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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하이리그 꿈의학교가 열린 오산 정보고등학교. 아이들이 축구에 열중하는 모습
 오산 하이리그 꿈의학교가 열린 오산 정보고등학교. 아이들이 축구에 열중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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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고등학교 2학년 경기 참가 우승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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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모아서 축구만 했는데 학교폭력이 사라졌다니, 허풍 아닐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지난 4일 오전 '오산 하이리그 꿈의학교(아래 하이리그 꿈의학교)'가 열린 '오산 정보고등학교'로 향했다. 마음 한편엔 '한창 팔팔한 고등학생들인데, 느려터진 나 때문에 지면 어쩌나!'하는 걱정도 얹혀 있었다. '특별회원' 자격으로 한 경기 출전이 약속돼 있어서다.

앞서 '꿈의학교가 열린'이라는 표현을 쓴 한 이유는 이 학교가 특정한 장소에 있는 게 아니라, 축구 경기가 열리는 곳이 곧 '학교'가 되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상인들이 모여 보따리를 펼치는 곳이 곧 시장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이리그 꿈의학교'는 경기도 교육청이 선정한 꿈의학교 가운데 가장 특이한 짜임새를 가지고 있다. 구조만 놓고 보면 학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인데, 가장 큰 이유는 가르치는 사람(교사)과 배우는 사람(학생)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학교라는 꼬리표가 붙었으니 축구 규칙이나 기본기 정도는 가르치겠지!'하고 넘겨짚으면 정말 오산이다. 진짜 아무 것도 안 가르친다. 축구팀이 모여 경기를 하는 '리그(league)'일 뿐이다. '무엇인가는 가르칠 거야!'하는 선입견에 '하이리그를 거쳐 축구 선수가 된 아이가 있느냐?'고 물었다가 김규정 교장한테 핀잔 섞인 말만 들었다.

"없어요. 여긴 축구 교실이 아니거든요. 축구 선수가 될 아이는 여기 오면 안 됩니다. 여기는 순수 아마추어 리그입니다. 축구 선수는 받아 주지도 않아요. 연습해라, 잘 차라 이런 말은 아예 하지도 않고, (축구를) 못한다고 타박하지도 않아요. 근데, 우승 깃발은 연습하는 아이들이 가져갑니다."

그런데 어째서 굳이 학교라고, 그것도 아이들 꿈을 아이들이 스스로 찾게 하는 게 중요한 '꿈의학교'라는 이름을 붙인 것일까? 이 궁금증은 김 교장과 이야기를 하면서 저절로 풀렸다.

오산 하이리그, 꿈의학교 하기 전에 이미 꿈의학교

오산 하이리그 꿈의학교 학생 운영위원들과 김규정 교장(왼쪽 위 두번째), 김경관 경기도 교육청 꿈의학교 담당 장학관(오른쪽 위 첫번째). 이 학교에는 총 30여 명의 운영위원이 있다. 학생 운영원 10 여명, 학부모 운영위원 10여명, 선배 운영위원 10여 명.
 오산 하이리그 꿈의학교 학생 운영위원들과 김규정 교장(왼쪽 위 두번째), 김경관 경기도 교육청 꿈의학교 담당 장학관(오른쪽 위 첫번째). 이 학교에는 총 30여 명의 운영위원이 있다. 학생 운영원 10 여명, 학부모 운영위원 10여명, 선배 운영위원 10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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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장 직업은 축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목사'다. 그것도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목사다. 이런 그가 하이리그를 운영하게 된 배경에는 중독이라 의심될 정도로 게임에 빠져 청소년기를 보내던 그의 아들이 있다.

"청소년 문제도 유행이 있는데, 그때(2008년)는 게임 중독이 학교 폭력만큼이나 심각했어요. 제 아들 녀석이 친구들과 떼를 지어서 거의 기숙을 하다시피 피시방을 전전했어요. 아~ 정말 두고 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느 날인가 심하게 나무랐더니 '그럼 어디에 가서 놀아야 하느냐?'고 묻는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었어요.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풀 장소가 마땅치 않은 게 사실이잖아요. 그래서 물었죠. '무엇을 하고 싶냐'고. 그랬더니 축구 대회를 열어 달라고."

이렇게 해서 시작한 게 하이리그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놀 수 있는 판을 어른인 김 목사가 나서서 깔아주었던 것.

"그래서 아들 녀석한테 한 10팀 정도를 직접 만들어 오라고 했어요. 한두 팀 가지고 리그를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랬더니 진짜 10팀을 만들어왔어요. 자기들끼리 의논해서 리그 이름도 정하고, 정관도 만들고... 그 애들이 하이리그 1기입니다. 지금 직장 다니는 애들도 있고 대학 다니는 애들도 있어요. 몇 명은 여기서 후배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고 있고요. 물론 아들 녀석은 게임 중독에서 벗어났고요."

이렇게 시작된 하이리그 역사가 올해로 9년차에 접어 들었다. 명성을 얻으면서 참가하는 팀이 늘었고, 거쳐 간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자원봉사자도 늘었다. 학부모 관심도 높아져 직접 아이 손목을 잡고 오는 이도 생겼다. 이들이 하이리그를 매개로 한 '공동체'를 이루기도 했다. 작년부터 경기도 교육청이 진행하는 '꿈의학교'라는 날개를 달면서 공신력도 향상됐다.

학교가 아닌 리그가 '꿈의학교'에 선정된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꿈의학교가 추구하는 '학생 스스로' 정신과 한 아이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철학 등을 이미 실현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마을이 나서서 아이를 키운다는 마을교육공동체 정신과 마을이 키운 아이를 다시 마을의 주체로 세운다는 목표까지 달성했으니, 꿈의학교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축구시합 하다 아이가 다치자 '유괴범'으로 고소하기도

4일. 고등학교 1학년 경기 우승팀. 갑작스레 한 팀이 된 기자와 김경관 장학관을 친절하게 맞아준 아이들.
 4일. 고등학교 1학년 경기 우승팀. 갑작스레 한 팀이 된 기자와 김경관 장학관을 친절하게 맞아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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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폭력'이 사라진 것은 따지고 보면 '서비스'였다. 일부러 없애려고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저절로 사라졌다는 의미다. 김 교장은 "의도한 것은 아닌데, 아이들끼리 즐겁게 놀다 보니까 저절로 사라졌다. 축구시합을 하면서 서로 친해지다 보니 싸울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축구를 잘하기보다는 즐겁게 축구하기'를 강조하는 하이리그 꿈의학교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결정적 역할을 했으리라 예상됐다. 지나친 경쟁이 없으니 축구를 잘하는 아이가 못하는 아이를 타박할 이유도, 못하는 아이가 주눅이 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축구장에는 서로 즐기는 분위기가 흘렀다. 헛발질했다고 손가락질하는 아이도 없었고, 상대편에게 어이없게 볼을 빼앗겼다고 타박하는 아이도 없었다. 실수하면 서로 손을 들어 "파이팅!"을 외치거나 '괜찮아'라는 마음이 담긴 가벼운 박수를 보낼 뿐이었다.

아이들은 갑작스레 한 팀이 된 아버지뻘 되는 기자와 장학관(김경관 경기도 교육청 꿈의학교 담당)에게도 무척 친절했다. 실력이 못 미더워 패스를 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패스해 주었다. 바지런하게 움직여, 느려터진 선수인 나 때문에 생긴 공격과 수비의 허점을 보완하기도 했다. 덕분에 승리의 기쁨을 맛봤다.

그렇다고 경기가 설렁설렁하지는 않았다. 볼을 향해 달려드는 기세가 프로 선수 못지않게 맹렬했다. 경기가 과열되자 선수끼리 서로 부딪쳐 잠시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다쳤는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선수도 있었는데, 이것이 김 교장이 가장 겁내는 일이었다.

기자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김 교장, 한 선수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자 갑자기 얼굴이 굳어지며 운동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다치면 정말 힘들어요. 학부모들 항의 때문이죠. 한 학부모는 못된 목사가 아이를 꼬드겨서 축구를 시켜 병신 만들어 놓았다며 '유괴범'으로 고소하기도 했어요. 그로 인해 아이 장래에 엄청난 지장을 초래했으니 보상해 달라는 거죠. 그리 큰 부상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판사가 그 학부모한테 지금 아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는 집에 있다고 하자, 픽 웃으며 이런 것 가지고 고소하는 거 아니라고..."

어른들만 하는 줄 알았던 운영위원 하니 어깨가 으쓱

오산 하이리그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구급차. 김규정 교장이 가장 겁내는 일이 선수들의 부상이다. 한 학생이 부상당해 학부모 한테 고소 당하는 일을 겪기도 했다고.
 오산 하이리그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구급차. 김규정 교장이 가장 겁내는 일이 선수들의 부상이다. 한 학생이 부상당해 학부모 한테 고소 당하는 일을 겪기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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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리그 꿈의학교가 아이들에게 끼친 영향은 이곳을 거쳐간 이와 현재 참여하고 있는 아이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함께 공을 차고, 목욕탕 가고, 밥을 먹으면서 친해졌어요. 그 친구들 지금도 가끔 만납니다. 이곳에서 교우 관계를 넓힌 거죠. 스트레스를 확실하게 풀어서 그런지 집중력도 높아져 공부하는 데도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오산에서 축구시합을 하는 사람들은 하이리그를 거의 다 알아요. 이게 하나의 문화죠."
- 서평기 (대학생, 심판으로 자원봉사, 하이리그 5기 2011년~2013년)

"축구를 할 때는 마음이 좀 편해져요. 집중해야 하니까. 이곳에서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요. 앞으로도 축구를 더 열심히 할 생각이에요."
- 학교 폭력으로 퇴학 위기에 몰린 한 고등학생

"우리끼리 축구 시합을 할 때는 뒤끝이 좋지 않았다. 경쟁심이 강해 싸우기도 했다. 하이리그는 달랐다. 원칙을 정하고 원칙을 지키며 그 원칙에 승복하는 경기를 했다. 우리는 서로 화합하고 하나가 되었다."
- 한 고등학생이 직접 쓴 수기

"아침 7시에 나왔는데 어렵지 않아요. 어른들만 하는 줄 알았던 운영위원을 하니 좀 으쓱한 기분도 들고, 친구들과 함께하니까 재미도 있고요. 물품 입·출고 같은, 경기에 필요한 사무를 보고 있어요."
-학생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는 한 여학생

김 교장과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 '잘하기보다는 즐겁게 하기'를 강조하는 그런 학교가 있었다면, 내 학창시절이 무척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다.


태그:#오산 하이리그 꿈의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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