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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무더운 여름 어느 날이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전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전화를 걸어온 이는 "과거 중앙정보부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님을 감시하고 이를 기록한 문서가 있는데 받을 생각이 있냐"라고 물어왔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가슴이 뛰는 가벼운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곧바로 달려간 저는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문제의 기록을 받았습니다. 더운 여름날, 박스에 담긴 서류를 수차례 옮기며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감춰진 국가 권력의 추악한 비밀을 접할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앞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첫 장을 펼친 순간, 저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 기록을 세상에 공개해야겠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문제의 기록에 담긴 내용은 국가 안보와 관련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국익을 해할 내용이나 또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지켜야 할 비밀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안에는 독재에 저항하는 장준하 선생님을 상대로 한 유신독재의 잔혹한 야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한 인간이 겪었던 고통과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재야인사 장준하. 일제강점기에는 광복군으로, 광복 후에는 백범 김구 선생님의 비서로, 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언론인으로, 국회의원으로 그리고 재야인사로서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의 폭압에 맞섰던 민주투사. 그런 장준하 선생님이 어떤 탄압을 받았는지 오늘의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고발해야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중정은 언제부터 장준하 선생을 감시했나

생전의 장준하 선생
 생전의 장준하 선생
ⓒ 장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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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가 장준하 선생님을 감시하고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때는 1963년부터였습니다. 육군소장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찬탈한 후 제일 먼저 만든 기구가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의 전신 명칭, 약칭 '중정')인데, 중정은 이후 권력에 도전하는 인사들을 감시하면서 이를 감시한 내용을 '동향 보고'라는 문서로 생산합니다. '장준하 파일'로 이 동향 보고가 생산된 첫 시기가 바로 1963년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중정의 동향보고 문서가 생산되기 이전에도 장준하 선생님에 대한 권력 기관의 감시는 계속 있었습니다. 다만 1963년 이전에는 경찰이 장 선생님을 감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던 장 선생님에 대한 감시를 경찰이 아닌 중정이 직접 담당한 때는 1963년 10월부터로 보입니다.

계기가 있었습니다. 1963년 박정희는 쿠데타 당시 약속했던 '민정 이양'을 깹니다. 군이 아닌 민간인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더니 자신이 공화당을 창당한 후 직접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입니다. 그러자 장준하 선생님은 이를 강력 비판하며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씨를 지지하는 유세에 나서게 됩니다. 중정이 장준하 선생님을 직접 감시하고 동향을 파악하는 계기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권력의 탄압 속에서 장준하 선생님의 일생은 말 그대로 '혹독한 겨울의 중심'이었습니다. 서른일곱 번의 연행과 세 번의 구속. 당시 지식인의 표상처럼 여겨지던 <사상계>는 연이은 세무 사찰과 영업 방해 공작으로 부도 처리됐고 학비조차 마련할 수 없었던 장 선생님의 자녀들은 원하는 학업을 마칠 수 없었습니다.

동향 기록에서는 이러한 과정에서 중정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장 선생님이 누구를 만났고, 어떤 대화를 나눴으며, 향후 어떤 행보를 할지에 대한 대책이 담겨 있었습니다. 중정의 감시는 단순히 뒤를 쫓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전화 도청은 물론이었고 자기 집 안방에서 나누는 대화까지도 동향 기록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추악한 독재 권력의 탄압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장준하 선생님도 알고 계셨을까요. 알고 계셨습니다. 1974년 1월 초, 장준하 선생님은 박정희 유신 독재에 맞서 악법인 유신 헌법의 철폐를 요구하는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선언하고 이를 주도합니다. 그때 장준하 선생님의 집에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옵니다.

동향 기록에 '미상남'(누구인지 알 수 없는 남자)으로 적혀 있는 이 남자는 장 선생님의 안부를 걱정하며 "어떠시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장 선생님은 "나는 지금 철저히 감시받고 있다, 지금 이 전화도 분명 그들이 듣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변소 가는 길도 그들에 의해 감시를 받고 있다"라면서 자신을 향한 권력의 탄압에 분노를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감시로 인해 장 선생님의 심적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또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장준하 선생님이 타고 다니시던 낡은 자동차에 실린 '물건'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몽둥이였습니다. 자신이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 그래서 언제 어떤 테러를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장 선생님은 늘 자동차 뒷자리에 늘 몽둥이를 두고 다녔다고 합니다.

실제로 자신을 뒤쫓는 정체불명의 차량을 향해 "정체를 밝히라"며 항의를 했다는 동향 보고도 눈에 띄었습니다. 1974년 1월 7일의 일이었습니다.

1974년 1월 7일
통일당사 앞에서 미행 감시 차에 대하여 정체를 밝히라고 발악하며 소동을 벌인 바 있음.

그리고 이 일이 있고 바로 다음 날인 1월 8일, 박정희는 유신헌법 개헌을 청원하는 민주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1호' 및 '2호'를 선포합니다. 이후 청원운동 주도 세력인 장준하 선생님과 백기완 선생님 등을 대거 구속합니다.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던 장준하 선생님에 대한 처절한 피의 기록, 바로 중정의 동향기록이었습니다.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다 쓰고 엉엉 운 이유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책표지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책표지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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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2015년이 밝아 왔습니다. 2015년은 장준하 선생님이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 속에 숨진 지 만 40주기가 되는 해였습니다. 저는 근 2년여간 준비한 다짐처럼 집필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거의 매일 17시간씩 수많은 자료와 문서를 뒤지고 찾으며 한 자씩 적어 나갔습니다. 이를 통해 장 선생님의 생애를 올바르게 기록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 지나가던 2015년 3월 말께. 마침내 저는 원고지 매수 1300매 분량의 초고를 썼습니다. 마침표를 찍은 원고의 맨 처음에 적은 제목,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였습니다. 부끄럽지만 그 제목을 붙이고 난 후 고백하자면 저는 눈물이 났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너무 힘들었거나 또는 제가 쓴 글이 너무 멋있어서 눈물이 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알게 된 장준하 선생님의 생애가 인간적으로 너무나 불쌍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장준하. 하지만 민족을 위해, 민중을 위해 그리고 독재권력 타도를 위해 자신이 죽을 길임을 이미 알면서도 뚜벅뚜벅 걸어나갔던 '민주주의자' 장준하. 그런 장준하 선생님이 그 위대한 일생을 마치는 자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너무도 비극적이었습니다.

포천 약사봉에서 생을 달리하신 후 다음 날 새벽, 장 선생님은 서울 면목동 전셋집으로 운구됩니다. 하지만 장 선생님의 빈소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비보를 듣고 전국 각지에서 조문객이 몰려왔지만 그들을 대접할 수 있는 음식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문 온 이들이 각자 주머니를 털어 술과 안주를 사와 나눠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이들은 울부짖고, 또 어떤 이들은 차마 독재자는 언급할 수 없으니 말 없는 오열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신을 안장할 묫자리 하나 없자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께서 "장례비를 도와드리겠다"는 전화 연락을 해오자 안도했다는 사모님의 동향 기록을 읽으며 저는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독재자 박정희가 죽고 난 후 그의 화장실 변기 물통에 벽돌 한 장이 놓여 있었다며 이렇게 근검절약하는 위대한 대통령을 봤냐고. 또 누군가는 말합니다. 방에 에어컨이 있는데도 부채를 놓고 사용한 분이 박정희 대통령이었다고. 그래서 이처럼 소박한 박정희 대통령이 너무도 존경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기억하십니까. 독재자 박정희 사후 그의 청와대 집무실 비밀 금고 안에는 무려 9억3000만 원의 정치자금이 있었다는 것을. 제가 만나본 청와대 김정렴 비서실장은 그 돈이 국내 10대 재벌들에게 정기적으로 걷은 정치자금이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쓰다가 남은 박정희의 불법 정치자금 중 3억 원은 전두환이 제 맘대로 갖다 쓰고, 나머지 6억3000만 원은 현 박근혜 대통령에게 줬다고 했습니다.

당시 강남의 아파트 수십 채를 살 수 있었다는 이 막대한 불법 정치 자금을 남기고 최후를 맞은 박정희와 조문 온 이들에게 국밥 한 그릇 대접할 여유도 남기지 못한 장준하 선생의 최후. 그 새벽, 장준하 선생님의 평전을 마무리하며 저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서러움이 밀려들어 엉엉 울었습니다. 뭔가 모를 서러움이 밀려들었던 새벽이었습니다.

뜻밖의 출판사 반응 "3년 후에 내면 어떻겠냐?"

지난 8월 17일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 장준하공원에서 열린 고 장준한 선생 40주기 추모식에서 고 장준하 선생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는 모습.
 지난 8월 17일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 장준하공원에서 열린 고 장준한 선생 40주기 추모식에서 고 장준하 선생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는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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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난관을 만난 것은 그때였습니다. 몇몇 곳을 접촉해 출판 의사를 타진하는데 예상과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생각과 달리 적극적인 출판 의지가 느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가장 실망스러운 기억은 한 출판사 관계자에게 들은 이야기였습니다.

"저기… 이 책에 관심은 있는데, 다만 3년 후쯤 내면 어떨까요?"

3년 후에 내자는 말의 뜻은 뭘까, 그랬습니다. 그때는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는 때였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보통의 출판사에서 책을 내는 것은 이 책의 성격상 쉽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찌할까 고민하던 중 내린 결론, 언론사가 운영하는 출판사를 찾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바로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가 운영하는 '오마이북'이었습니다. 2003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가입한 후 지금까지 제가 글을 써온 <오마이뉴스>를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그래서 곧바로 원고를 보낸 후 출판 의사를 타진하던 며칠 후, 오마이북 편집장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걱정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휴대전화 통화 버튼을 눌렀습니다.

과연 오마이북은 뭐라고 할까. 출판하겠다고 할까. 아니면 또 3년 후에…? 그때 들려온 첫마디는 이랬습니다.

"저기, 고 기자님. 원고는 잘 읽었구요. 만약에 저희가 이 책을 내게 된다면… 저희가 뭘 준비해야 하는지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출판사 측에서 걱정하는 것은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책에 담은 기록은 사실 국가기관이 향후 70년간 비공개로 두기로 한 자료입니다. 저는 왜 국가기록원이 이 문서를 비공개하기로 한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여하간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공개 기록을 근거로 책을 썼으니 출판사 입장에서는 이에 대한 걱정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답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뭐, 별거 없습니다. 저를 감옥에 보내주시면 됩니다."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답이 황당했을까. 오마이북 편집장님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더니 잠시 후, "네, 저희가 책을 내겠습니다, 좋은 책으로 같이 만들어보시죠"라는 말이 들려 왔습니다. 그 기쁨, 역시 제가 믿는 <오마이뉴스>였고 '오마이북'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2015년 9월 18일, 책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가 출판됐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출판을 전후한 상황을 접하며 저는 이 책을 쓰기로 결정한 저의 생각에 또다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친일과 독재의 추악한 역사를 감추기 위해' 현 정부와 여당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던 상황에서 제가 쓴 이 책이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자부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또한 일베 등을 중심으로 친일 행적을 걸어온 박정희씨의 비밀 광복군설을 비판하고자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에 이 부분을 상세히 담았는데 이 책의 출간 시점에 새누리당 대변인이 '박정희 비밀 광복군설'을 공식 언급함으로써 이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적극 비판할 수 있었던 사실 역시 제가 느낀 보람 중 하나였습니다.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가입, 그게 민주주의의 힘

그렇습니다. 만약 <오마이뉴스>가 아니었다면, 이런 오마이북이 아니었다면 이런 시기에 어찌 이런 책을 당당하게 낼 수 있었을까요. 정권에 밉보이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모 영화 기획사가 어떤 탄압을 받았네, 또 어느 배우는 그 영화에 출연한 이유로 잘 들어오던 시나리오가 끊겼다느니 하는 소문이 '전혀 거짓말 같지 않은' 시대가 아닙니까.

이런 시대에 할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언론, 바로 <오마이뉴스>입니다. 이런 <오마이뉴스>를 지켜주십시오.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에 가입하는 힘. 바로 그 힘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첫 번째 선택이 될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오마이뉴스>가 있다면, 그리고 그 <오마이뉴스>에 10만인클럽이 있다면 반드시 우리는 이깁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외칩니다.

"<오마이뉴스>, 힘내라!"

○ 편집ㅣ김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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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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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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