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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4일, 해가 기울고 산골로 간다. 어둠 속에서 동로는 너무 깊고 멀다. 문경시청이 있는 점촌에서 넘어가든, 문경새재에서 여우목을 넘어가든, 단양역에서 선암계곡을 넘어가든 30분은 외진 길을 달려야 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평온한 동로 땅을 금천(비단천)이 흘러간다. 동로는 이 자연환경을 자산으로 오미자 명산지가 됐다.

그런데 거리가 심상치 않다. 불편한 현수막이 바람에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돌광산이 미쳤다 동로주민 다 죽는다!!"라는 글귀가 펄럭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보다. 문경의 서쪽 동네는 오래도록 광산 개발로 제 몸을 헐어가며 견뎌왔다. 그 훈장으로 문경의 서쪽 가은읍에 석탄박물관이 들어섰다. 문경의 동쪽, 동로는 광산과 거리가 먼 동네였는데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나 보다. 마을 사람들의 걱정 소리가 들린다.

대문 주춧돌 위에 술잔

문경주조 소슬대문 주춧돌에 올려진 첫술.
 문경주조 소슬대문 주춧돌에 올려진 첫술.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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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면 소재지 비단천가에 양조장 '문경주조'가 있다. 2008년에 지어진 신생 양조장이다. 산골 오지에서, 오미자 막걸리를 빚는다. 오미자 막걸리는 연분홍빛이 돌고 상큼한 신맛이 깔끔하게 따라온다.

소슬 대문 안쪽으로 황토 벽돌로 지은 양조장이 보인다.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일찍 와서, 대문가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소슬 대문 주춧돌 위에 술잔이 놓여 있다. 분홍 술이 담긴 잔 주변을 생명체 하나가 날고 있다. 술은 사람만 좋아하는 게 아닌가 보다. 

양조장 주인, 술 빚는 여성 홍승희씨가 도착했다. 자신의 이름을 건 홍승희 탁주를 현대백화점에 팔고 있기도 하다. 본디 고추장 된장처럼 집안에서 여성이 술을 빚어온 전통은 깊지만, 사업체로서 양조장을 운영하는 여성은 드물다.

문화재나 명인이 된 분들을 제외하고, 양조장을 운영하는 당찬 여성 사업가로는 강원도 정선 여량양조장의 박기자, 경기 화성 배혜정도가의 배혜정, 상주 은척양조장의 임주원, 함평 자희자양의 노영희 그리고 문경주조의 홍승희 대표 정도를 꼽을 만하다. 일하는 사람도 남자들이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주로 남자들이다 보니, 여성이 양조장을 경영하는 일은 쉽지 않다.

"대문 기둥의 술은 무슨 술입니까?"라고 물어보니, "첫술입니다, 빚은 술을 병에 담기 전에 사발에 담아서 여기에 올립니다"란다. 요사이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술을 빚으니, 일주일에 두 번 첫술을 올린다, 양조장은 불을 다루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것도 많고, 땅의 신과 술의 신을 예우하고, 세상의 모든 영에게 잘 봐달라고 올린다고 했다. 대문 양쪽에 두 잔을 그리고 밥을 짓는 떡실에도 술잔을 올리면서, 홍 대표는 두 손을 모아 술이 잘 되라고 기도한다고 했다.

홍승희 대표가 술을 빚어 첫술을 올리고 있다.
 홍승희 대표가 술을 빚어 첫술을 올리고 있다.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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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막걸리 몰래 마시던 그녀

첫술이란 말이 나온 김에, 그녀가 마신 첫술을 물어봤다. 초등학교 때에 아버지 심부름으로 주전자에 막걸리를 받아오던 길에 처음 술을 마셨다고 했다. 11남매의 일곱째로 태어난 그녀는 아버지가 막걸리 심부름을 어찌나 자주 시켰는지, 반발심에 막걸리를 맛봤는데 처음에는 시금털털해서 맛이 좋지 않았단다.

그런데 조금씩 먹다 보니 또 먹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한번은 아버지가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시더니 "이 아지매가 인심이 많이 안 좋아졌네"라고 뭐라 하셨다고. 그녀는 가슴이 뜨끔했지만, 동네 아무개처럼 주전자에 고무신으로 도랑물을 퍼담지는 않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술을 잘 드셨고, 집안 내력이 있는지 그녀도 술을 잘 마셨다. 그녀는 30대 때에 강원 횡성 청일양조장을 운영하는 사촌오빠가 만든 옥수수 막걸리를 판매하면서 유통업에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됐다. 그때는 먹고 살기 위해서 뛰었는데, 예천에서 단양을 거쳐 강원도 횡성까지 스타렉스를 타고 가면 갈 때는 다섯 시간, 막걸리 상자 50개를 싣고 산길을 넘어올 때는 일곱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그 당시는 강원도 막걸리를 경상도에서 파는 것은 불법이었다. 냉장고에 술이 네댓 병 남아 있을 때에 신고를 받고 온 단속반원에 걸려 벌금 5만 원을 물었다. 그 뒤로 경북 영주시의 세무서를 찾아가 특정 주류 유통 면허를 냈다. 약주 판매의 도별 지역 경계가 막 풀린 1994년 무렵이었는데, 그녀는 지금 29살이 된 큰아들이 8살 때였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판매한 첫술, 강원도 옥수수 막걸리는 구수하고 기름기가 돌면서 입에 착착 감겼다. 동네 양조장의 단조로운 막걸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 뒤로 그녀는 논산의 뻑뻑주, 단양의 소백산 동동주, 괴산의 어우동과 진탁 그리고 조껍데기 막걸리를 팔면서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서 막걸리 거상으로 성장했다.

주전자 막걸리에서 출발해 옥수수 막걸리를 거쳐 오미자 막걸리로

황토방 항아리에서 익어가고 있는 수제막걸리 문희.
 황토방 항아리에서 익어가고 있는 수제막걸리 문희.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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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그녀가 직접 막걸리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좋은 재료로 좋은 품질의 막걸리를 만들고 싶어졌다. 예천이 고향인 그녀는 양조장터를 보러 다니다가, 고개 너머 문경 동로에 와서 오미자로 막걸리를 빚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덜컥 땅을 계약하고 농업기술센터를 찾아갔다. 농업기술센터에서는 오미자로는 막걸리 맛을 내기가 어렵다며 선뜻 오미자 막걸리를 권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오미자 막걸리에 도전하면서, 예상치 못한 다른 장벽을 만나게 됐다. 약재나 과일을 사용하면, 살균 막걸리로만 판매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녀는 서울 국세청 기술연구소를 찾아가 오미자로 생막걸리를 만들게 해달라고 탄원하고, 따지고, 싸웠다. 살균막걸리는 맛이 단조롭고 화근내도 따라오니, 오미자 생막걸리를 만들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 어찌나 찾아가서 따졌는지 지금도 그 담당자 이름을 기억한다.

그렇게 과일이 들어간 생막걸리 1호로 오미자 막걸리 제조 승인이 떨어졌다. 처음에서 금방 따라할까 봐 쉬쉬하며 가슴 졸이며 오미자 막걸리를 만들었다. 그녀는 유통 조직도 가지고 있는 터라 어려움 없이 오미자 막걸리로 자리를 잡았고, 초기 3년 동안 탄탄히 기반을 다졌다. 술맛이 좋다는 소문이 나니까 기술을 염탐하러 오는 이들도 있었다.

홍승희 대표는 아버지의 주전자 막걸리에서 사촌오빠의 옥수수 막걸리를 거쳐, 자신만의 오미자 막걸리 세계로 들어왔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황토방을 지어 전통 방식의 수제 막걸리 제조에 도전했다. 술밥으로 들어가는 찹쌀 분량의 절반 정도만 물을 붓고, 술을 손으로 치대 빚는데 직원들은 "고통의 순간"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수제 막걸리 '문희'는 온돌방에서 100일간 발효되고 숙성된다. 술은 옹기를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상주옹기장 정대희씨가 만든 항아리에 담겨있다. 산화납이 섞인 유약이 아닌 전통 잿물을 발라 만든 상주요 항아리를 사용한 뒤로, 그녀는 술을 실패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술은 제게 인생이죠"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되어 새로 시음장을 마련했다.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되어 새로 시음장을 마련했다.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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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술입니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간결하게 대답한다. "술은 제게 인생이죠." 술을 유통하고 만들면서 한순간도 고통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20년이 넘도록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는 지친 기색이 없다. 그녀는 "돌아보면 모두 추억이죠"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추억이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성취감을 느낄 만한 순간들이었음을 그녀의 부드러운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홍승희 대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상도의(商道義), 즉 신의(信義)다. 암묵적으로 영업 구역이 구분돼 있던 시절의 일이다. 유통을 할 때도 영업 사원이 다른 구역에다가 술을 배달하고 오면, 당장 찾아오라고 했다. 다음날 찾아오겠다고 하면, 당장 찾아오라고 했다. 명절 때 직원들이 고향을 가고 없을 때, 막걸리 한 상자 주문이 들어오면 택시를 타고서라도 직접 배달하기도 했다.

양조를 하면서는 또 다른 신의가 생겼다. 그녀는 고개 너머 마을 원류 방앗간에서 도정한 유기농 작목반의 쌀을 사다가 쓰고, 동로면의 오미자를 사서 쓴다. 간혹 값이 더 싸고 색깔이 좋은 오미자 원액을 사서 쓰라고 권하는 이들이 찾아온다. 그녀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오미자를 사용하지 않는다.

좋은 원료와 좋은 품질이 자신이 소비자에게 지켜야 할 신의라고 생각한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녀는 식품사업은 돈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문을 남기려 들고 경쟁을 하다 보면, 좋지 않은 재료를 쓰게 되고 넣어서는 안 되는 것을 넣는 일이 벌어진다고 했다.    

그녀의 생은 술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홍 대표는 오미자 막걸리가 자리를 잡게 되면서, 이문이 하나도 남지 않더라도 오미자 막걸리를 빚어야만 하는 운명이 됐다고 말한다. 그녀의 술을 가져가는 대리점이 살아야 하고, 그 술을 파는 매장과 음식점이 또 먹고 살아야 하니, 그녀는 술을 포기하지 않고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문경새재 매장에서 오미자 막걸리 배달이 조금이라고 늦으면 난리가 난다고 자랑했다.

늦게까지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아마도 그녀의 생은 술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상투적이지 않고, 속되지 않다. 술은 사람을 취하게 하고 속되게 만들기 쉬운데, 그러지 않는 버팀목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그 버팀목을 나는 그녀의 첫술에서 본다. 술을 빚어 양조장과 세상의 경계에다가 올리는 첫술에서 보고, 생막걸리에 처음으로 과일을 넣어 면허를 낸 뚝심의 첫술에서 보고,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생에 처음 마신 주전자에 담긴 아버지 막걸리의 맛에서 본다. 

그녀의 첫술에 그녀의 생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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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집밥만 있는 게 아니다, '집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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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김지현 기자



태그:#오미자 막걸리, #허시명, #술, #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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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평론가, 여행작가. 술을 통해서 문화와 역사와 사람을 만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술문화연구소 소장이며 막걸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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