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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치르고 나에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유가 찾아왔다. 정말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계획'이라는게 마치 없는 단어인 것 같은, 그런 나날이 계속되었다. 모든 친구들이 다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기에 놀면서도 묘한 분위기였지만 다들 자유라는 것을 오랜만에 재회했기에 그냥 무조건 만나고, 놀기를 반복했다.

새로운 것을 먹으러 가보기도 하고, 놀러 가기도 하고, 앉을 수 있는 곳이 있기만 하면 앉아서 마냥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새롭게 시작해보겠다고 헬스장 가서 열심히 운동도 해보았다.

그리고 첫 알바를 했다. 영어 학원과 입시학원을 홍보하는 일이었다. 쉽게 말해서 전단지 돌리는 일이었다. 첫 알바치고 너무 힘든 일이라 많이 걱정을 했지만 나름 견딜만했고 한 달이 훅 지나가고 일을 다 끝냈을 땐 새로운 성취감을 느꼈다. 큰 돈은 아니지만 돈을 두둑이 쌓고 노는 것은 새로웠다.

하지만 그렇게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쓰면 쓸수록 욕심만 커지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친구들이랑 놀 만큼 놀았고, 먹을 만큼 먹었다(결국 헬스가 무의미해질 정도로 살이 찔 대로 쪘다).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어서 나름 책을 읽어보려고 시도도 해봤지만, 몇 달 글자를 안 봤다고 눈에 쉽게 들어오진 않았다(뭐, 예전에도 글자가 그리 눈에 잘 들어오진 않았지만).

게임도 해보겠다고 폰에 깔아봤지만 소질이 없는 내겐 소용없는 짓이었다. 결국 나는 이불 속에서 폰만 보는 잉여로운 집순이가 되었다. 수능 끝났다고 별 거 없었다. 수능이 끝나면 입학할 때까지 쉬지않고 놀아야겠다는 계획은 무산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이상이면 할 수 있는 한국사 게임
ⓒ 이진선

그렇게 숨만 쉬고 살고 있을 때 어느 날 아빠가 새로운 보드게임을 들고 왔다. 딱 보기에도 초등생이 가지고 놀 만한 보드게임이었다. 실제 연령이 초등학교 5학년 이상으로 돼있었다. 이순신과 단군왕검이 귀엽게 그려져 있는 이 보드게임은 한국사 퀴즈를 푸는 방식으로 돼있다.

한국사란 말에 괜히 뜨끔거렸다. 12년간 학교를 다녔다지만 나는 진정한 학(學)생이 아니었기에 한국사는 그냥 어려운 과목일 뿐이다. 보드게임을 받으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빠는 대체 무슨 의도로 이 게임을 주는 걸까. 공부를 하라는 걸까. 아니면 단지 놀아보자는 것인가.'

아빠답게 답은 후자였다. 아빠는 애들이랑 노는 거 좋아한다.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한 게임이라도 아빠는 애들과 잘 한다. 비록 나랑 동생은 이제 어린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같이 해 볼만하다며 함께 해보자는 것이었다.

 주사위를 던져 말을 움직이며 한국사 흐름을 알 수 있게 한 한국사 게임 보드판
ⓒ 이진선

할 것도 없고, 숨 쉬는 것도 귀찮아 질 무렵에 집에서 하기 딱 좋은 게임이라 흔쾌히 하기로 했다. 게임의 구성은 아주 튼튼했다. 너무 튼튼해서 처음엔 깜짝 놀랐다. 약간 복잡해 '이걸 초등생이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무엇보다 고이왕이니 고국천왕이니 하는 들어본 듯 들어보지 않은 애매한 왕들을 맞추는 게 어려웠다. 하지만 게임을 하다 보면 힌트가 여기 저기 있어 몰랐다 해도 게임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워낙 한국사를 못했기에 처음엔 두려웠했는데 게임을 하면 할수록 반복 학습격으로 역사를 익히니 게임에 자신감도 붙고 역사에 흥미도 생겼다.

이번 설에 사촌형제들과도 한판 붙었다. 어른들은 윷놀이에 신이 나 있을 때 중3부터 대학생까지 우리 사촌형제들은 한국사를 놓고 신나게 놀았다. 다들 깔깔거리며 보드판을 돌렸다.

요즘 일본군 위안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일제강점기 친일 등을 놓고 시끄럽다고 들었다. 얼핏 들으니 고대사도 논란이 치열하다고 한다. 역사가 어려워 공부는 안 했지만 그래도 알 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에 만난 게임이 반갑다.

게임하다 생긴 관심으로 역사나 차분히 공부해 봐야겠다. 아직도 대학입학까지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기에.


태그:#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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