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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까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근대문화유산은 600건이 넘습니다. 근대건축 문화재의 경우, 역사적인 형태를 살리면서 공공건물로 리모델링하는 사례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발논리에 밀려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질 근대 건축은 훨씬 많습니다. 한번쯤 그 시대의 건축가들을 되돌아보고 싶었습니다. 일그러진 근대의 일그러진 건축가들을 말입니다. 잊혀진 건축가들을 통해 그 시대의 또 다른 이야기를 알게 되면, 개발에 대한 관점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보존 방식도 좀 더 다양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 봅니다. -기자말

3.1운동에 가담한 대가,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옥고

1933년 동아일보에 실린 보성전문학교 본관 스케치와 고딕양식에 대한 기사
 1933년 동아일보에 실린 보성전문학교 본관 스케치와 고딕양식에 대한 기사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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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27일 오후 5시 33분]

"벤딩 모우멘트(Bending Moment)?"

"벤딩 모우멘트(Bending Moment)!"

"시메트리(Symmerty)?"
"시메트리(Symmerty)!"

그 낱말들은 설렘이고 동경이었다. 경성공업전문학교(아래 경성공전) 건축과 수업시간에 난생 처음 들어본 서양 용어들. 어찌나 새롭고 인상적인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고 혀끝에 착 달라붙었다. 교정을 오고가는 학생들마다 낯선 낱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웃으면서 장난처럼 했지만, 박동진에게 그것은 신학문에 대한 설렘이고 신세계에 대한 동경이었다.

1919년 3월 1일, 마지막 학년을 남겨둔 박동진은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는 독립만세를 부르고 가두행진을 하며 선동을 했다.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민족교육으로 유명한 오산학교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은 오산학교 교장을 지냈었다.

그가 3·1운동에 가담한 대가는 컸다.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2년 집행유예를 받았다. 경성공전에서도 퇴학을 당했다. 고향의 상황도 심각했다.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은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으로 투옥되었다. 일제는 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오산학교를 불태워버렸다.  

출옥 후 막막한 시간을 보내던 그는 그해 가을 만주로 떠났다.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동지들과 1년 반을 보냈다. 훗날 그는 그 시기를 "방랑의 길"이라고 표현했다. 다른 어느 곳도 아닌 항일독립운동의 기지였던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그는 무엇을 보고 느꼈기에 그저 '방랑'이라고 했을까? 

결국 그는 "이렇게 가다가는 아무것도 안될 것"같아서, "젊었을 적에 무엇이나 배워"야겠다며 귀국을 했다(박동진, 나의 학창시절...그 후, <대한건축학회지>, 1975). 아마도 만주는 그에게 이상의 땅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곳에서 그의 불꽃은 잦아들었고, 그가 선택한 것은 현실이었다.

귀국 후 박동진은 생활에 충실했다. 그는 함흥에서 고등보통학교의 수학선생이 되었다. 가족을 돌보고 자식도 얻었다. 그렇게 평범한 시간을 보낸 후, 그는 경성고등공업학교(아래 경성고공)에 재입학을 요청했다. 경성고공은 경성공전이 1922년 조선교육령으로 개편된 학교였다. 경성고공은 허가를 했다.

'재래주택 개량론' 박길룡 vs. '재래주택 개혁론' 박동진

박동진이 설계한 조선일보사옥(1935) 사진과 1층 도면
 박동진이 설계한 조선일보사옥(1935) 사진과 1층 도면
ⓒ 대한건축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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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그가 경성공전에 입학한 지 9년째 되던 해에, 드디어 27세 나이로 경성고공 건축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그는 여느 조선인 학생처럼 학교 주선으로 조선총독부 건축조직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그의 건축 인생은 더 이상 주춤거리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박길룡이 그랬듯이, 그도 신문이나 잡지에 건축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박길룡이 그랬듯이, 그도 낮에는 총독부에서 일하고 밤에는 조선인 건축가가 의뢰한 설계를 했다. 하지만 그의 글과 건축은 박길룡과 달랐다.

박길룡이 '재래주택 개량론'을 주장할 때 박동진은 '재래주택 개혁론'을 주장했다. 박길룡이 '건축가 입장에서 온돌만은 절대 유지합시다'를 말했을 때 박동진은 '온돌폐지론'을 말했다. 박길룡은 절충적이고 타협적이었다. 박동진은 급진적이고 비타협적이었다.

'외관미의 빈약함! 변화의 결여! 어느 점엔들 애착을 느끼게 하는 데가 있는가? 국민성의 무기력한 표현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중략)…이용가치에 있어서는 너무도 비현실적이오. 건축 그 자신으로부터 생명이 끊어진지가 오래되었다…

건축재료에 있어서는 그 또한 너무도 원시적이니 단일한 목재, 점토, 무세공의 석재와…어느 모퉁이나 규격에 통일의 미는 물론 맛볼 수 없다. 원시경제시대 봉건시대에 안출된 이 평면계획이 금일까지 아직 몰해(歿骸)를 거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이상스러워서 못 견디겠다.

금일에 있어서 모든 사물을 과학적으로 보다 더 합리하게, 보다 유기적으로 처리하는 시대에 이 비능률적인 평면을 오인(吾人)의 생활은 거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필자는 우리 생활에서 온돌폐지론자이다…

국민성의 무기력, 비능률적인 생활이 모두 이 좌식생활에서 오는 온돌과 관련이 있다. 산야가 황폐하게 된 것도 이 온돌의 죄다.' (박동진, 조선주택개혁론, <춘추>, 1941)

물론 박동진은 단서를 붙였다. 외래 건축을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 되고, 조선의 풍속과 풍토에 적합해야 한다고. 온돌 폐지가 당장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개량을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론 없이 부록처럼 곁들인 부언에 그쳤다. 사실 온돌의 경우, 그 무렵은 일본인 민간업자들이 개량온돌을 만들어 일본인 주택에 공급을 하고 있었다.

박길룡과 박동진이 좋아했던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1867-1959)도 온돌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일본의 제국호텔 욕실과 미국의 주택에 온돌을 설치했었다. 그런데도 박동진은 온돌을 국민성의 무기력과 비능률적인 생활의 상징으로 몰아댔다.  

박동진의 개혁론과 폐지론에 깔린 논리를 보면 어딘가 '오리엔탈리즘'을 닮았다. '오리엔탈리즘'은 제국주의 시대에 서양이 동양을 보는 방식, 서양과 동양에 대한 이분법적인 이미지였다. 합리성, 자유, 진보, 문명, 역동성, 승리는 서양의 이미지로, 비합리, 예속, 후진성, 야만, 무기력, 패배는 동양의 이미지로 재현되었다.

오리엔탈리즘은 우월한 서양이 열등한 동양을 계몽하기 위하여 식민 지배를 한다는 식민주의를 정당화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아시아의 서양'을 자처하며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우월한 일본이 열등한 조선을 문명화하기 위해 식민 지배를 한다고, 그것이 문명국 일본이 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라고.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 엘리트, 특히 일찍이 서양문물을 접했거나 신학문을 배우고 실력양성론이나 사회개조론을 추종했던 사람들의 내면에 오리엔탈리즘의 서양 중심주의가 있었다.

박동진은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고 기독교계 민족학교인 오산학교를 다녔다. 3·1운동에 가담한 후에는 방랑과 갈등의 시간을 보내며 적나라한 현실도 목격했다.

그런 박동진이라면, 그의 말대로 "전통과 인습에 얽매인 건축에 반항"(박동진, 우리 주택에 대하여-3, 동아일보, 1931)했던 모더니즘 건축에 열광하지 않았을까. 바쁘게 따라잡아야 할 근대화에 개량이 아닌 개혁과 폐지로 속전속결을 이루고 싶은 조바심이 생기지 않았을까.   

당연히 그가 설계한 건축도 모더니즘의 특성이 펄펄 살아있을 것 같다. 그런데 박동진의 대표작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본관(1934)과 도서관(1937)이다. 고딕양식의 석조건축이다.

건축 양식과 재료 모두 전근대적인 것이다. 그럼 박동진의 글은 모더니즘 건축을 '지향'하고 그의 설계는 모더니즘 건축을 '지양'한 것일까.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김성수-박동진 의기 투합, 민족학교 보성전문 근대 공법 시공

1950년대 박동진이 설계한 고려대학교 외인교수사택(왼쪽 위), 여학생회관(오른쪽 위), 과학관(왼쪽 아래), 이공대학 본관(오른쪽 아래)
 1950년대 박동진이 설계한 고려대학교 외인교수사택(왼쪽 위), 여학생회관(오른쪽 위), 과학관(왼쪽 아래), 이공대학 본관(오른쪽 아래)
ⓒ 고대교우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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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진과 보성전문학교 건축주 김성수(1891~1955)는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당시 40대 초반의 김성수는 경영난에 빠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상태였다. 그는 새로운 터전에 새로운 교사를 지어 조선 최고의 민족사학을 키우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30대 중반의 박동진은 몇 안 되던 조선인 건축가였고, 무엇보다 오산학교 출신에 3·1운동 전력이 있었다.

젊은 건축가와 건축주는 의기투합했다. 두 사람은 지금의 안암동에 학교 터를 물색했고, 내친김에 김성수는 자택 2층에 설계실을 차렸다. 그곳에서 박동진은 숙식을 해가며 김성수와 함께 보성전문 본관 설계에 매달렸다.  

그들은 건축 재료부터 정했다. 민족학교이니만큼 강인하고 영구적인 외관을 원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화강석이었다. 화강석은 박동진이 비판해온 전통건축의 원시적이고 내구성이 약한 재료가 아니었다. 화강석은 조선에서 풍부하게 산출되니 박동진이 주장했던 풍토성과도 맞아떨어졌다.

그 다음에 화강석과 어울릴만한 건물 형태를 찾았다. 참고자료는 김성수가 미국과 유럽 순방길에 찍어온 유명 대학들의 사진이었는데 고딕양식이 많았다. 대학의 시작은 중세였고 중세는 고딕 건축의 시대였으니 그럴 만했다.

이미 1920년대에 준공된 연희전문학교의 소박한 석조 고딕 건물들도 참고가 되었다. 고딕양식은 총독부 소속 건축가 박동진에게 또 다른 의미도 있었다. 일제가 조선에 세운 관청 대부분은 고딕이 아닌 르네상스 절충식이었다. 

주목할 점은 박동진이 고딕 양식을 고딕 공법이 아닌 근대적인 공법으로 시공했다는 것이다. 그는 철근콘크리트와 무근콘크리트를 구조로 하고 화강석을 외장재로 사용했다. 화강석을 쌓는 방식도 특이했다.

서양건축에서 볼 수 없는 것으로, 전통 완자창의 문양을 응용하여 이른바 '완자쌓기'를 만들어 냈다. 박동진의 '완자쌓기'는 1980년대 대형 사무소 건물이 시공되기 전까지 널리 사용되었다(안창모, <건축가 박동진에 관한 연구>, 1997). 

다시, 박동진의 고딕 석조건축은 전근대적인 양식과 재료인가?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이면의 의미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일제가 조선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고딕양식, 철근콘크리트라는 근대적인 건축기술, '완자쌓기'라는 전통 요소, 화강석이라는 지역성이 결합된 것이다.

표피는 서양의 전근대, 뼈대는 서양의 근대와 조선의 전통, 재료는 조선의 것이 한데 엉켜 있다. 마치 제국과 식민지, 서양과 조선, 근대와 전통에 대한 그 시대 건축가의 혼종적인 내면세계를 보는 듯하다.    

보성전문학교 본관은 박동진에게 대단한 기회가 되었다. 남들이 하지 않던 석조 고딕건축은 박동진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남들과 달리 그에게는 학교건축이라는 주종목도 생겼다.

평북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 본관, 대강당과 과학관. 경성의 중앙고등보통학교 본관과 대강당,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 본관, 과학관과 기숙사. 평양의 평안공업학교 본관과 대강당. 모두 해방 전까지 그가 설계한 학교건축이다. 그중 대부분은 총독부에서 근무하면서 부업으로 했다.

1940년 박동진은 총독부를 그만두고 '태평건물주식회사'라는 건설 회사를 설립했다(박동진이 총독부를 그만둔 시기는 1938년으로 알려졌으나 1997년 안창모의 논문에서 여러 자료를 근거로 1940년으로 정정되었다).

총독부에서 독립을 했지만 그의 활동은 오히려 점점 침체되었다. 전시체제로 큰 프로젝트는 없고 몇 개의 석조주택과 병원 설계 정도만 했다.

드디어 해방이 되었을 때, 그는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으로 감격했다(박동진, 1975). 하지만 곧 불어 닥친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그는 고향에 사둔 땅과 북한에 있던 설계 기반을 모두 잃고 말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히든카드가 있었다. 바로 김성수였다. 격동의 시대에 건축주 김성수는 박동진에게 안정적인 후원자였다. 그는 해방 후 종합대학이 된 고려대학교의 건물들을 설계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고려대학교 서관(1955년 1차 완공, 1961년 2차 완공), 외인교수 사택(1956, 철거), 농과대학(1956, 현 사범대학), 신관(1957, 현 대강당), 학생식당(1956), 여학생회관(1958, 철거), 과학관(1960, 철거), 박물관(1962), 이공대학 본관(1964, 현 제2공학관)이 그의 작품이다.

이 건물들은 박동진의 건축이 석조 고딕에서 모더니즘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실 박동진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일보 사옥(1935)에서 모더니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장방형의 단순한 입면과 비대칭적인 평면에 그쳤을 뿐이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그가 설계한 고려대학교 건물에는 본격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1950년대 초반에서 후반으로 갈수록 고딕 요소가 줄어들었다. 석조에 콘크리트가 결합되면서 무거운 느낌도 약해졌다. 형태는 합리적이고 개방적으로 구성되었다.

1960년대에 이르면 석조 고딕에서 완전히 벗어나 철근콘크리트의 구조미를 드러내었다. 규칙적이고 간결한 디자인에 분할된 입면, 장식 없는 매끈한 벽면과 평지붕은 모더니즘의 국제주의 양식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변화 뒤에는 한국전쟁 후 불어온 미국건축의 영향이 있었다.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본관 설계를 마친 60년대 초, 박동진은 1년간 미국과 유럽 여행을 했다. 청년기에 "벤딩 모우멘트? 시메트리!" 하며 동경했던 곳에서, 장년기에 흠모했던 모더니즘 건축가들의 작품을, 그는 60대가 되어 직접 보았다.

그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귀국 후 그는 은퇴를 했고, 1980년 아들들이 사는 미국에서 81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미국으로 떠나기 몇 년 전 그가 남긴 글의 마지막은 이랬다. 

'우리는 우리의 전통이나 우리 고유의 문화에 대한 애착심이 부족한 것 같다. 우리 건축가들은 솔선해서 이런 방면에 앞장서서 애호운동을 벌려봄이 어떠할까.' (박동진, 나의 학창시절...그 후, <대한건축학회지>, 1975).  

오래전 한때, 그는 전통건축을 국민성의 무기력한 표현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그때,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아무리 일본기관에서 밥을 벌어먹지만 나는 결코 민족의식에 배치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박동진, GRANITE의 변(辯), <고대신문>, 1955)

머리와 가슴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역설, 그것은 어느 조선인 건축가의 식민지 현실에 대한 울분이었고, 자신을 포함한 민족에 대한 애증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솔직히, 그를 보는 내 마음은 씁쓸하다. 비록 그의 건축인생이 초반에는 굴곡졌지만, 그 시대 어느 건축가가 그만큼 안정적인 조건과 인맥을 가지고 설계를 할 수 있었을까. 비록 분단으로 잃긴 했지만 해방 전 그가 고향에 사둔 땅은 수백 평도 아닌 수만 평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어느 조선인 건축가가 설계로 그만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을까.

흙수저 박길룡은 오히려 물욕이 없었고 술과 사람을 좋아했다. 훗날 후배 건축가들은 박길룡과의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그를 추억했다. 박동진에게는 동료나 후배들이 들려주는 그런 에피소드가 별로 없다. 3·1운동 경력도 그가 건축가가 된 후에는 그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였지, 인생의 발목을 붙잡는 질곡은 아니었다. 박동진처럼 3·1운동에 가담한 박인준과 강윤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문득 이런 단어가 떠오른다. 노란 피부, 하얀 가면.


태그:#박동진, #근대건축가, #경성고공, #보성전문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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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좋다. 길이 없지만,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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