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회

포토뉴스

성공회대에 마련된 고 신영복 교수 빈소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빈소가 16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 대학성당에 마련되었다. 신 교수는 지난 2014년 피부암 진단을 받아 투병중, 최근 암이 다른 장기로 급속히 전이되면서 병세가 악화되었다. ⓒ 성공회대 제공
ⓒ 성공회대 제공
ⓒ 성공회대 제공
16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 대학성당에 '더불어숲'이라고 적힌 큰 펼침막이 내걸렸다. '더불어숲'은 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사상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 아래 고인의 빈소가 마련됐다. 그가 '시대의 스승'이라 불리는 이유를 증명하듯, 그의 제자를 자처하는 많은 조문객이 빈소를 찾았다.

빈소에는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라고 쓰인 문구가 쓰인 제단이 꾸려졌다. 이 제단에 마련된 영정사진 속 고인은 엷은 미소를 띤 채 조문객을 바라봤다.

이재정 경기도교육감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분노를 넘어 변화해야 한다는 말씀"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은 신영복 교수를 성공회대로 이끈 장본인이다. 1988년 고인이 20년 만에 감옥에서 나오자, 당시 천신신학교(성공회대 전신) 교장이었던 이재정 교육감이 신 교수에게 강의를 맡겼다. 이후 이재정 교육감과 신영복 교수는 성공회대 총장과 교수로 성공회대를 이끌어나갔다.

조문을 마치고 나온 이재정 교육감에게 고인이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물으니 "시대의 스승"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신영복 교수는 이 시대의 스승이다. 어떻게 우리가 고난을 이길 수 있는가 하는 지혜를 우리에게 주셨다.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분노를 넘어서 변화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고인은) 그런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만이 역사를 바꿔낼 수 있다는 큰 지혜를 주신 이 시대의 스승이다."
고 신영복 교수의 1989년 성공회신학대학(현 성공회대) 강의. ⓒ 성공회대 제공
성공회대에 마련된 고 신영복 교수 빈소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빈소가 16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 대학성당에 마련되었다. 신 교수는 지난 2014년 피부암 진단을 받아 투병중, 최근 암이 다른 장기로 급속히 전이되면서 병세가 악화되었다. ⓒ 성공회대 제공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고인의 언어 하나하나가 감동이었다"

고인의 동료 교수였던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역시 고인을 스승이라고 일컫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위대한 스승을 잃었다"고 한탄했다.

"25년 동안 옆에 같이 있으면서 신영복 교수의 언어 하나하나가 감동이었다. 삶의 깊은 성찰과 고난의 감옥에서 길어 올린 언어였다. 극단적인 경쟁 사회 속에서 더불어 숲을 이루는 따뜻한 사회를 잃지 말라고 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말씀하셨다. 절망의 시대에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혼수상태에서도 제자 하종강의 손을 잡다

지난 10일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장은 신영복 교수의 자택을 찾았다. 신 교수는 혼수상태에 있었다. 잠깐 의식을 찾은 신 교수는 하종강 학장에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누구?"라고 물었다. 입 모양을 보고 뜻을 파악한 하 학장이 이름을 밝히자 신 교수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온몸이 마비된 상황에서 왼손을 가슴까지 들었고, 하 학장은 얼른 그 손을 잡았다.

고인과 하 학장은 스승과 제자 사이다. 고인이 2000년 성공회대 초대 노동대학장을 맡았을 때 하 학장은 노동대학 1기 신입생이었다. 이후 하 학장은 스승에게 이끌려 8대 노동대학장을 맡았다.

"2011년 노동대학장으로 처음 출근하는 날, 신영복 교수는 연구실을 보여주겠다고 내 손을 끌고 가셨다. 그곳에는 전임자가 사용하던 물건이 몇 개 있었다. (신 교수는) '청소 아직 안 했네' 하면서 팔을 걷어붙이고 청소했다. '나중에 제가 하겠다'고 했지만, 다 치우셨다. 사실 신영복 교수가 노동대학장으로 오라고 한 것은 그 6개월 전이다. 그때 성공회대에서 비정규직 조교의 투쟁이 있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신영복 교수는 다 이해했고, 다 해결된 뒤 이곳에 왔다."
ⓒ 성공회대 제공
백기완 "그의 가르침은 전 세계 민중에 대한 가르침"
유홍준 "이런 분과 한 시대를 살았다는 게 행복하다"

백기완 민족문제연구소장은 부축을 받으며 빈소를 찾았다. 그는 고인을 "반문명의 모순과 싸우다가 일생을 마치신 분이다, 거기서 싸우다 돌아가신 신영복 교수의 가르침은 이 땅에 사는 민중만이 아니라 전 세계 민중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강조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고인을 "한국의 루쉰"이라고 했다. 루쉰은 현대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아큐정전>을 쓴 문인이자 혁명가다. "많은 지성인들이 (고인을) 사표로 삼고 있지만 그분의 삶을 흉내 낼 수 없다. 27~47살을 감옥에서 산,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고인은) 그 기간 동안 수도했다(도를 닦았다)"면서 "세상 사람을 위해서 많은 일깨움을 준 이런 분과 한 시대를 살았다는 게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1988년 8월 14일 고 신영복 교수가 8.15특별가석방을 통해 20년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당일 모습. ⓒ 성공회대 제공
고 신영복 교수의 1966년 육군사관학교 강사 시절 모습. ⓒ 성공회대 제공
고 신영복 교수의 1962년 모습. ⓒ 성공회대 제공
박원순 서울시장 "고인이 꿈꾸고 가르쳤던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많은 야당 정치인도 빈소를 찾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이틀 전에 (고인이) 힘들어 하실 때 찾았다. 이미 곡기를 끊으실 때였다. (고인이) 너무 힘드셔서 말을 못 나눴다"며 안타까워했다. 박원순 시장에게 고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 사회의 모든 정파, 여야, 모든 세력들을 넘어서 우리 사회가 나가야할 방향을 많이 가르쳐주셨다. 저도 제자의 한 사람이었고, 늘 저희들이 필요할 때 기꺼이 글을 써주셨다. 서화를 팔아서 사회운동을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셨다. 신영복 교수가 남긴 좋은 가르침을 우리가 잊지 않고 실천함으로써, 신영복 교수가 꿈꾸고 가르쳤던 그런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심상정 "어디선가 항상 지켜보는 것 같다"

박영선·이인영·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도 빈소를 찾았다. 정의당에서는 심상정 상임대표를 비롯해, 김제남·정진후·박원석 의원이 조문했다. 심상정 대표에게도 고인은 스승이었다.

"(고인에게) 사람이 최고의 가치였다. 절망의 시대일수록 사람을 키우는 것으로 희망을 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분열과 좌절의 시대에 사람에게서 희망을 찾는 진정한 인문학자였다. 저희처럼 새로운 길을 개척해가는 그런 사람들을 어디선가 항상 지켜보는 것 같다. 저희에게 큰 용기를 줬다."

안철수 "주위 사람 모두를 맑게 만드는 분"
국민의당 한상진 창당준비위원장과 안철수 인재영입위원장이 16일 오후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 대학성당에 마련된 고 신영복 교수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추모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 성공회대 제공
국민의당 창당을 추진하고 있는 안철수 의원도 한상진 창당준비위원장과 함께 빈소를 찾았다.

"2013년 9월 성공회대 강연에서 (고인을) 만났다. 정말 맑고 선한 분이다. 대화를 나누는 주위 사람 모두를 맑게 만드는 분이다. '낡은 정치를 바꾸겠다'는 제 말씀에 '꼭 성공하기 바란다'는 격려 말씀을 해주시고 책도 서명해서 주셨다. 시대의 위대한 지식인이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났다. 하신 말씀은 후대까지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한편, 성공회대에는 빈소뿐만 아니라 고인의 서화 작품 등을 볼 수 있는 추모 공간도 마련됐다. 17일 오후 7시 30분에는 성공회대 피츠버그홀에서 교수회 주도로 추모의 밤 행사가 열린다. 영결식은 18일 오전 11시 대학성당에서 진행된다.

추운 날씨에도 빈소를 찾은 조문객은 16일 오후 9시 현재 2000여 명을 넘었다.
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 성공회대 제공
ⓒ 성공회대 제공
태그:#신영복 교수 타계
댓글1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법조팀 기자입니다. 제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