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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 후 학회에서 초청 특강을 하는 필자
▲ 마지막 특강을 하는 필자 정년 후 학회에서 초청 특강을 하는 필자
ⓒ 김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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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의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스물일곱 살부터 교원양성소 강의를 시작해서 대학 강의는 스물여덟에서 일흔 한 살까지 했으니, 햇수로 치면 물경 44년이나 된다. 그 내역을 보면, 1972년에서 2012년까지 40년은 대구대(특수교육과)에 재임하면서 대학과 대학원 강의를 했고, 그 후 3년간은 정년 후 명예교수로 대학원 강의를 했다. 그 44년 간의 마지막 강의를 지난 학기에 마쳤다.

대학 강의 40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강좌는 1학년 기초전공 강의로 강좌명도 내가 이름지어서(「장애·문화·교육」; 학생들은 그냥 '장문교'라 했다) 개발한 강의였다. 물론 정해진 교재도 없이 1학년 1학기 신입생들에게 내 딴에는 크게 배우는 '대학(大學)'강의는 이런 것이라는 걸 보여 주고자 했다. 사실 모든 교과서-국정화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는 '죽은 문서'다. 살아 있는 교과서는 가르치는 교사(교수) 자신일 뿐이다. 살아 있는 교과서(교재)는 강좌 과정에서 구성될 뿐이다.

그 강좌 수강생 중에 청각장애학생이 있어, 속기지원을 받아 내 강의를 눈으로 읽으면서 참여했다. 내가 그 속기록을 출력해서 좀 보여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강의 속기록을 보면서 '말이 글이 되는지' 내 스스로를 짚어보는 기회가 되었다. 말이 글이 되는 건 형식의 문제지만, 말이나 글이 삶이 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가르치는 사람은 말한 대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교직이 어려운 게다.

정년하면서 학부 고별강의는 꼭 3년 전 이맘때 하였다. 여기 '마지막'이 정규 학기에 개설하는 강의로서는 끝이지만, 더러 특강이나 지식기부 차원의 강의 기회는 있을 게다. 이런 강의마저도 앞으로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신영복 교수는 금년 봄에 자신의 마지막 강의를 『담론』(2015)이라는 책으로 엮어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중략) 강의록을 책으로 내면서 생각이 많습니다. '책'이 강의실을 떠나 저 혼자서 무슨 말을 하고 다닐지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책은 강의실보다 작고 강의실에는 늘 내가 서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하면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옳습니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하는 것입니다(신영복. 담론. 2015, p.6).

강의는 끝났지만, 신영복 교수의 강의를 담은 『담론』이라는 책이 나왔으니 그나마 후학들에게는 큰 다행이다. 근데 막상 본인은 책이 강의실을 떠나 저 혼자서 무슨 말을 하고 다닐지가 걱정이란다. 왜냐면 책은 강의실보다 작고 강의실에는 늘 자신이 서 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책은 시공간을 넘어서서 읽혀질 수 있으니 그런 걱정은 놓아도 될 듯 싶다. 더욱이나 지금까지 신영복 교수의 책은 비교적 꾸준히 읽혀지지 않았던가. 게다가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한다면 그 책은 지복을 누리는 셈이다.

내 경우는 이래저래 사정이 좀 다르다. 나는 내가 낸 책을 중심으로 이번 학기에 마지막 강의를 거의 채웠다. 책은 일이년 전의 생각을 담은 것이라면 강의는 어제 밤의 생각을 반영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만큼 강의의 생명은 '생동감'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학기에 내가 한 강의는 강의로서 생동감이 한참 떨어진 게 아니었는지 뒤늦게 걱정이 남는다. 하지만 내 의도는 내가 낸 책-『사람이 하늘』(2014)-에서 내용을 골라 읽으면서 강의를 진행함으로써, 두 가지를 겨냥하고자 했다. 하나는 내가 쓴 글이 정말 듣는(읽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로 공감을 주고 있는지를 내 강의 수강자들을 담보로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게다.

대부분 공감하는 눈빛이었으나, 더러 생뚱맞은 반응도 있었다. 그건 일차적으로 저자이면서 강의하는 내 자신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그나마 수강자들에게 주어진 시간 내에서 가능한 한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읽으며 강의하는 방법을 택하고 싶었다. 독송(讀誦)은 고래로 머리와 입이 하나 되는 전통적 학습방법으로 주목을 받아 오지 않았던가. 이런 내 의도가 어느 정도 먹혀들어갔는지 통 자신이 서질 않는다. 어쨌거나 시간이 지나면 책도 강의도 사람도 결국은 자기 길을 갈 수밖에 없다.

1995년 11월 29일 은사님이 미국서 소천하시자 급히 만든 추모책자 표지
▲ 필자의 은사 창파 이태영 박사님 1995년 11월 29일 은사님이 미국서 소천하시자 급히 만든 추모책자 표지
ⓒ 김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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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에 학부 고별강의를 할 때는 정년퇴임이라는 하나의 인생 고비 땜에 강의를 마치고 집에 오니 퍽 허전했다. 학과 교수들과 저녁회식까지 하고 왔지만, 허전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집에서 혼자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고는 불현듯 이태영(李泰榮; 1929-1995) 은사님 생각이 나서 「그리운 은사님」이란 시를 한 편 썼다. 시가 금방 씌어져, 윤동주가 시가 너무 쉽게 쓰여 지는 걸 탄식한 시구가 떠올랐다.  여기 그 때 쓴 시를 옮겨 적는다.

그립습니다.
창파 이태영 은사님.

오늘 모교에서 40년 마지막 학기 강의 끝내고
집에 와서 혼자 맥주 한 잔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34년 전 이맘때 선생님은 로스앤젤레스까지
나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선생님은 88년 가을 제가 세브란스병원에 갔을 때,
3일전 이미 병실을 비우고 미국으로 가셨습니다.
그 3일이 제겐 평생 응어리져 회한(悔恨)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아직 살아 있는 제게 고별강의기념 꽃다발을 건네줍니다.
5월 어느 날 미소 머금은 선생님 영전에 꽃바구니를 바치면서
저는 다시 선생님께, 그리고 내 제자들에게 참회(懺悔)를 구합니다.

오늘 선생님을 향한 끝 모를 참회가
그리움으로 제 가슴에 되돌아옵니다.
그립습니다.
창파 이태영 은사님.

지금 이 시를 옮기면서 눈물이 난다. 7년간이나 내 연구실에서 함께 지낸 제자는 연구실을 떠난 후 지금도 나와 통화하면 눈물이 난단다. 나의 수제자인 강 교수도 내 정년세미나에서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 눈물이 그 눈물이다. 근데 이번에 마지막 강의를 하고나서는 내 심정이 담담하다. 왜인가? 그동안 염치없이 너무 많은 강의를 해온 것 같다. 원래는 정년하면 그만인데, 무슨 석좌교수도 아닌 터에 강사료를 더 받는 특혜까지 3년간 누렸으니, 강의 하나 얻으려고 목을 매는 젊은 시간강사들 보기에 면목 없는 노릇이다. 대학 강의도 빈익빈 부익부는 어김없다.

이제야 말로 조용히 백수 노릇하며 은둔할 일만 남아 있다. 일전에 허균(1569-1618) 선생이 엮은 『숨어사는 즐거움』(김원우 옮겨 엮음, 2010)이라는 책을 보니 선현들이 남긴 삶의 여유와 지혜가 놀랍다. 당나라 사공도(司空圖)가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삼의휴'(三宜休)라는 정자를 짓고 살았는데, 쉬어야 할 세 가지 변명인즉 이렇다. 첫째로 재능을 헤아려보니 쉬어야 하고, 둘째로 분수를 헤아려보니 쉬어야 하고, 셋째로 늙고 눈마저 어두우니 쉬어야 한다는 게다. 위나라에서 전예(田豫)라는 사람이 벼슬을 하였는데, 여러 번 사직을 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나이 칠십에도 직위에 있는 것은, 비유컨대 통행금지 시간이 지났는데도 쉬지 않고 밤길을 다니는 것과 같아서, 죄인인 것입니다"고 하면서 병을 핑계대어 고향으로 돌아갔단다.

<몽계필담(夢溪筆談)>에 보면 두생(杜生)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대문 밖을 나가지 않은지가 삼십년이나 되었단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의 문 앞 뽕나무를 가리키며, "십오 년 전에 저 뽕나무 밑에서 더위를 피한 적이 있었으되, 그저 일이 없어 우연히 나가지 않았을 뿐이오."라며 태연히 말했다. 그럼 평상시에 무엇을 하느냐고 물으니, "단정히 앉아 있을 뿐이오."라 했단다. 책을 보느냐고 물으니, "이십년 전에 『정명경(淨名經)』을 보고 빠졌던 적이 있으나 지금은 잊었고, 그 책마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지가 오래되었습니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는 기품이 넓고 조용하며 말씨가 맑고 간단하니, 도가 있는 선비라 했다. 이쯤 되면 좌망(坐忘)하는 신선의 경지에 든 사람이라 할 것이다. 참으로 단아한 선비다.

아동문학가 권정생(1937-2007) 선생은 이오덕(1925-2003) 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독을 영광으로 아는 지혜를 우리도 가져야겠다."고 했다. 평생을 가난과 병에 시달려 온 탓인지, "한 끼만으로 살 수 있게, 그리고는 잠들지 말고 눈을 감은 채 오래오래 앉아 있고 싶습니다."고 썼다. 이런 삶속에서 『몽실 언니』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게다.

어쨌거나 세월과 함께 흐르는 강물처럼 내 강의는 이제 훌훌 떠내려갔다. 그간 강의실에서 맺어진 만남의 인연이 어떤 모습으로 피어날지 혹은 바람처럼 사라질지 나는 모른다. 혹여 그들은 나를 배신할지라도 나는 그리할 수 없다. 그게 강의로 살아온 내 운명이다. 강의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늘그막에 문기(文氣)는 살아 있어야 할 터인데, 이것도 노욕이라면 할 말이 없다.


태그:#마지막 강의를 하고, #교단을 떠나, #은사님이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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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로 태어나 지금은 명예교수로 그냥 읽고 쓰기와 산책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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