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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부산광역시 출생, 2000년 영구귀국
15살 때 심부름 다녀오는 길에 트럭에 강제로 실며 위안부로 연행됨. 중국으로 끌려가 위안소에서 고초를 겪음.
 1927년 부산광역시 출생, 2000년 영구귀국 15살 때 심부름 다녀오는 길에 트럭에 강제로 실며 위안부로 연행됨. 중국으로 끌려가 위안소에서 고초를 겪음.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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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한테 말할 수 없는걸. 말을 안해야지. 말을 하면 눈물이 속으로 흘러."

할머니들의 한숨이 깊어졌다. 가슴이 답답한 긴 한숨들이 흘러나왔다. 간간히 흔들리기도 하고, 때론 고통스러운 떨림이 전해졌다. 그간 "반성하라"며 자신들의 피해사실에 힘내시며 말씀해주시던 할머니들. 하지만 이날은 다른 날과는 달랐다.

1926강원도 평창출생. 1998년 나눔의 집 거주. 자신의 장례식비용 500만원을 제외하고 평생모은 돈 1억을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 1942년 당시 17살. 일본군에게 강제로 붙들려 중국 일본군위안소 2년을 지냄. 김군자 할머니는 중국밭에서 배추를 뽑아 먹으며 무려 38일 동안 걸어 고향으로 돌아옴.
 1926강원도 평창출생. 1998년 나눔의 집 거주. 자신의 장례식비용 500만원을 제외하고 평생모은 돈 1억을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 1942년 당시 17살. 일본군에게 강제로 붙들려 중국 일본군위안소 2년을 지냄. 김군자 할머니는 중국밭에서 배추를 뽑아 먹으며 무려 38일 동안 걸어 고향으로 돌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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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피곤해서도, 나이가 들어서도 아니었다. 이번 한.일 양국의 위안부합의 이후 예전보다 수척해진 할머니들의 모습과 확연히 줄어든 말수.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눔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할머니들의 목소리에는 늘 고통스런 통증이 담겨있었다. 이날 본 할머니들의 모습은 평상시와는 그 통증의 강도와 무게가 확연히 달랐다.

1924년 경북 밀양 출생, 2001년 영구귀국
16세 감금돼 중국 만주, 상하이 위안소에서 고초를 겪음. 4년간 위안소 생활을 하다가 해방후 중국에 정착. 국적회복 후 2003년 4월 주민등록 취득
 1924년 경북 밀양 출생, 2001년 영구귀국 16세 감금돼 중국 만주, 상하이 위안소에서 고초를 겪음. 4년간 위안소 생활을 하다가 해방후 중국에 정착. 국적회복 후 2003년 4월 주민등록 취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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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경북 상주 출생, 2000년 영구귀국
16세 늦여름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張春)의 위안소 끌려감. 1945년 독립군 도움으로 어룬춘으로 피신.
 1928년 경북 상주 출생, 2000년 영구귀국 16세 늦여름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張春)의 위안소 끌려감. 1945년 독립군 도움으로 어룬춘으로 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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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우리들이 당하고, 우리들이 남의 나라로 끌려갔는데. (어찌)말만 편하게 하고 왔는가?"

한 할머니는 이번 한일 협상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방문객들에게 가서 "국민들한테 우리가 당한 걸 (꼭)말해라"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백성들이 건강하고 우리나라를 우리 고향을 잘 지켜준 게 난 그게 감사해"라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면서 돌아가지 못한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보고 싶다는 쓸쓸한 마음을 전했다.

1929년 충남아산 출생, 2012년 나눔의 집 거주
 1929년 충남아산 출생, 2012년 나눔의 집 거주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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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90년대 초반에 할머니들 문제가 불거졌을 때, 대한 불교계 불교인권위에서 할머니들 삶을 돌아보자고 했대요. 그런데 기본적인 삶조차 열악하셔서 할머니들 기본적인 삶이라든지 여생을 편히 모시자 해서 모금으로 시작을 한 거에요. 90년대 초부터 종로구 혜화동, 서교동 전셋집을 얻어서 사시다가, 어떤 독지가의 후원으로 경기 광주 이곳에 집을 지어서 오시게 된 거죠."

나눔의 집 원종선 간호사.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 나눔의 집 탄생배경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나눔의 집 원종선 간호사. 나눔의 집 할머니들과 나눔의 집 탄생배경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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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나눔의 집 원종선 간호사는 나눔의 집이 처음 생기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나눔의 집은 예전 전셋집부터 있었어요. 그러다가 1995년 12월에 나눔의 집이라는 간판을 걸고 이곳으로 오게 되었죠". 그는 이 곳에 온 지 3년 뒤에 나눔의 집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 설립되었다고 덧붙였다. 그 역사관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박물관'임을 알려주었다.

"이 할머니는 김군자 할머니세요. 아름다운 재단에 1억원 을 기부하셨어요."

그녀는 할머니들을 한분, 한분 챙기며 방문객들에게 설명했다. 할머니들의 성격과 나이, 이곳에 어떻게 오시게 되었는지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할머니들이 피곤하실까 걱정하는 방문객들에게 오히려 여러분들이 관심가져 주시고 사랑을 주시니까 (할머니들)건강에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함께 계시던 할머니도 "(우리도)이 시간이 좋은 시간이지"라며 평소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전했다.

경기교육희망포럼 시민과 학부모들이 헤어지기 전 인사를 나누고 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시민들이 보인다.
 경기교육희망포럼 시민과 학부모들이 헤어지기 전 인사를 나누고 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시민들이 보인다.
ⓒ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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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들이 할머니들이 피곤해 하실까 걱정하는 마음을 전하자, 관계자들은 오히려 방문객들을 할머니들이 반기시고 즐거워하신다고 설명했다. 할머니들은 수척해진 모습 속에서도 반가움을 표해주셨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삼삼오오 할머니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어떤 이는 눈시울을 붉히며 포옹을 했다. 허나, 다들 미소를 잊지 않으며 다시 뵐 것을 약속했다.

경기교육희망포럼 성명서 발표 중인 모습
 경기교육희망포럼 성명서 발표 중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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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의 방문객들은 바로 경기교육희망포럼 시민과 학부모들이었다. 경기교육희망포럼은 경기도에 있는 31개 시.군에서 각 지역의 교육을 걱정하는 시민과 학부모들의 자발적인 연합 모임이다. 그들은 지난 15일 한일회담에 대한 성명서 발표를 위해 나눔의 집을 방문해 할머니들께 인사를 드렸던 것이다.

경기교육희망포럼 주미화 광명대표. 성명서발표 전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경기교육희망포럼 주미화 광명대표. 성명서발표 전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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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언론에서만 보다가 오늘 처음 방문했습니다. 정말 마음이 너무 아프고 어르신들이 건강을 지켜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오늘 이곳에서 돌아갈 때 잘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돌아가서 할머니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경기교육희망포럼 차상현 오산희망교육포럼대표가 성명서 발표전 발언하고 있다.
 경기교육희망포럼 차상현 오산희망교육포럼대표가 성명서 발표전 발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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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최근 국정교과서 문제부터 시작해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위안부 합의 문제도 그렇고 모든 게 우리한테 잊혀지는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있습니다. 앞으로 굴욕적인 역사지만 잊지 않고 저희가 후배들한테 계속 이런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역사에 남기면서 앞으로 발전할 수 있는 민족이 될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하겠습니다."

경기교육희망포럼 최옥희 성남교육포럼 대표의 성명서 낭독.
 경기교육희망포럼 최옥희 성남교육포럼 대표의 성명서 낭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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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주미화 광명교육희망포럼 대표가 인사말을 전했다. 곧이어 차상현 오산희망교육포럼대표의 입장표명이 이어졌다. 최옥희 성남교육포럼 대표의 성명서 낭독이 재차 이어졌다.

"과거의 역사가 아닌 피해자가 엄연히 살아있는 현장, 증언과 진실이 살아있는 오늘,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최 대표는 지적했다. "이제 그만 용서하라고 잊으라고 말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며, "오직 할머님들의 오롯한 권한"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협상은 정부에 위임한 사안이 아니며, 절차상의 문제와 내용적으로도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기교육희망포럼 송준호 수원교육포럼 대표가 구호제창을 준비하고 있다.
 경기교육희망포럼 송준호 수원교육포럼 대표가 구호제창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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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졸속적이고 굴욕적인 일본군 위안부 한일 협상 전면 폐기하라"는 송준호 수원교육포럼 대표의 구호를 마지막으로 이날의 행사를 마쳤다. 경기교육포럼 관계자들은 추후 일본대사관 앞 수요 집회에 참가하고 소녀상을 지키는 대학생들을 격려방문할 예정임을 밝혔다. 또한 이번 협상이 폐기될 때까지 지속적인 홍보활동 및 교육활동을 진행할 것임을 예고했다.
나눔의 집의 소녀상.
 나눔의 집의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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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 전문 첨부.

일본군 위안부관련 굴욕적 한일회담에 대한 경기교육희망포럼 성명서

오늘 우리는 역사의 현장에 서 있습니다.
과거의 잊혀진 비문의 역사가 아니라 피해자가 엄연히 살아있는 현장이며
증언과 진실이 살아있고 아직도 진행형인 역사의 장에 오늘 우리는 서 있습니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용서 받을 대상 즉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피해 할머니들과 함께 해주는 것입니다.
이제 그만 용서하라고 잊으라고 말할 자격!!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오직 할머님들의 오롯한 권한입니다.
정부에 위임한 사안이 아닙니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외교장관 윤병세-기시다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불가역적으로 최종 해결됐다고 선언했습니다.


허나 그 합의는 절차상의 문제와 더불어 내용에 있어서도 치명적인 결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있던 날부터, 그리고 24년간 일본 대사관 앞에서 1,213회 이어온 수요 집회의 투쟁의 결과를 무의미하게 돌려놓은 치욕적인 한일 회담의 날입니다.

따라서 우리 경기교육희망포럼은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첫째, 피해 당사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견이 묵살된 이번 합의는 절차적 정당성이 없습니다. 정부는 이번 협상을 일방적으로 끝내고 강압적으로 수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참으로 무례하고 몰상식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요구는 일본 정부의 공식사죄와 법적 배상입니다. 공식사과의 수준도 조약이 아닌 외교장관 합의로 끝냈고 일본은 협상 타결의 전제 조건으로 일본 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고, 직접적인 배상이 아닌 10억엔에 역사의 면죄부를 주는 미봉책에 불가한 일입니다.

셋째, 국회 동의 없는 한.일 위안부 협상은 무효입니다.
헌법 제 60조에 따라 주권을 제약하거나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조약은 반드시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사전 국회 동의와 당사자 협의가 없었던 이번 합의는 우리 헌법상 명백히 무효입니다.

외교적 대참사라 불리는 굴욕적 협상으로 국민의 공분을 일으키고 할머니들의 삶을 모욕한 이번 협상을 정부는 오히려 "최선을 다한 협상이다."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며 자화자찬하고 있습니다.

과연 박근혜 정권은 누구를 위한 정부인지 되묻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자리에서 천명합니다.
우리는 이 합의를 반대하며 무효임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굴욕적 한일협상의 체결에 대해 위안부 할머니들께 사과하길 바랍니다.
우리는 위안부 관련 협상을 전면 재협상하길 바랍니다.
우리는 일본정부의 진심어린 사과와 법적배상을 다시 한 번 요구합니다.


2016년 1월 15일

2015년 경기교육희망포럼(네트워크)

가평마을교육공동체, 과천교육희망포럼, 광명교육희망포럼, 광주교육포럼, 구리남양주마을 교육포럼, 성남창의교육시민포럼, 안산교육희망네트워크, 안산마을교육공동체연대포럼, 오산희망교육포럼, 용인교육시민포럼, 수원포럼, 파주상상교육포럼, 마을교육공동체사회적기업 숲(화성).


태그:#나눔의집, #한일회담, #위안부, #한일위안부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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