 4인이 탈영을 할 시점 이전부터 미군부대 앞에서 베트남전에 참여하지 말것을, 병역을 거부할 것을 독려하는 전단을 나눠주는 등, 반전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반응한 미군들이 적지 않았다. 인트레피드의 4인 이후, 다양한 미군 탈영병들이 베헤이렌을 찾았다. 이들 중에는 한국계 미국인 병사 김진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당시 김진수는 미군 신분이었지만 한국 국적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일 양국의 외교문제로 비화 할 수 있었고, 중앙정보부, 일본 공안 당국, 미군 헌병대가 함께 찾아 나서는 기묘한 풍경도 펼쳐졌다(김진수에 관한 이야기는 <한겨레 21> 1010호와 <황해문화> 2014년 여름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다카하시씨가 질문했다.

"현재 한국은 징병제를 반대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예다씨가 답했다.

"대부분 1년 6개월의 징역을 받고 감옥에 갑니다."
"대체복무나 다른 방법은 없나요?"

옆에서 내가 거들었다.

"대체복무는 2007년에 도입될 뻔 했는데, 정권이 교체되면서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현재 한국에서는 병역을 거부하고 감옥에 가는 사람들이 매해 600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이유부터 정치적 신념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이유로 병역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감옥에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해외로 떠나는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 망명을 결행한 사람들이 이예다씨 외에도 더 있습니다. 한국인 망명자들에게는 이러한 배경이 있습니다."

다카하시씨는 당시 자테크와 자신이 망명을 도왔던 미군 병사들의 이야기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듯 했다. 다카하시씨는 당시 미군 병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당시 일본은 베트남전을 수행하기 위한 미군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습니다. 베트남 공습을 위한 전투기가 오키나와에서 출격하고 있었고, 수송선에 실려온 미군 병사들은 일본에 잠시 머물다 떠났습니다. 이 와중에 탈영한 병사들이 우리를 찾아왔고, 우리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초기에는 네트워크를 최대한 동원해서 이들을 보호할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연이 닿는 노동조합 사무실이나 지인의 집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일단 홋카이도의 밀항선으로 탈영병들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먼 길을 가야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공안 경찰이나 미군 헌병에게 걸리지 않고 안전하게 보내야 했습니다. 산 속에 움막을 짓고 탈영병을 재우는 일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전국적인 연락망을 통해 조력자들을 모았고, 미군 탈영병들을 더 안전하게 망명시킬 수 있는 장소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 당시 미군 탈영병을 잠시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공간을 제공한 사람 중에 번역가 사카모토 가즈키도 있었다고 한다. 사카모토 가즈키의 아들이 바로 현대음악의 거장인 사카모토 류이치다. 베헤이렌 관련 서적을 보면 그가 10대 시절 미군 탈영병과 조우한 적이 있다는 내용도 언급된다. 자뭇 흥미로웠다. 역사의 톱니바퀴는 의외의 순간에 맞물리는 법이다.

"처음에는 홋카이도에서 밀항선에 승선시킨 뒤, 소련을 통해 스웨덴으로 보내는 루트를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이 루트가 탄로난 뒤(CIA 소속인지 미군 정보부 소속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탈영병을 가장한 정보 요원이 자테크에 접근하여 탈영 루트를 알아냈고, 망명 직전에 잠적했다. 이 이후 망명 루트가 탄로났고, 비슷한 시기에 소련과의 견해 차이로 더이상 소련 밀항 루트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필자 주) 우리는 다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국 선박을 이용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습니다."

다카하시씨는 이 이후 자테크의 노선이 불법과 합법을 넘나드는 노선을 택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기본적으로 미일 안전보장조약에 의하면, 미군 혹은 미군속 요원이 일본 영토를 드나드는 데에는 출입국 관리소의 통제를 받지 않도록 되어있었다. 이는 미군 요원들의 일본 출입국을 간소화하기 위한 조항이었는데, 자테크는 이를 기발하게 이용한 것이었다. 홋카이도 루트가 막힌 뒤, 자테크는 대담하게 여권을 위조할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아예 초법적인 방법으로, '여권을 위조해서 일단 외국으로 보내면 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에서 여권 위조 기술을 배워 왔습니다. 처음에는 2차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도피시키던 사람들에게 여권 위조를 배웠는데, 너무 낡은 방식이라 불가능했습니다. 이후 마치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식으로, 다단계 접선을 통하여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거물에게 여권 위조를 배워왔습니다. 결국 이들은 위조 여권으로 파리에 도착 후, 스웨덴으로 가서 망명에 성공 할 수 있었습니다."

자테크는 이런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미군들을 해외로 도피시켰다. 다카하시씨는 자테크 회의 중에 직접 손을 들고 '내가 직접 유럽에 가서 방법을 찾아 보겠다, 또한 유럽에서 협력해 줄 수 있는 단체를 찾아 교섭해 보겠다'고 했고, 시민들에게서 모금을 통해 모인 자금을 들고 유럽으로 향했다. 여권 위조 기술을 통한 미군 탈주병 망명 이야기는 공소시효가 지난 2000년 이후에 비로소 공개된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한겨레 21> 1022호 "고경태의 1968년 그날 - 파리 뒷골목에서 여권위조를 배우다" 에 자세히 나와있다  )

이 때 좀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는데, 다카하시씨는 여권 위조 기술자에게서 "여권 위조를 위해서는 여권 원본이 필요하다"는 점을 당부받았다. 그래서 다카하시씨는 유럽을 돌면서 여권을 모았는데, 밀라노의 시민단체 회원들은 기차에서 1등석 승객들의 여권을 훔쳐서 가져다 주기도 했고, 스웨덴의 진보적인 출판사 직원들은 "어차피 우리는 그냥 분실신고 하고 다시 발급받으면 된다"며 자신들이 가진 여권을 모아서 주기도 했다. 미군 탈주병을 위한 도움의 손길은 국제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탈영병들을 망명 시키는 한편, 일본 국내에서도 탈영 미군을 지원하는 활동을 계속 해나갔다. 또한 "탈영병 통신", "자테크 통신"같은 팜플렛을 만들어 선전활동을 하는가 하면, 주일미군 기지 주변에서 "반전 GI 운동 지원" 활동을 했다. 망명 뿐만 아니라 군대 내부에서 병역거부 또한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전쟁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60~70년대의 일본은 좌우 양쪽에서 미국의 전쟁기지로 쓰여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존재했다. 한국에는 일본에 군국주의가 남아있고, 일본은 전쟁과 군대에 대해 별 이의가 없다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전후 일본은 염전사상(전쟁에 관해 염증을 느끼는 사상)과 반전주의가 강했다. 형제나 이웃이 전쟁터에서 전사한 경험을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고, 개인이 전쟁의 도구로 쓰여서 소비되었다는 개념도 강하게 있었다(여담으로 다카하시씨는 "일본 전몰학생 기념회"를 통해 반전운동을 시작했다.

이 단체는 태평양 전쟁 후 학도병 전사자를 추모하는 반전주의 단체였다. 이는 "와다츠미노 카에 기념관"으로 이어졌으며, 다카하시씨가 현재 이사로 재직 중이다. 필자 주). 물론, 사회 일각에서는 여전히 패전의 책임을 다른곳으로 돌리고 전쟁에서 졌을 뿐 일본의 재무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공습과 원자탄 폭격을 당한 사람들에게 전쟁의 무의미함은 강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게다가 전후 세대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구세대의 군국주의는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가해자가 되었고, 또한 개인은 그 틈바구니에서 무의미한 피해자가 되었다. 개인이 가해자의 일원이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모두가 만세일계의 천황 군대의 일원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는 일본이 전쟁을 해서도, 개인이 전쟁의 참화를 겪어서도 안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전운동은 큰 반향을 얻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점은 좀 부러웠다. 어차피 전쟁을 하면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국가는 전쟁과 영광을 거창한 말로 포장하여 국민들을 전선으로 내몰지만, 그 뒤에는 상처 하나 입지 않는 높으신 분들이 계시고, 병사들을 먹고 입히고 싸우게 하는데 드는 쌀과 옷과 총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두둑하게 한 몫 챙기게 된다. 일본인들은 전쟁의 목적이 기본적으로 제국주의라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전쟁의 숭고함이 더이상 개인에게 발 붙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카하시씨는 당시 일본의 정세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어떠한 배경에서 반전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개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베트남의 문제가 어떻게 일본 사회에 파고들었고, 당시 베헤이렌과 자테크가 어떤 작용을 했는지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헤이렌은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미츠비시 중공업의 주식을 사서 소액주주로서 총회에 참석하기도 했고(이 주주총회는 난투극으로 번지기까지 했다. 총회꾼들과 반대자들이 베헤이렌 멤버들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배우 제인 폰다는 "베헤이렌"이 쓰인 헬멧을 쓰고 미군 부대를 돌면서 병사 개개인이 각자의 양심에 따라 행동할 것을 호소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현재까지 이어져서, 일본의 군사국가화를 반대하고 전쟁법안을 반대하는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문제는 설득

망명을 떠난 사람, 망명을 보내던 사람 험난한 시대를 넘어 평화와 인권을 위해 활약하던 노신사와 21세기의 망명자가 나란히 서서 흔적을 남겼다. 좌로부터 이예다씨, 다카하시 다케토모 선생, 필자.
▲ 망명을 떠난 사람, 망명을 보내던 사람 험난한 시대를 넘어 평화와 인권을 위해 활약하던 노신사와 21세기의 망명자가 나란히 서서 흔적을 남겼다. 좌로부터 이예다씨, 다카하시 다케토모 선생,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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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함께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다카하시씨는 정열적으로 당시의 상황과 현재를 비교하며 우리가 던진 질문들에도 많은 답변을 주셨다. 일단, 현재와 베트남전 시기의 상황은 다르다. 게다가, 한국의 징병제는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슈다. 2014년 내내 총기난사와 가혹행위가 외신보도를 타고 알려졌지만, 외국에서는 이제서야 "한국에 징병제가 있느냐", "있다면 왜 그렇게 야만적인 제도를 운영하고 있느냐"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수준이었다. 우리에게야 중요한 문제겠지만, 해외에서는 아직 생경한 제도일 뿐더러, 지금은 냉전시대만큼 국제연대가 활발한 시대도 아니다.

나는 다카하시씨께 물었다.

"아직 한국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군사주의 하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망명자가 앞으로 얼마나 더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국제사회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는 보상심리라는 기제 때문에 대부분의 예비역들은 징병제 문제를 더이상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군사정권부터 내려온 권위주의적 정부의 전통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철옹성에 대적하기 어렵게 합니다. 징병제는 비인간적인 군사주의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앞서 미군병사들을 망명시키고, 전쟁을 반대한 분이시니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지금의 활동 말고도 또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다카하시씨는 대답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설득입니다. 전쟁과 징병이 잘못되었다고 알리는 것 부터 중요합니다. 시민운동은 평화와 인권을 최후까지 주장하는게 본분 아니겠습니까. 일본도 지금 아베 정권 이후 시민운동의 실력이 테스트를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대중에게 우리의 정당성을 납득 시키고 여론의 지지를 얻어야 합니다."

다카하시씨는 과거의 전쟁은 천만단위의 희생이 있었고, 그 규모가 컸으나 현재는 전쟁 희생자의 규모가 점점 줄고 있고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도 줄고 있다며 전쟁의 실상을 상기해야 함도 강조하셨다.

긴 이야기가 끝나고, 우리는 자리를 파하고 일어섰다. 나는 마지막으로 다카하시씨에게 말했다.

"저희의 목표는 징병제 철폐입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정말 많은 인권운동가, 평화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요원합니다. 다카하시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자 나는 뜻밖의 대답을 듣게 되었다.

"뭘요, 우리는 모두 동지 아닙니까."

그는 여전히 평화와 인권을 고민하는 시민운동가였다.

에필로그 - 수 개월 뒤, 릿쿄대 방문 및 오다 마코토 추모 심포지엄

이후 몇 개월 뒤인 6월 30일, 나는 릿쿄대학에서 한국의 징병제에 관해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마침 릿쿄대에 들른 길에, 나를 초청해주신 오하라 히로유키 교수님(尾原 宏之. 43)의 도움을 얻어 "릿쿄대학 공생사회 연구센터"를 방문 할 수 있었다. 이 곳에는 60년대 당시 베헤이렌이 미군 병사들을 탈주시키던 시기의 자료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공생사회 연구센터의 직원들은 친절하게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우리는 당시 자테크의 조직원들이 남긴 기록, 베헤이렌이 발간한 유인믈등을 살펴 볼 수 있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당시 다카하시씨가 위조한 여권이었다. 이 귀한 자료를 직접 볼 수 있어 기뻤다.

한 연구원이 설명을 덧붙였다.

"당시에는 여권이 전산화 된 시대도 아니었고, 출입국 관리도 지금보다 허술했기 때문에 여권위조를 통한 출국이 가능했습니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이런 방법은 지금은 무용지물이지요."

릿쿄대학 공생사회 연구센터 이곳에 당시 미군 탈영병들이 사용했던 위조 여권들이 보존되어 있다.
▲ 릿쿄대학 공생사회 연구센터 이곳에 당시 미군 탈영병들이 사용했던 위조 여권들이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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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용했던 위조여권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해당 인물들의 사진은 모두 가렸다. 여권들 중에는 연습을 위해 여러개의 스탬프를 찍은 것들과 입국에 성공한 완성품이 섞여있었다.
▲ 당시 사용했던 위조여권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해당 인물들의 사진은 모두 가렸다. 여권들 중에는 연습을 위해 여러개의 스탬프를 찍은 것들과 입국에 성공한 완성품이 섞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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릿쿄대학 공생사회 연구센터의 여권들은 스웨덴에 도착하는데 성공한 미군 병사들이 일본 시민운동가들에게 기증한 것이다. 시대를 넘어 자유와 평화를 위해 쓰인 도구를 만나게 된 것은 정말 감격스러웠다. 자료들 중에는 자테크 조직원들이 산속에서 탈영병과 함께 생활하며 남긴 기록도 있었다. 당시에는 일본에 외국인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탈영병들은 어디서든 눈에 띄었고, 결국 산속에 움막을 짓고 생활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기록들은 공개가 금지되어서 육안으로만 확인이 가능했다.

나는 릿쿄대학에서 한국 징병제를 주제로 특별 강연을 했다. 징병제의 모순과 인권침해에 관해 강의했고, 일본 대학생들의 많은 질문을 받았다. 대부분의 질문은 "이러한 제도가 어떻게 유지 될 수 있는가"였다. 나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국가의 힘이 과도하게 강하면 개인을 희생 시키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부조리에 항변할 자유도 없어진다."라고 대답했다. 국가에 대한 시민의 감시와 비판이 항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한번 확립된 제도는 생각보다 없애기 힘들다"고 이야기 했다. 애석하게도, 한국인 유학생들은 이 강연을 단체로 보이콧 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어떠한 질문도 받을 수 없었다.

얼마 후인 7월 18일, 나는 베헤이렌의 리더였던 오다 마코토 사망 8주기 추모 심포지엄에 K씨와 함께 참가하게 되었다. 이 심포지엄에는 당시 베헤이렌 멤버였던 분들과 재일교포 화가이신 현순혜씨도 참석하셨다. 현순혜씨는 오다 마코토의 아내이시기도 한데, 나는 십여년 전 발간된 현순혜씨의 에세이 "내 조국은 세계입니다"를 감명깊게 읽었었다.

오다 마코토 사후 8주기 심포지엄의 팜플렛 점점 위협받고 있는 일본의 평화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었다.
▲ 오다 마코토 사후 8주기 심포지엄의 팜플렛 점점 위협받고 있는 일본의 평화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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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지엄의 풍경 "아베 정치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슬로건이 보인다
▲ 심포지엄의 풍경 "아베 정치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슬로건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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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다케토모씨의 발언 안보 법안과 관련해서, ‘전쟁 할 수 있는 나라'로 변화하는 일본에 관한 위기감을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다.
▲ 다카하시 다케토모씨의 발언 안보 법안과 관련해서, ‘전쟁 할 수 있는 나라'로 변화하는 일본에 관한 위기감을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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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다카하시씨를 비롯한 베헤이렌의 멤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카하시씨는 이제 한국에서도 망명 희망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가 그러한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당신들 괜찮냐"는 이야기를 먼저 하셨다. 아마도 병역을 거부하고 망명에 떠난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고, 망명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는 우리의 신변에 걱정이 앞서신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 베헤이렌이 그러하였듯) 국내법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말씀 드렸다.

이제 베헤이렌 및 자테크 멤버들에게 한국의 병역거부는 새로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듯 했다. 아마도 일본 자위대의 군대화와 일본의 군사국가화에 대한 위기감과 맞물린듯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세미나의 주제 또한 "혼자라도 한다, 혼자라도 끝낸다 - 지금이라도 양심적 군사 거부 국가를!"이었다. 일본이 국가단위로 군사를 거부해야 한다는 의미가 강하게 와닿았다. 심포지엄은 주로 오다 마코토가 생전에 활동했던 평화운동과 종군위안부 문제, 전쟁 가해자로서의 일본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

이 날은 일본의 군사국가화와 아베 수상의 '전쟁 가능한 국가'로의 정책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분명한 것은, 일본에는 전쟁을 정말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과거의 전쟁에 부채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시민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 한가지는 명백히 실감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무력을 통한 평화에 관한 개념이 강하지만, 일본은 (다소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들지 몰라도) "지금 있는 이대로 어떠한 무력간섭도 절대 하지 않는" 국가로 유지하기를 원하는 정서가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심포지엄의 주제도 국가 단위로 군사행동을 거부하자는 뜻에서 "양심적 군사 거부"라는 말이 들어가 있었다. 아마도 한국인들에게는 군사행동 없는 평화가 다소 생경 할 것이다. 그러나, 총성이 울리는 평화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이 자리에서 확인 할 수 있던 것은, 전쟁과 군사행동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일본과 한국 양쪽에 모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인들이 이러한 사람들과 더 교류를 한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평화롭고 총성이 들리지 않는 동아시아가 정착되기 위하여, 뜻이 통하는 사람들은 함께 모여야 한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평화에 대한 많은 영감을 얻었다. 한국이 일본에서 배울 수도 있고, 일본이 한국에서 배울 수도 있듯,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국제사회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평화와 인권에 대해 고민하였으면 한다.

평화의 시대는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를 위해서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는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

참고로 도쿄에서는 매해 오다 마코토 추모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고, 올해에도 어김없이 열린다고 한다. 이번 심포지엄은 전후 일본의 평화와 민주주의에 관해 논하는 자리가 될듯 하니, 관심있는 독자 여러분께서는 참여해 보시길.

일시 : 2016년 7월 2일 토요일 12:30
장소 : YMCA 아시아청소년센터 스페이스Y 문화홀
참가비 및 상세정보 : http://www.odamakoto.jp/

여담 : 다카하시씨는 정말 정정한 분이셨다. 오다 마코토 8주기 심포지엄이 끝나고, 우리는 행사장 아래층에 위치한 커피숍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눴다. 다카하시씨는 낮 3시인데도 맥주를 주문했다. 그리고 현순혜씨에게 물었다. "당신도 맥주를 드십니까?" 그러자 현순혜씨는 "저는 맥주를 마시지 않아요."라고 했다. 그러자 다카하시씨로부터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었다. "음, 낮부터 맥주를 마시지 않으면 멋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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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시스트, 징병제 반대운동가. 현재 "정새난슬과 어쿠스틱 어드벤쳐"에서 베이스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