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다큐프라임 <공부의 배신>

▲ EBS 다큐프라임<공부의 배신> 에듀푸어 300만 시대에 과연 공부란 무엇인가. ⓒ EBS


며칠 전 중학교에 다니는 둘째 아들 녀석이 물었다.

"엄마, 우리는 금수저야, 흙수저야?"

아이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애써 억지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시골 내려와 푹신푹신한 흙 밟고 사는 흙수저." 아이가 몰라서 물어본 것은 아닐 게다. 그런데도 아이는 전혀 놀랍다거나 실망스러워하지 않았다.

EBS 다큐프라임 3부작 <공부의 배신>이 담아내는 사회적 모순 역시 특별하지는 않다. 대한민국에서 공부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아이의 성적이 달라진다는 통계는 몇 번 우려먹은 사골 곰국마냥 식상했다. 대학생들끼리 '수시냐 정시냐'를 따진다는 풍문은 학부모들 사이에서 흔히 오가는 대학가의 뒷이야기였다.

그러나 <공부의 배신>이 쫓아가는 서사의 초점은 빤한 통계자료나 만연하게 퍼진 대학가 풍문에만 맞춰져 있지 않았다. 이 다큐의 본질은 '흙수저' 아이들의 험난한 성장기였다. 자기가 태어난 토양을 어떻게든 바꿔보려는 '남다른 개척정신'을 가진 아이들의 고군분투기였다. 다큐를 보는 내내 불규칙적인 한숨 소리가 배경음악인 양 이어졌다. 모르지 않았지만, 그 현장을 들여다본 소감은 참담했다.

노력으로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벽 앞에 섰을 때

 EBS 다큐프라임 <공부의 배신>

쓸 힘이 없으면 손가락에 고무줄을 묶고 공부하는 예원이는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 EBS


제1편 <명문대는 누가 가는가?>는 지방 소도시에 사는 중학생과 고등학생의 입시 이야기다. 세상의 출발선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사는 곳이 지방이라면 그 벌어진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은 필사적이다. 자사고(자립형 사립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는 중3 예원이의 장래 희망은 의사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노력파이지만, 대도시 아이들의 실력에 견줘보면 어떨지 늘 불안스럽다.

예원이는 굳은살과 허물이 잡히도록 손에서 펜을 놓지 못한다. 쓸 힘마저 없으면, 손가락과 볼펜을 고무줄로 묶고 공부한다. 하루 서너 시간의 쪽잠에 쫓기면서 하루 일과표를 체크하지만, 꿈에 대한 자신감은 좀처럼 안정권으로 진입하기 어렵다. 빈 노트에 적어내려간 예원이의 짧은 몇 문장이 그 불안한 속내를 말해준다.

"나는 절박했다. 나쁜 생각인 줄 알면서도 내 집안 형편이 자꾸 미워졌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만 만족할 줄 아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하는 현실을 증오했다. 그래서 더욱 죽도록 공부했다."

시험의 난이도와 별개로 일정한 성적을 유지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런 학생들을 '천상계'라고 칭한다. 그다음에는 '중간계', 가장 낮은 단계로는 '지하', '심해' 라고 불린다. 어떤 노력으로도 좁혀지지 않는 '절대적 실력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특목고(특수 목적 고등학교)에 다니는 민기는 이 현상에 대해 뼈저리게 실감한다. 고등학교 과정을 선행한 대도시 아이들과는 도저히 경쟁이 되지 않는다. 채 스무 살도 안 된 민기 앞에, 노력으로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세상의 '경사진 계단'이 놓여 있다.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나와도 나와 너는 다르다

 EBS 다큐프라임 <공부의 배신>

같은 서울대학교 '과잠(학과 잠바)'이 아니다. '고잠(고등학교 잠바)'다. 보통 학과를 쓰는 아랫부분에 선명하게 표기된 고등학교 이름. ⓒ EBS


제2편 <나는 왜 너를 미워하는가>는 학교 내에서 입시 문제에 따라 묘한 적대감과 편 가르기를 보여주는 사례들로 이어진다. 서울의 한 공립 고등학교에서 50대 남자 교사가 여학생과 여교사를 성추행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 교사는 진학 상담에 꽤 유능한 교사다. 이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난 건 한 여학생의 신고 때문이다. 그 교사가 학교를 그만두자, 입시를 코앞에 둔 주변 학생들의 불만이 쏟아진다.

"네가 꾹 참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수시 떨어지면 네가 책임져라." 대학 입시 앞에서는 옮고 그름의 도덕적 가치판단마저도 제 빛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입시 경쟁 앞에서는 분노의 대상이 뒤바뀌는 이상한 착시현상도 일어나는가 보다. 상처를 입은 친구에 대한 위로보다 당장 자기에게 닥칠 피해가 걱정이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출신 고등학교와 대학입시 전형이 공공연한 관심사다. 대학에 입학한 고등학교군은 특목고, 자사고, 일반고로 나뉜다. 2000가지가 넘는 대학입시 전형은 크게 정시와 수시로 나눈다. 다시 수시는 논술 전형, 사회적 배려자 전형, 기회균등 전형 등등 그 경우가 다양하다. 갑 중의 갑은 특목고 출신의 정시 전형자이고, 을 중의 을은 일반고 출신의 수시 전형자다.

사배자충, 지균충, 기균충. 그것은 수시로 대학입시를 치룬 일반고 학생들을 일컫는 단어다.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다녀도 결코 같지 않다는 특권의식은 서열화를 부추긴다. 같은 고등학교 출신자들끼리 학습 스터디를 만들고, 시험 족보를 나눠 가진다. 취업정보망을 공유하고, 인터넷 카페를 개설한다. 철저한 계급 사회 문화를 닮아가는 이 시대 청춘들의 목표는 오직 타인과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왜 이런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일까. 인터뷰하는 학생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좋지 않음을 자신도 인정한다. 특목고를 졸업하고 정시로 대학에 입문한 한 학생의 솔직한 인터뷰가 정확한 답이 될 것 같다.

"솔직히 약간 배 아프다는 감정이 들어요. 원래 자기가 한 건 과대평가하고 남들이 하는 건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잖아요."

친구를 벌레 보듯 혐오할 수밖에 없는 기이한 감정의 출발지점이 정녕 억울한 심리에서 기인하는가.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한 학생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혐오감의 실체로 변질될 수 있는 것인가. 이 현상에 대해 어떤 학생은 이미 교육 과정에서부터 세뇌를 받은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차별화된 인식과 서열화가 없으면 열심히 공부한 것에 대해 어떻게 보상을 받겠냐는 것이다. 대학 캠퍼스에서는 오직 타인보다 높게 날고 싶은 욕망만이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진짜 열심히 살면 될 줄 알았는데'

 EBS 다큐프라임 <공부의 배신>

초등학교 학생들은 냉혹한 현실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 EBS


제3편 <꿈의 자격>은 자신의 꿈을 위해 달려가는 흙수저 학생들의 이야기다. 4년 대졸자 1인당 평균 부채는 1589만 원. 부연 설명을 하자면, 대학 등록금은 아파트보다 가파른 상승세를 보여줬다. 등록금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가계소득이 대략 사오백 남짓은 되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통계 자료에 따르면, 경제 인구 중 상위 15%의 1인당 평균 소득이 삼백만 원 대 정도다. 맞벌이와 외벌이 가정을 두루 종합해보면, 안정적으로 등록금을 지원해주는 가정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자신의 꿈을 키운다는 것은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듯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굶어 죽기 딱 좋은 사회학자나, 되기 전까진 백수나 다름없는 방송국 PD가 꿈인 대학생들. 그들이 오늘 하루의 초라한 밥상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지금의 배고픔과 초라함은 미래의 꿈을 키우기 위한 훌륭한 양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견디는 것이 포기보다 좋은 삶의 양식일 수 없지만, 미래의 꿈 앞에서라면 백 퍼센트다.

방세 내고 공과금 제외하면 최저 임금 수준의 알바로 꿈을 이어가기란 실로 벅차다. 꿈을 꾸기 위해서도 자격이 필요한 것일까? 일주일에 두세 개의 알바는 기본이고 한 끼 식사가 빵 부스러기나 김밥 한 줄일지라도, 여전히 꿈을 꾸는 청춘의 자화상. 그 밑바탕에 깔린 암울한 시대의 채색이 꿈의 조각들을 곧 덮쳐버릴 것만 같다. 서울 자취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한 청년의 창백한 얼굴 속에 담긴 꿈의 그림자가 안타깝기만 하다. 그 청년의 쓸쓸한 독백이 오랫동안 가슴을 울린다. '진짜 열심히 살면 알아서 될 줄 알았는데….'

공부의 배신, 시대의 배신

왜 이렇게 세상이 각박해졌을까. 소싯적 우리에게 공부란 어떤 의미였나. 공부는 곧 희망이었다. 공부의 성패는 오직 노력 여하에 달려 있었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 노력을 앞지르는 다른 무엇은 상상할 수 없었다. 공부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의 기반을 다져주는 평등한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가 '평등한 기회'라는 최초의 선의를 잃어버린 채 다른 방향으로 선회한 것은 오래전부터였다. 공부는 누구에게나 평등하지 않았다. 세상의 다른 출발선을 보여주는 일상적인 도구로 전락해버린 셈이다. 공부하면 할수록 불안해지는 이상한 난기류가 남들이 하나 하면 둘 이상은 해야 하는 경쟁 심리를 부추겼다.

경제 사회의 '투자와 브랜드'의 가치 실현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다름 아닌 학교였다. 부모의 재력에 따라 교육의 질이 달라지고, 학교의 이름값이 결정됐다. 지성과 낭만의 대명사인 대학은 21세기형 신종 공부 바이러스로 그 오염도가 심각하다. 대학은 더 이상 지성을 키우는 순수한 학문의 터전이 되지 못했다. 안정적인 직업 등용문으로 나아가는 '간편한 열쇠'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시대의 공부란 무엇인가. 시대의 적절한 요구에 부합되는 '브레인'만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욕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 우리 학교의 실상이다. 꽃다운 아이들의 가슴에 '노력에 대한 비관론'을 만연케 하고, 아름다운 청춘들의 눈빛에 서로를 미워하는 '증오심'을 불타오르게 하며, 꿈과 이상 앞에서도 '경제적인 잣대'를 드리우는 이 통탄할 만한 현실.

이 다큐는 묻는다. 공부가 이 시대를 배신한 것인가. 아니면 이 시대가 공부를 배신한 것인가. 학교의 총체적 난국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는 다만 흙수저 학생의 관점일 뿐이라는 비겁한 변명은 하지 말자. 금수저 학생들 역시 불안해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이 시대의 공부가, 이 시대의 학교가 저런 양상이라면, 우리에게 어떤 희망이 있는지 묻고 싶다. 노력 앞에 재력이 선행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폄하되며, 꿈을 위해서도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다면, 이 시대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다시 묻는다. 공부가 이 시대를 배신한 것인가, 아니면 이 시대가 공부를 배신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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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배신 명문대는 누가 가는가 나는 왜 너를 미워 하는가 꿈의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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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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