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881004

큰아들 생일입니다. 88 서울올림픽이 10월 3일에 폐회된 다음날 아들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결혼 후 그 아이를 뱃속에 잉태한 아내와 맞았던 1988년 1월 겨울을 배경으로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나려 합니다. 이제는 아주 옛날 이야기를 지칭하는 용어가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서 '쌍팔년도식'으로 바뀌었다지요? 자 이제부터 그 '쌍팔년도'의 우리 삶의 애환을 함께합니다.

물그릇에 살얼음이 절반... 그때 그 겨울

엊저녁 잠들 때까지 따뜻했던 아랫목이 한밤중을 지나면서 식어, 서릿발 같은 냉기가 두터운 요를 뚫고 올라온다. 방 안의 우풍 때문에 머리 끝까지 이불을 덮어 쓰고 잠들었는데,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애써 치켜 올리며 몸을 잔뜩 웅크려 냉기를 좇아내려 애쓴다.

옹당그린 만큼 넓어진 공간이 휑하니 더 바람을 불러 옆에 잠들어 있던 아내가 내 품을 파고 든다. 잠결에 그런 아내를 끌어당겨 꼭 껴안고 한동안 두 사람의 체온을 합쳐 본다. 처음에는 효과가 있는 듯 했으나, 그것도 잠시…. 찬 기운은 둘 사이 아주 작은 공간까지 여지없이 파고 든다.

연탄불이 꺼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얼마의 시간을 미루고 망설이다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다. 손전등을 켜고 옷을 찾는데, 습도를 조절하려고 떠 놓은 웃목의 물그릇을 보니 반이나 살얼음이 꼈다. 다른 이불로 아내를 덮어주고 잠옷 위로 허드레 바지와 파카를 아무렇게나 걸친다.

방문을 열고 방보다 더 을씨년스런 거실을 지나 삐걱거리는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선다. 밤이 얼마나 깊었을까. 음력 섣달 초순의 한밤중, 보름까지는 1주일은 더 남아 있어, 일찍 떴던 상현달도 진 건지 깜깜하기가 칠흑 같다. 멀리 군 부대 초소를 비추는 가로등만 밤안개에 취한 듯 가물거린다. 

건넌방 외벽을 더듬어 모퉁이를 돌아 만나는 보일러실. 올 겨울 들어서만 벌써 십수 번 밤중 행차라 이제는 더듬어도 찾을 수 있다. 보일러실이 북향이라 시베리아 바람이 뺨과 귓전을 때린다. 아니나 다를까. 벌겋게 달궈져 있어야 할 아궁이 속 연탄이 거무튀튀하게 죽어간다. 밑 연탄불이 새 연탄으로 옮겨 붙다가 탄이 축축해서 불이 제대로 살지 못한 것 같다.

번개탄도 숯도 없는 상황, 주인집 문을 두드리다

살고 있는 집이 언덕배기 축대 위에 있고, 거기서도 또 2층집이라 연탄집 아저씨가 배달을 꺼린다. 2층 보일러실까지 100개 가까운 계단을 연탄을 지고 올라와야 하니까. 이런 사정으로 연탄 주문을 수백 장 한꺼번에 한다. 그러다 보니 덜 마른 연탄이 끼어 불이 붙다가 꺼지는 경우가 하루이틀이 아니다.

비상용으로 준비해 놓은 번개탄은 일주일 전에 다 썼고, 대용으로 사용하는 숯도 몇 개 남지 않았다. 곤로용 석유를 조금 끼얹어 성냥불을 그어 불싸개를 만든다. 이미 타 버린 연탄 위에 불싸개를 놓고 그 위에 마른 연탄을 골라 얹는다. 아궁이 아래쪽 공기통에 부채질을 한다. 쉽게 붙을 줄 알았던 불이 오늘따라 중간에서 자꾸 꺼진다. 이래저래 시행착오하는 동안 보일러실은 연탄과 숯이 뒤섞인 퀘퀘한 냄새와 연기로 가득찬다. 

눈물이 흐르고 목도 따가와 콜록거린다. 이젠 주인집의 불붙은 연탄을 빌려 해결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시각이 새벽 2시, 한잠에 빠져 있을 남의 집 문을 두들겨 불을 빌려 달라고 할 수 있을까? 잠깐 고민을 하고 있는데, 언제 나왔는지 아내가 보일러실 앞에서 좁은 어깨를 들썩이며 발발 떨고 있다. 이제나 저제나 다시 방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다가 남편도 걱정되고 해서 종종 걸음쳐 나온 것이다.

잠시 가졌던 의구심은 이런 아내를 쳐다보자 눈 녹듯이 사라진다. 2층 난간을 잡고 아래 층으로 목을 빼어 내려다 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천만 다행이다. 창문을 통해 희미하지만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두 눈으로 목도한 것이다. ㄷ자로 굽은 아래층으로 난 계단을 타고 내려가 가만히 현관문에 귀를 대어 본다. 어린애 칭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인 할머니가 등을 토닥거리며 부르는 자장가 가락이 불빛과 함께 새어 나온다.

아내를 불러 내렸다. 이럴 때는 아내의 힘이 절대적이니까. 특유의 정감 내는 목소리 톤을 가지고 살갑게 사람을 파고 드는 기술이 있다. 문을 노크하자 할머니가 나오고 우리 사정을 듣고는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냐고 오히려 안쓰러워한다. 할머니는 아내에게 아기를 맡겨놓고는 바로 보일러실로 가서, 시뻘겋게 불타는 연탄 한 장을 빼서 내 앞에 내민다.

다시 아기를 할머니께 안겨 드리고는 아내와 나는 그 불씨를 보물 모시듯 조심조심 갖고 올라와 바로 아궁이에 집어 넣는다. 활활 타오르는 밑불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시뻘건 혀를 위의 시커먼 연탄 구멍으로 집어 넣어 아궁이 속에서 한 몸이 된다.

불 붙이기 성공이다.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다. 내 파카 옷자락 품에서 아직도 떨고 있는 아내의 갸냘픈 작은 어깨를 껴안고 득의양양하게 방으로 향한다. 거실로 들어서니 마주 보이는 벽시계가 벌써 새벽 4시를 가리킨다. 잠이 깼을 때는 2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 냉기를 느끼고부터 지금까지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축대집 2층 셋방살이 두 신혼 청춘의 꿈은 이렇게 연탄불 매케한 연기 속에서도 영글어 간다.

추위 때문에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하루는 또 시작된다

연탄불 온기가 보일러 배관을 타고 와 방바닥이 다시 따뜻해져 올 무렵 저 멀리서 아득히 들리던 차종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새벽 청소차의 외침이다. 다시 한 번 외투를 걸치고 여기저기 모아 놓은 쓰레기를 양동이에 빈 상자에 비닐 봉지에 담아 어둡고 긴 계단을 내려가 쓰레기차 뒤에 줄을 선다.

부지런한 대여섯집 주민들이 벌써 앞에 내 앞에 서 있다. 수퍼집 아줌마, 쌀집 아저씨, 골목어귀집 독거 할머니…. 집집마다 들고 나온 쓰레기의 반은 다 태운 연탄재다. 내 차례가 돼 친절한 청소 아저씨에게 쓰레기를 인계하고 빈 양동이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느새 뿌옇게 동녘 하늘이 밝아온다. 다시 잠깐 눈붙였던 아내는 어느 새 일어났는지 아침식사 준비에 바쁘다. 제대로 잠을 못 자고 추위에 떨어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아내가  사랑으로 지은 아침밥을 먹고 나니 가슴에서 솟는 기운이 세상을 호령하고도 남는다. 출근 채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선다.

그해 겨울, 내가 결혼하여 보금자리한 집은 시내 변두리 동네 2층 양옥집 반전세. 결혼하면서 부모님께서 문전옥답 팔아 마런해 주신 고마운 집이다. 30미터 축대 위에 지어져 골목에서 계단 50~60개를 걸어 올라가야 대문에 이르고, 다시 2층으로 오르려면 계단 20개는 더 타야 한다. 당시엔 큰 도로에서 이면 도로를 거쳐 다시 골목으로 접어들면 이런 모습의 2층짜리 양옥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골목을 꺾어돌아 이면도로를 지나 버스가 다니는 큰 도로로 나오는데만 20여 분, 인근 외곽 농촌 마을에서 출발해 회사 앞으로 가는 시내버스는 이미 만원이라 더 이상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다.

지갑에 끼워넣어 일주일은 더 지난 종이 승차권을 입에 물고 필사적으로 차에 매달려 본다. 그러나 버스 안내양의 굳은살 박힌 손아귀 힘을 당하지 못하고 나는 차에서 나가 떨어진다.

입에 물어 침 묻은 승차권을  다시 양복 윗주머니에 꾸겨 넣고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다시 버스를 만나려면 15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겨울이지만 그 시간만큼 또 다른 겨울이 한걸음 더 바짝 쫓아온 것 같다. 휑하니 넓은 도로 위 곳곳에 뒹구는 낙엽이 출근길 한 젊은 노동자의 가슴에 뜨거운 서릿발을 세운다.

덧붙이는 글 | 응답하라1988 응모글입니다.



태그:#월셋방 로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