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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끼리 외식을 하거나, 회식이 있어 식당을 찾을 때마다 맨 먼저 하는 행동이 있다. TV 리모컨을 찾는 일이다. 대개 계산대 근처에 있거나, TV와 가장 가까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데, 찾아도 없으면 애써 주인아저씨를 불러서 달라고 요구한다. 보통은 별말 없이 건네주는데, 가끔 왜냐고 물어오면 긴히 봐야 하는 중요한 프로그램이 있다며 눙치곤 한다.

대개 식당마다 웬만한 스크린 크기의 TV가 정면 벽에 걸려 있다. 손님 중에 누군가 보든 안 보든 밤이고 낮이고 항상 켜져 있다. 그런데 축구 국가대항전이나 프로야구 중계가 있는 시간이 아니라면, 어디건 십중팔구 '종편'에 채널이 고정돼 있다. 한두 해 전부터, 적어도 식당에서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죽고 못 사는 공중파의 일일 드라마조차 종편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리모컨이 '확보'되면, 혹시 TV를 보고 있는 손님이 있나 대충 둘러본다. 손님이 원체 적거나 TV에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고 판단되면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용히 TV를 끈다. 그런 뒤 "TV가 냉장고만큼이나 전기를 많이 소모한다"고 짐짓 심각하게 말하며, 주인아저씨에게 리모컨을 슬며시 반납한다. 주방과 홀, 계산대를 정신없이 오가는 주인아저씨라면 사실 듣는 시늉도 않는다. TV가 켜져 있는지조차 관심 둘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틀어져 있으니 본다'는 식의 느슨한(?) 손님들도 별문제는 안 된다. 직접 찾아가 양해를 구하면 대개는 다 공감해준다. 사실 왜곡도 많고 지나치게 자극적이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민망하다고 '솔직히' 말하는 거다. 개중에는 "리모컨이 어디 있는지 몰라 그냥 있었다"면서 당장 채널을 돌리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조금 아쉬운 게 있다면, 그런 분들과 '합의' 후엔 대개 스포츠 채널로 귀결되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식당에서 리모컨을 가져오는 방법

종편 4사 로고
 종편 4사 로고

정말이지 쉽지 않은 상황은 종편의 방송을 뚫어지라 시청하고 있는 손님들이 적지 않은 경우다. 손님 중에 연세 드신 어르신들이 많은 식당의 경우인데, 주지하다시피 그분들이 종편의 주 시청자들이다. 대개 그분들은 당신들이 즐겨보는 프로그램 하나에도 무척 완고하셔서 잘못 말을 꺼냈다가는 호된 꾸지람을 감수해야 한다. 실제로 몇 차례 봉변을 당한 적도 있다.

사실 처음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면서 손을 놨었다. 어르신들의 '종편 취향'을 돌려세우는 건 불가능할 뿐더러 그분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려는 건 무모하다고 봤다. 어쩌면 우리가 그분들의 옛 추억들을 고루하고 황당하게 느끼는 것에 대한 반작용인지도 모르겠다는 반성도 가끔 하게 된다. 아무튼 종편 방송과 함께 해야 하는 자리는 불편할 뿐만 아니라 음식 맛도 없게 느껴진다.

그러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분들의 '허점'이 눈에 띈 것이다. 어르신들끼리 식당을 찾기보다 아들과 며느리, 손자들과 함께 오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 어르신들을 모시고 사는 집의 리모컨은 대개 그분들의 소유이기 십상이지만, 손주가 태어나는 순간 '채널권'을 빼앗긴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가 떼를 쓰는데도 모르는 체할 어르신들은 우리나라엔 단 한 명도 없다. 어르신들에게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하는 '멘트'는 이러하다.

"어르신, 재미있게 시청하고 계시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제 아이가 다짜고짜 만화영화를 보여 달라고 버릇없이 떼를 쓰는데, 부디 손주라 여기시고 채널을 양보해 주시면 안 될까요?"

실제로도 이렇게 말해서 실패한 적이 거의 없다. 종편 방송에 맞장구치며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한 어르신께 찾아가 공손한 말씨로 부탁을 드렸더니, 흔쾌히 그러라며 리모컨을 건네주셨다. 기꺼워하는 표정으로만 보면, 아이에게 달려와 용돈이라도 쥐여주실 듯했다.

아이를 팔았으니, 이후 채널이 만화 방송으로 고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만화 방송이 종편보다는 백배 낫다고 생각하면 아쉬울 건 없다. 그리고 아이를 동반한 손님들이 이어질라치면, 웬만해선 채널이 바뀌지 않는다. 별스런 차이는 아닐 테지만, 아이들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잠시나마 놓게 하는 '효과'도 있다. 아직까지 어린아이들은 스마트폰보다 TV의 큰 화면에서 나오는 만화를 훨씬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물론, 이러한 노력에도 도저히 손쓸 수 없는 곳이 있긴 하다. 바로 터미널과 역대합실같은 공공장소다. 그런 곳에서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면 어디에 부탁해야 할지 막막하기까지 하다. 매표소에 직접 말해보기도 하고, 때론 안내 데스크에 도움을 청하기도 하지만, 하나같이 귀찮다는 반응이다. 한번은 부러 역무실을 찾았다가 싱거운 사람 소리까지 들었다.

보수 신문, 종편의 활자본일까?

민중총궐기 관련 TV조선의 보도
 민중총궐기 관련 TV조선의 보도
ⓒ TV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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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총궐기 관련 채널A 보도
 민중총궐기 관련 채널A 보도
ⓒ 채널A뉴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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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편이 점령해 버린 식당을 '해방' 시키는 노력 외에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 가까운 친인척 집부터 보수 신문을 끊게 하고, 대신 '다른' 신문을 구독하게 하는 것이다. 구호단체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듯 내 돈으로 구독료를 대신 낼 각오를 해야 한다. 신문은 '충성도'가 그리 높지 않아 쏠쏠한 눈요깃감을 제공하는 종편 방송을 끊게 하는 것보다 백배는 더 쉬운 일일 것이라 본다.

지난 14일 '민중총궐기'에 참가한 후 연이은 언론의 편파 보도를 접하고 나서 다짐한 것이다. 신문을 보면서 '초록은 동색'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종편이 자극적인 화면으로 시선을 끌어당기면, 다음 날 신문은 '자상하게' 주석을 달아주는 식으로 여론을 호도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걸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일 집회가 있었던 현장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신문사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바로 코앞이 십만여 명이 모인 집회 현장이니 굳이 기자를 내보낼 필요도 없다. 그냥 가만히 앉아 창밖으로 내려다보기만 해도 어렵지 않게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다. 누가 누구를 걱정해주나 싶지만, 엄청난 압력의 물대포가 자칫 방향을 잘못 틀게 되면 신문사 건물의 유리창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얼핏 했다.

그런데 다음 날 그 신문들을 펼쳐보니 '예상대로' 그들은 불법과 폭력이 난무한 집회였다고 단정해 버렸다. 선정성을 먹고 사는 종편과는 달리 활자 매체라는 특성상 최소한의 심층 보도는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종편의 활자본'일 뿐이었다. 왜 집회를 불허했는지, 왜 집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차벽을 골목길마다 막았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시위대가 경찰버스를 파손하는 장면만 사진에 담았다. 현장에서 내가 본 모습을 그들이 못 본 건 아닐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담고 싶은 것만 담았을 뿐이겠지.

국정교과서 강행에 반대해 집회에 참가한 나는, 그들의 정의에 따르자면, 불법과 폭력을 자행하고 대한민국의 법치를 무너뜨린 범죄자가 됐다. 물론, 늘 '외눈박이'로 살아온 그들의 논조야 딱히 새로울 건 없다. 문제는 그들과 똑같은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그들이 제공한 관점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착각하고 있는 셈이다.

장인어른과 형, 신문 바꿔드려야겠다

조선일보 보도 갈무리
 조선일보 보도 갈무리
ⓒ 민주언론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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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보도 갈무리
 동아일보 보도 갈무리
ⓒ 민주언론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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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과 동생 같은 경찰들에게 꼭 저렇게 폭력을 써야 할까. 이젠 우리 시위 문화도 바뀌어야 해."
"규정까지 어겨가며 물대포를 쏜 경찰도 심했지만,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경찰버스까지 파손한 시위대가 더 큰 문제라고 봐."
"공권력을 상대로 저렇게 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폭력적인 시위대에는 일벌백계의 엄격한 법 집행이 필요해."

엊그제 지인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민중 총궐기 뒷이야기가 화제가 되자 '품평'하듯 다들 한마디씩 던졌다. 물론, 내가 집회에 참가한 사실을 전혀 모르는 이들인 데다 별 부담 없는 술자리여서 집회를 바라보는 자신들의 솔직한 생각들이 오갔다.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한마디 했다. 그 순간 회식 자리에 얼음장처럼 냉기가 흘렀음은 물론이다.

"혹시 그 자리에 직접 가보신 분 있나요? 불법, 폭력 집회로 단정하는 근거는 뭔가요? 십만 명도 넘는 저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왜 모였는지 생각해보진 않고, 다짜고짜 시위대만 몰아세우는 이유는 대체 뭔가요?"

기껏해야 쉰 안팎인 그분들조차 세상을 읽는 통로가 한정돼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똬리를 튼 수많은 정보들은 하나같이 종편과 보수 신문, 또 그들을 여과 없이 충실하게 '재방송'해주는 포털을 통해 주입된 것이었다. 종편과 보수 신문은 그렇게 두 날개로 훨훨 날고 있었다.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비유의 실체를 다시금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11월 16일 5개 주요 일간지 '민중 총궐기 대회' 관련 1면 보도
 11월 16일 5개 주요 일간지 '민중 총궐기 대회' 관련 1면 보도
ⓒ 민주언론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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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장인어른이 수십 년째 읽고 계시는 보수 신문을 어떻게든 끊게 하고, 다른 논조를 담은 신문을 구독 신청할 계획이다. 자칫 급격한 변화에 놀라실 것을 감안해 당분간은 중도적인 신문이 좋지 않을까 싶다. 그다음은 낼모레 환갑을 맞는, 고향 사는 큰 형이다. 그렇게 보수적인 분은 아니지만, 십 년 가까이 보수 신문을 읽고 계신 게 조금은 두렵다. 가랑비에 옷 젖을까 봐.

그래 봐야 한 달에 들어가는 돈(신문 두 개의 구독료)이 고작 3만 원 남짓이다. 나는 이러한 행동이 그 어떤 기부보다 더 시급하고 의미 있는 일이리라 확신하게 됐다. 집회가 '단기전'이라면, 이건 '장기전'이다. 지난 14일 민중 총궐기 참가와 이후 줄곧 보고 듣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대한 나만의 저항 방식이다.

○ 편집ㅣ박정훈 기자



태그:#민중총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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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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